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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35) 힘 없는 신부님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5-11 조회수1,103 추천수15 반대(0) 신고

2005년5월11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ㅡ사도행전20,28-38;요한17,11ㄴ-19ㅡ

 

                힘 없는 신부님

                                   이순의

 

모양은 카라꽃인데 주황꽃 카라인가요?

우리집 아래층 전도사님의 화단에

 

 

 

주님께서 부활도 하셨고, 부활 후 공생활도 마치시고 승천하셨으며, 이제 우리는 부활의 마지막 축제일인 성령강림 축일을 기다리고 있다. 전례적으로 성령강림 대축일을 끝으로 부활시기가 끝나고 연중시기가 이어진다. 가톨릭이라는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1년동안에 그리스도교회의 모든 과정들을 참여하고 묵상할 수 있도록 잘 짜여진 전례에 자부심과 감사를 느끼고 있다. 주님께서 승천하셨으니 우리를 사랑하신 성부와 성자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신 은총의 시기를 빠뜨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삼위이시며 하나이신 분의 구원사업에 불림을 받아 그 안에 머물러 은총을 누리는 곳이 교회이기도 하다. 매 전례마다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약속하시며 이루고자하시는 신비는 사랑이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의 결과로 또 사랑을 받는 신비를 체험하는 삶을 살고있다. 교회의 주인은 하느님의 백성이다. 믿음을 가진 모든 신앙인뿐만 아니라 창조주의 피조물 중에서도 하느님의 모상대로 빚어진 모든 인간은 아버지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우주만물 중에서 인간을 뽑으시고, 친히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 오신 분이시다. 오셔서 아버지의 일꾼 12제자를 세우시고,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렇듯이 사도로부터 이어져 온 일꾼은 오늘 날 성직을 사는 사람들이다. 성직자는 아버지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모든 양들을 돌보는 종의 신분이다. 양떼를 먹이고 돌보며 안전하게 지켜줘야 하는 목자의 신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성직자를 높이 보거나 대단한 힘의 논리로 보는 경향이 있다.

 

언젠가 은경축도 훨씬 넘기시고 사제생활 30년을 바라보시는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신부에게 무슨 힘이 있는가? 신부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 일반적인 평신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시다. 신부님처럼 인기있고, 신부님 처럼 존경 받으며, 신부님 처럼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다고 저런 말씀을 하실까? 라고 의구심을 갖는 교우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제를 오래 살으신 신부님일수록 그 사실을 부정하시는 신부님은 없다. 신부님은 정말로 힘이 없다. 그렇다고 그 힘을 길러서 로보트 태권V가 되려고 하시지도 않는다.

 

사제는 평신도와 가까운 것 같아도 멀리있다. 그 이유는 사제 스스로 평신도와 멀리있으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과중한 일정 탓도있지만 평신도들 쪽에서 어려워하거나 조심스러워하는 경향이 더 짙다. 사제를 근접하여 생활해 본 몇몇 교우들을 제외한 일반적인 견해로는 사제의 자리가 멀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몇몇의 교우들이 신부님과 잘 맞았을 때는 문제가 없다. 잘 맞지 않았을 때는 아무도 모르게 사제의 자리는 허수아비 자리가 되는 것이다. 신부님들도 본당에서 왕따 당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예를 든다면 이렇다. 본당의 어느 힘있는 임원과 신부님의 의견이 절충이 되지 않았을 때, 또는 그 임원의 마음에 마귀심보가 들어 앉았을 때, 그 임원보다 신부님의 활동 반경이 취약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부님은 교우들을 불러놓고 일반인과 같은 하소연이나 험담을 할 수 없지만, 일반적인 교우들은 측근이나 활동하는 교우들을 사석으로 불러내서 자기가 하고싶은 말을 얼마든지 뱉을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실제로 많은 활동을 하다가 보면 본당 신부님을 제 손아귀에 넣고 떡을 주무를 수 있다고 발설하는 교우들을 종종 대면하게 된다.

 

그런 경우는 신부님이야 마음의 고생만 하시다가 떠나시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 본당의 많은 교우들이 손해가 막심하게 된다. 이유도 모르고 소용돌이에 휘몰리게 되고, 영성은 좌절되며, 교회공동체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실망감만 쌓여가게 된다. 그렇다면 신부님과 상관없이 본당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십자가는 신부님 탓으로 돌아간다. 우리 교회공동체가 꼭 알아야할 것이있다면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고,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되고, 식의 흑백논리를 희석시켜야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잘 되지 않는 게 또 교회공동체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부님을 이겨내기 위하여 자리를 지키고 앉아 돕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는 옹이의 자세를 취하는 경우다. <신부 너 해봐라. 어디 두고보자.>는 식의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경우는 과연 하느님을 위한 처사인지? 자기자신을 위한 처사인지? 누구를 위한 처사인지? 그 분별력 조차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이견의 갈등들이 동기가 되었다는 것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심지어는 본당신부님께서 더 이상 사목활동을 집행할 수 없도록 훼방을 놓아버리는 경우도있다. 그럴경우에 그런 분들이 모르는 게 있다. 

 

사제는 본당에서 미사집전 이외의 어떠한 신심단체 활동을 장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신부님은 마음을 비워버리고 미사집전과 성사를 주례하는 이외의 어떠한 활동도 하지 않기로 마음 먹으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포기해버리는 신부님은 거의 없다. 사제의 절대적인 권한은 성사집행이며 그 부분에 대하여는 아무리 실권이 센 평신도라고 해도 절대로 넘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용퇴란 그럴 때 하는 것이라고. 사제를 용퇴 시킬 수는 없다. 사제의 직분은 전체교우들의 것이며 하느님의 영역이므로 어느 한 사람이나 몇몇 교우들의 의지로 용퇴를 시킬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밸이 꼴린 사람이 용퇴를 결정해야한다.

 

나는 사제를 살을 만큼 살아보신 분께서  <신부에게 무슨 힘이 있는가? 신부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 라고 하신 말씀을 참으로 가슴 아프게 들었었다. 물론 세월이 스승이라고 노련한 장년의 사제들도 많으시지만 새로이 사제의 길을 가시는 솜털이 부숭한 젊은 사제들도 많기 때문이다. 세속이라면 경륜으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공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미령하신 사제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맹목적인 공경에 무례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열심히 노력을 한다. 실제로 젊음이 주는 경험부족은 있을 수 있으나 방자하거나 무례한 젊은 사제는 그리 흔하지 않다.

 

한편으로는 참으로 딱하기도하다. 흔히 어른들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 <너도 늙어봐라.>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그 나이가 되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직자는 그 나이도 되어보기 전에 그 나이의 세월을 살으신 분들의 가슴이 되어드려야 하고, 위로가 되어 드려야하고..... 마음은 펄펄펄 뛰어놀을(?) 나이인데 삶은 만인의 아버지이신 그리스도를 살아야 하시니 얼마나 딱하고 안타까운 생활인인가?! 그런데다가 무조건적으로 꼴통인 교우를 만나게 되면 신부님은 많은 양들 가운데서 길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벌판을 해매느라고 외로워지는 목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도 신부님께서 그 교우를 매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교우는 신부님을 두고 여러 사람들에게 정당성있는 여론을 유포하게 되지만 신부님은 결코 그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이 신부님께 당했다느니 그 신부님이 인간이하라느니 하는 이유는 신부님의 신품이 잘 못 되어서가 아니다. 신부님을 비호하려는 또다른 교우들과의 마찰이 첫째 이유이며, 두 번째로는 자기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어지지 않은 불만의 원인이다. 정말로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나는 7성사 안의 품을 받으신 신부님을 신부님 답게 세워드린 적이 있었는가를! 신부님께서 곤란해지시기 전에 내 자신이 먼저 걸림돌을 치워드린 적이 있었는지를! 어떠한 경우라도 신부님께서 곤란하시다면 기꺼이 용퇴할 의향이 있는지를!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려고 주님께서 하늘로 올라 가셨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성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진 사도들을 지켜드려야 하는 것도 우리 자신이다. 양들이 있기 때문에 목자가 있는 것은 분명한 원칙이다. 양들이 없다면 목자가 있어야할 이유도 의미도 없다. 그러나 제 아무리 힘센 양이라도 목자의 휘파람 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면 제 스스로 구렁에 빠져들 것이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버리고 한 마리의 양을 구하지 않는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이 안전하다고 느껴질 때 한 마리의 양을 구하러 나설 것이다.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아무리 자기가 한 마리의 양이라고 메에~! 메에~! 소리를 질러도 포기하게 될 것이다.

 

<ㅡ☆잠언3,13  †지혜를 찾으면 얼마나 행복하랴! 슬기를 얻으면 얼마나 행복하랴! ㅡ☆지혜15,3  †하느님을 아는 것이 의를 완전히 이루는 것이며 하느님의 힘을 아는 것이 불멸의 근원이다.   ㅡ☆호세4,6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해서 망한다. 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두지 않으니 나도 너희 자녀를 마음에 두지 않으리라.   ㅡ☆아모5,4  †나 야훼가 이스라엘 가문에게 선고한다. 살고 싶으냐? 나를 찾아오너라.ㅡ>

 

진정으로 나는 그리스도 공동체에 어떠한 모습의 신앙인이었는지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신부님은 힘이 없으시다는데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시지를 않는가?!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 마음에 오소서!

 

ㅡ그때에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하셨다.)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그동안에 오직 멸망할 운명에 놓인 자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요한17,11ㄴ-12ㅡ  

 

     

우리집 아래층 전도사님의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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