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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은 기적을 이룬다! (성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5-04-25 조회수1,072 추천수11 반대(0) 신고
 

            사랑은 기적을 이룬다! (성마르코 복음사가축일)


  십자가를 안테나로!

  한번은 어느 교우분이 제게 ‘나는 지금 병 때문에 몹시 아프지만 이것을 참고 하느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치유되리라 믿는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저는 그분에게 이런 충고를 하였습니다. “자매님, 물론 그 믿음은 훌륭하지만 지금 당장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치료를 받으십시오. 예수님 시대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의사를 만나기가 어려워서 예수님께서 직접 치유를 해주시고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요즘은 훌륭한 의사들이 예수님의 손길이 되어 대신 치유를 하고 기적을 일으킨답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 ‘현대 인물사’라는 프로그램에서 이산의 아픔을 삭이며 희생과 봉사의 삶 살다간 참의사 장기려 박사(복음병원 설립자)의 삶이 방영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 훌륭한 의사들을 통해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사랑으로 기적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과 또 새로운 복음사가들을 통하여 당신의 업적을 기록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장기려박사에 대해 이 강길님이 올리신 글을 퍼드립니다. 가브리엘통신

 

  <무료병원 운영과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통해 仁術을 펼친 명의 장기려박사, 그는 북녘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지낸 민족분단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4개월만인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을 탈환했다. 당시 김일성의과대학 외과의사였던 장기려는 대학병원과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군은 평양을 철수하게 되고 이 때 장기려를 남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를 야전병원 환자수송용 버스에 태웠다. 그것이 가족과의 45년에 걸친 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 몰랐다.

  그는 언젠가 가족들을 만날 거라는 희망 하나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다시 가족을 만날 거라 했던 그의 바람은 길고 긴 분단의 세월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장기려의 인생은 헤어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바쳐진 사랑과 기도였다. 의사 장기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 의료계에 '가난한 사람도 치료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박애정신의 꽃을 피워냈다. 그는 의사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의 차원을 넘어 신이 허락한 소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의사 한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다음과 같이 맹세했다.

 

 "의사를 한 번도 못보고 죽어 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장기려는 경정의전에 들어가면서 신 앞에 한 이 약속을 생이 다할

때까지 지켜나갔다. 평생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친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로

불렸다. 이광수는 장기려를 가리켜 '당신은 聖者아니면 바보요'라고

말했다. 장기려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북에 있는 가족도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음을 갖고 하루 2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청십자 의료보험조합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 설립


  병원 규모가 커지면서 무료진료가 불가능하게 되자 장기려박사는 1968년

'건강할 때 이웃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표어 아래, 북유럽의 의료보험제도를 본 딴 '청십자 의료협동조합'을 탄생시켜 한국 의료보험제도의 모태가 되게 하였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때, 주변의 몰이해와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병의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는 것으로도 슬픈데 가난한 사람에게 과중한 치료비를 부담시킬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장기려는 한국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장기려박사는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하고 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수술에 성공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 장기려는 한국 간외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장기려는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서 자기 돈으로 수술을 해주었다. 자기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가난한 환자를 병원 뒷문을 열어주어 야밤에 탈출시키기도 했다. 평양시절 그의 부인은 장기려가 생활비를 가져다 주지 않아 의사가운과 환자복 삭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는 평생 자기 집 한 칸 갖지 않고 병원 옥탑방에서 살았다.

“다른 사람이 모두 만날 수 있을 때, 나도 가족을 만날 것이다”


  평생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산 장기려 박사. 그 자신은 분단 조국에 의한 피해자였다. 1.4후퇴 때 환자를 돌보는 와중에 부모 부인 5남매를 평양에 남겨두고 둘째아들만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 이산가족이 된 장박사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고향의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 그런 그가 85년 정부의 방북권유를 거절하였다.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장박사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하였다.


  예수처럼 살고 싶었던 사람


  절대빈곤시절의 ‘천막 무료진료’부터 미래를 내다본 의료복지 정책인 ‘청십자 의료조합’까지, 그것은 그의 ‘사랑이 이뤄낸 기적’이었다. 그는 예수처럼 살고 싶어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분단의 아픔을 가난한 환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많은 치유의 기적을 이루어낸 의사 장기려의 삶은 오늘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살아가고 있는 크리스찬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빛과 소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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