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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복음묵상(2005-05-03)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5-03 조회수1,004 추천수2 반대(0) 신고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요한 14, 8-9)
 
교회는 오늘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두 사도의 축일을 지냅니다. 예수께서

 

는 인류구원을 위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사람들을 제자로 불

 

러 당신을 따르게 하시고, 그 중에서 열 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으니, 12

 

사도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야고보의 동기 요

 

한,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 마태오, 토

 

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데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가리옷 사람 유

 

다입니다.(마르 3,13-19; 마태 10,1-4; 요한 1,35-51 참조) 필립보는 베드

 

로와 안드레아의 고향인 베사이다 출신으로 처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

 

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예수로부터 직접 제자로 간택되었고, 나타

 

나엘(공관복음의 바르톨로메오를 지칭함)을 예수께 인도하였으며(요한

 

1,43-47) 오 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에서 예수님의 첫 대화자로 등장하

 

고(요한 6,5-7), 유다인의 명절에 예배를 드리려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예수님을 찾아온 그리스 출신 이방인들을 예수님께 소개도 하였습니다.

 

(요한 12,21-23) 또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수난 직전에 "아버

 

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도 하였습니다.(요한 14,8-9) 구전에 의

 

하면 필립보 사도는 그리스를 무대로 전교 하다가, 62년 도미시안 황제의

 

박해 때 히에라폴리스에서 십자형의 죽음으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필립보 사도와 나란히 축제의 주인공석에 앉은 사도는 알패오의 아

 

들 야고보 사도인데(마르 3,18), 이는 요한사도의 형제로서 제베대오의 아

 

들 야고보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그러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주님의

 

형제로서(갈라 1,19), 야고보 서간의 저자인지, 예루살렘 첫 사도회의를

 

주관하면서 이방인들의 교화를 주장한 야고보(사도 15,13-21)와 동일 인

 

물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도 필립보와 같은 해(62년)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오늘 두 사도의

 

축일에 봉독되는 복음은 요한복음 제2부(13-21장), 즉 제자들 앞에서 행하

 

신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과 수난, 죽음, 부활에 해당되는 대목으로

 

서 필립보 사도와 직접 관련이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대목

 

이 오늘의 복음으로 채택된 이유가 단지 필립보 사도의 이름이 언급되었

 

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극히 소극적인 사고 안에 머물게 되는 것입

 

니다.

 

 

 

오늘 복음에는 토마와 필립보 두 사도가 등장합니다. 토마는 예수께서 이

 

제 당신이 가야 할 곳으로 간다고 하시면서 "여러분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 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 우리는 당신께서 어디

 

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5절) 하고 묻

 

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다"(6절)는 것이고,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는 그 날 모세 앞에서의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자신의 신성을 밝히시는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 방법을

 

사용하십니다.(출애 3,14; 요한 6,20) 예수께서는 "에고 에이미" 방법을 통

 

하여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 자체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써 우리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분명해진 것인데, 이제는 사람들이 인

 

생에 있어서 두 갈래의 길을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더 나은 진리를

 

위한 학문적인 탐구가 목표를 얻었으며, 생명 과학적인 노력을 기울여 그

 

렇게 갈구하는 참 생명을 찾게 된 셈입니다. 예수께서 이른바 그런 것을

 

가지고 계신다기보다는 그분 자체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하느님 계시의 진리를 밝힐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진 토마 사도에게

 

참으로 감사드려야합니다.

 

 

뿐만 아니다. 토마에 이어서 이번에는 필립보가 나서서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8절) 하고 청을 넣는

 

데, 이 간청은 필립보가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바램입니다. 즉, 토마스 사도의 질문으로 이미 얻어낸 "지

 

상예수를 믿음으로 보는 자는 곧 아버지를 본 자"임을 필립보가 깨닫지 못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한번 더 자신을 밝히시는데, "필립

 

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9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지상예수와 함께 지낸 것이 사실 하느님과 함께 지낸 것임을 뜻

 

합니다. 예수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심으로써 두

 

분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동은 아

 

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문(愚問)은 없다는 말대로 토마나 필립보 사도의 우문같은 질문이 없었

 

다면 우리는 어떡하겠습니까?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 두 눈으로 보려고 애쓸 것입니다. 사실 하

 

느님은 인간의 시각적 능력을 벗어나 존재하십니다. 따라서 아무도 하느

 

님을 볼 수 없으며, 본 사람도 없습니다.(요한 1,18; 5,37; 6,46) 우리는 예

 

수님을 직접 본 사도들과 사도들을 계승한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봄으로써

 

이미 하느님을 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사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

 

된 사람입니다.(요한 21,29)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청원도 감사도 찬양도 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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