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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25) 나에게 내가 낯설게 느껴질 때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4-26 조회수943 추천수7 반대(0) 신고

2005년4월26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ㅡ사도행전14,19-28;요한14,27-31ㄱㅡ

 

     나에게 내가 낯설게 느껴질 때

                                           이순의

 

 

 

 

친정 아버님께서 내 이름을 지어주실 때는 어찌나 순하든지 한문으로 순할 순자를 넣어주셨다고 한다. 큰언니의 기억으로는 우리 막내는 미운참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지금도 입술에 달고 하시는 말씀이시다. 어떻게 사람이 미운참이 한 번도 없을까마는 내가 생각해도 굉장히 순했던 것 같다. 더구나 내가 그렇게 순둥이었어도 놀림감이 되거나 모난 대우를 받지 않았던 이유는 모두 부모님을 잘 만난 덕이었을 것이다.

 

시골마을의 국민학교에 1학년으로 입학하던 날에 읍내 양장점에서 맞춘 빨강색 원피스에 빨강색 구두를 신고, 빨강색 가죽 가방을 등에 지고 학교에 간 학생은 나 혼자였다. 친구들이 내 구두 한 번을 발에 끼워보려고 서로서로 자기들의 검정고무신을 내 앞에 가지런히 놓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떤 친구였는지는 모르지만 나 보다 훨씬 발이 큰 친구가 내 구두를 신고 까치발을 딛으며 뒤뚱뒤뚱 걸어가던 모습이 영화처럼 선명하다. 

 

늘 조용했으므로 나는 가끔씩 소설 소나기에 나오는 병약한 주인공 소녀의 모습이 내 어린시절의 모습과 너무나 일치하다고 생각 할 때가 있다. 매일 읍내에 있는 재생의원에까지 걸어가서 주사를 맞고와야 했고, 비 오는 날에는 버스를 기다려 타야하는데, 날 좋은 날에 버스를 타지 않아서인지? 어린 아이가 손을 들어서 장난처럼 보였는지? 버스는 신작로의 흙탕물을 바퀴로 처서 나에게 쫘악 뿌린 다음에 쏜살같이 달아나버곤 했다. 황토빛 짙은 흙탕물에 흠뻑 젖어서도 나는 읍내 의원에 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는 푸른색 백원짜리 지폐 두 장씩을 매일 주셨던 것 같다. 한 번도 거절하시지 않았다. 큰언니의 등에 업혀서 읍내를 오고 갈 때는 주사가 싫어서 그토록 몸부림을 치느라고 큰언니를 곤욕스럽게 했다는데 나 혼자서 읍내 의원에 다닐 때는 잘도 다녔다고 한다. 그것도 이유가 있었다. 내가 혼자 읍내 의원에 가겠다고 자청하게 된 시기는 국민학교 3학년 때이다. 어느 날 학교에 등교를 했는데 내 책상과 의자가 복도에 나와있었다. 그리고 부반장이었던 짝궁이 나에게 복도에 앉아서 공부를 하라고 했다.

 

충격이었다. 나는 나의 책상과 의자를 교실로 끌어들였고, 친구는 쉬는 시간마다 내 책상과 의자를 뺏으려고 했다. 완력으로 안되니까 급기야는 의자만이라도 복도에 내어 놓고 나로하여금 교실 안에 앉지를 못하게 했다. 결국 그날 하루의 수업이 끝나기 전에 선생님께 들킨 것 까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친구는 "냄새나요. 짝궁 바꿔주세요." 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날 부터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읍내 의원에 다녔다. 비가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고 주사를 맞으러 다녔다.

 

지금은 의학이 발달하여 신생아도 중이염 치료는 물론 수술도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그 시절에는 머리골격이 다 자란 사춘기까지는 수술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기를 보는 애기순이가 신생아인 나를 물에 빠뜨리고는 꾸지람이 무서워 숨겨버렸다. 그 업보를 치른 것이다. 주사가 무서워 읍내의원에 가는 것이 싫었는데, 주사보다 더 무서운 것이 생긴 것이다. 지금 어른이 되어 돌아보면 그렇게 많은 돈을 어머니는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었다. 

 

병을 앓고 살아야하는 게 운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더 큰 병마들이 엄습하였고, 아버지께서는 밥상 앞에 앉은 막내를 만져보고 또 만져보며 늘 말씀하셨다. "내 막내는 미스코리아여. 아부지가 돈 많이 벌어서 성형수술 다 해주고, 잘살도록 다 해줄 것인께 아무 걱정말고 건강하기만 해야혀." 그리고 눈물바람을 하시곤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토록 금쪽 같은 막내와의 약속을 지키시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도 3년이 지나서야 나는 완치판정을 받았다.

 

그러했으니 얼마나 얼마나 귀하디 귀한 대우만을 받으며 살았을 것인가?! 모든 부모님의 자식은 다 귀하며, 부모네들께서는 최선을 다하여 자식을 돌보고 가꾼다. 내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나를 키우시고 가꾸시고 치료하며 키우셨다. 유난스럽게도 막내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 밖에 없었던 아프디 아픈 자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주변에서 조차 귀한 대우를 받으며 자랐다. 부모님의 후광이 그렇게도 큰 대우를 동반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나의 지금 모습을 낯설어한다. 나에게 구두를 빌려 신어 보자고 했던 친구들이 지금의 나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겨우 저렇게 밖에 못 살을 애였냐고 비웃을까? 우리집 큰 대문 앞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기웃거리던 남자애들은 지금의 나를 보면 무엇이라고 말을 할까? 잘난 남편만나 잘 살을 줄 알았는데 별것도 아니다고 무시할까? 큰대문집 안에서 그렇게 나오지도 않고 도도하게 굴더니 겨우 방 두 칸 사느냐고 깔아뭉개는 것은 아닐까? 

 

그래도 그것은 좀 더 나은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이천 평에서 오십 평 부족한 대 저택에서 살다가 골방에 살은지 19년이 되었다. 내가 20년 세월을 궁색스럽게 사는 동안에 일가 친척들은 승승장구에 파죽지세라! 늘상 뉴스에 나오시는 어르신 부터 각 분야의 지도자 또는 책임자가 되어 바쁘신, 감히 알현 조차 송구스러운, 격이 다른 친정의 풍경을 접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이 두 칸의 내 아지트가 정말로 내가 사는 곳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착각에 빠져든다.

 

그토록 재주가 많았고, 심성이 고왔고, 솜씨가 그만이며, 차분한 내가 국민학교 졸업장도 없는, 너무나 가난하디 가난한, 통째로 무식하여 한탄스러운........ 열거하기조차 자존심 상하는 저런 남자의 각시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져 몸서리 쳐지는 날이면 내가 나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만다. 지금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있는가? 지난 세월동안 무엇을 일구고, 무엇을 가꾸며, 무엇을 했는가? 내가 해온 것이 무엇이 있기는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악만 키워 온 모질은 세월만 살아버린 것은 아니던가? 

 

있기는 있다. 없지는 않았다. 처음 시집 와서는 당연히 한글도 잘 모르는 남자의 각시였으니 남편보다 더 가갸거교도 모르는 각시처럼 행세해야만 이런 가족 구성에서는 편안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해서 살았고, 가르치다가 가르치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더 이상의 바람은 비극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만 내 가슴의 남편이라는 이상향을 한꺼풀 한꺼풀 접으며 낮추며 삭히며 사는 법을 터득했고, (그런데 왜 이 대목에서 이렇게 눈물이 나오시나요?)  

 

내 자신이 세상을 향해 무엇이 얼마나 당당하고 잘났다고? 끼리끼리 잘도 살고, 끼리끼리 잘도 즐거운데, 내 주제 파악이나 할 것이지, 남편이 잘났냐? 돈이 많으냐? 내세울 것이 있느냐? 겨우 방 두 칸 살이에 끼니 때우기도 급급한 밑바닥 인생이 무슨 할 말이 있고 무엇을 잘난척 할게 있느냐?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더냐? 들어주기나 하더냐? 믿어주기나 하더냐? 보지도 듣지도 만나지도 말자! 행하지도 나가지도 말하지도 말자! 이것이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하는 진리이다. 

 

내가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나는 지금도 내 모습을 너무나 낯설게 느끼고 있다. 내가 결혼을 해서 살아온 방법은 펼치는 삶이 아니었다. 무조건 오므리고, 접고, 줄이고, 낮추고, 숙이고, 덜어내고, 쪼개고, 참고, 뺏기고, 주고, 팔고, 줍고, 가두고, 찢고, 삭히고, 낮은데만 보고, 앞만 보고,.......그러다가 다투고, 싸우고, 악종이 되어서 살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나 어렸을 적에 아버지 어머니께 쪼꼼만 받을 걸! 그때 너무 많이 받아서 지금 내가 받고있는 천벌이라면 그때 아버지 어머니께 주시지 말으시라고 할걸! 

 

요즘들어서 우리 엄마가 너무너무 보고싶다. 막내를 강제로 시집 보낸 죄책감에 전화 한 통화도 하시지 못하는 죄인이 되어버린 우리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다. 그래도 나는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께 전화를 하지 않는다. 전화에 대고 막내는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으시라는 빈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하루도 빼지 않고 푸른 백원짜리 지폐 두 장을 매일 주시며 키우실 때는 이렇게도 천한 삶을 살게 될지 상상이나 하셨을 것인가?! 지금도 나는 거리에 나서면 착각을 한다.

 

나 어렸을 적 친구들이 나를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내 고향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분명히 내 마음 속의 지금 내 모습은 부끄러움이다. 챙피하다. 나를 낳아 정성으로 키워주신 부모님께 죄송할 뿐이다. 아버님께서 지어주신 이름 석자가 무색하다.

 

ㅡ"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14,27

 

 

풍경은 평화롭고....

 

 

 

언제 한 잔 술에 주정이라도 해 볼까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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