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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복음묵상(2005-05-05)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5-05 조회수841 추천수2 반대(0) 신고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러자 몇몇 제자들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고 또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되리라든지,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든지 하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고 수군거렸다.(요한 16, 16-17)
 
앞서간 복음(15,26-16,15)에서 오시게 될 성령 하느님의 정체는 실제적인

 

차원과 학습적 차원으로 계시되는데, 성령 하느님의 실제적 차원은 신앙

 

의 행위에 대한 '협조자'이고, 학습적 차원은 신앙의 내용에 대한 '진리'입

 

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파견은 예수께서 떠나시는 조건으로 가능한 것

 

이기에(16,7) 예수께서는 다시금 '떠남'에 대하여 언급하십니다. 오늘 복

 

음에서 예수님의 '떠남'은 '잠시 동안'에 해당하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예

 

수님을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게 되었다가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6절) 그러자 오랜만에 제자들이 반응을 보이는데, 2

 

차 고별사가 시작되고 꽤나 오랫동안 침묵으로 스승의 말씀을 듣고 있던

 

그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함', '얼

 

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됨', '아버지께 가심' 등에 대하여 몰이해를 나타내

 

보이면서 서로 수군거립니다.(17-18절)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의아심을 직

 

감하시지만 직접적인 해답을 주시기는커녕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제자들

 

은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임을, 그러나 제자들의 근심이 곧 기쁨

 

으로 전환될 것임을 예고하시는 내용입니다.(19-20절)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제자들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모양입니다. 보지

 

못한다? 보게 된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인가? 보면 보는 것이고, 못

 

보면 못 보는 것이지, 보지 못하겠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된다는 말

 

이 과연 무슨 뜻인가? 제자들의 머릿속에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

 

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 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는 말씀이 떠올랐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

 

은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을 못 보게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지금 성서를 앞에 둔 우리는 이 대목이 예수님의 죽음, 부활과 발현, 승천

 

과 성령강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림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당연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입니다.

 

우리 인간은 만나서 헤어질 때 "그럼, 잘 가. 다시 보자", "또 보자"고 말을

 

합니다. 꼭 언제 다시 볼 것을 약속하지 않더라도 막연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보통이죠.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살아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든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별이 죽음이라면

 

그런 말은 더 이상 못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기 때

 

문에 제자들에게 "못 본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실 것이기 때

 

문에 "다시 보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는 죽음과 부

 

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분께 있어서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

 

며, 이 사건이 곧 아버지께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통에서

 

기쁨이 솟아나고 죽음에서 생명이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 생명과 기쁨이

 

죽음과 고통을 대체하지는 못합니다. 죽음 없이 생명이 있을 수 없고, 고

 

통 없이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고통은 참혹하고 쓰라리고 아픈 것입니다. 제자들 또한 스승의 고

 

통과 죽음의 시간에 스승과 함께 어둠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고, 그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두 번 다시없을 가

 

장 참담하고 비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를 죽였다"고

 

세상은 말할 것이고, "우리가 예수를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

 

로 제거했다"고 세상은 확신할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자신의 권력으로

 

예수를 제거했음을 오만과 자만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기쁨도 제자들의 슬픔도 그 어느 것도 오래 가지 못하는데, 예수님의 부활

 

이 이 둘을 바꾸어 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20절)

 

 

세상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그분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겠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자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눈을 가진 자도 잠시동안은 못 보게

 

되겠지만,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오시게 될 성령' 안에서 그분을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강림 사이에 존

 

재하는 예수님의 시간적 부재(不在)는 제자들의 마음을 슬프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살아나고, 고통으로부터 기쁨이 태어납니다. 다시없을 역전극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의 눈으로 예수부활과 성령강림사건을 보는

 

사람만이 참된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고, 이 참된 생명과 기쁨은

 

사실상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유효한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어찌 1년 365일 중에서 오늘만 어린이들의 날이

 

겠습니까? 1년 365일이 모두 어린이들의 날이 되어야합니다. 흔히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가 내 인생의 보험이 되는 경우도 있고, 내 꿈을 이뤄줄 희

 

망으로 생각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위해서라면 내 모든것

 

을 바쳐서 뒷바라지를 합니다.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요, 희망이기 때문입

 

니다. 이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미래의 역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년

 

에 하루 날을 잡아서 선물도 사주고, 놀러도 가고, 많은 행사들이 벌어지

 

곤 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어린이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어린이는 그저 어린이일 뿐입니다.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요, 희망이 아닙

 

니다. 그것은 어린이들의 미래요, 어린이들의 희망입니다. 어린이는 지금

 

그모습 그대로, 지금있는 그대로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우리의 어린이는 현재의 희망이요, 꿈입니다. 어른들의 얄팍한 계산으로

 

기뻐해야할 어린이날에 상처받는 어린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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