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49) 예스터 데이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5-05-12 조회수817 추천수13 반대(0) 신고

 

어제는 색다른 경험을 한 하루였다.

우리팀의 레지오 단원 중에 장기 유고로 계셨던 자매님의 장례미사에 참례하고, 화장장까지 장지수행을 했는데, 레지오 단원으로서 장지까지 가기는 처음이었고 화장장도 난생 처음 가 본 하루였다.

 

말로만 듣던 벽제화장장.......

예전에 듣기로는 흔히 화장터라 부른것 같은데 입구에 화장장이라고 써있었다.

화장터보다는 화장장이라는 말이 훨씬 어감이 좋은것 같았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이긴 하지만 그 통과의례가 참으로 복잡하다는걸 실감한 하루였다. 태어날 땐 엄마의 산통과  자궁속에서 나오려는 자신의 몸부림으로 탄생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죽음 후의 모든 일은 온전히 살아있는사람의 몫인것 같다.

복잡하고도 많은 절차는 사람이 태어났을때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확실히 태어날때보다 죽었을 때가 더 복잡하다.

 

대기실에 앉아 예약시간이 되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전광판을 보고 있자니 종합병원에서 약처방이 나올때처럼 고인의 이름엔 번호가 매겨져 화장이 시작된 시각과 진행 또는 종료라는 자막이 계속 떠올랐다 바뀌고 있었다.

종료되었으니 유족들은 관망실로 내려오라는 자막도 떠올랐다.

 

대기실에 앉아 전광판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병원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신생아의 발목에 엄마이름과 아기의 생년월일을 적은 패를 끼워놓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아이를 낳을 땐 그런 일이 없어 경험이 없다.

작은 병원이어서 아이를 입원실에 데려다 보여주고 데려가곤 했었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서도 저렇게 번호와 이름으로 매겨져 전광판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더우기 유해를 다 태운 후에는 (몇번 종료되었으니 유족은 관망실로 내려오시오) 할 때엔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번호로 부를 뿐이었다.

 

문득 병원의 영안실에서 시신이 바뀌었다던 뉴스도 생각나고 아기가 바뀌었었다는 이야기도 떠올랐다.  극히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태어나는 일도 그렇고, 죽는 것도 그리고 보면 간단한 일이 아닌가 보다.

 

예약된 시간이 다 되었을 때, 고인의 관을  따라 관망실 앞으로 내려갔다.

창구(?)마다 제각기 다른 수행객들이 줄을 섰다.

화구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예를 바치는 절차였다.

 

그런데 우리 오른쪽에선 찬송가를 목청 높여 부르고 있었고, 왼쪽에선 젊은 여자가 소리소리 질러가며 통곡을 하고 있다. 우리 천주교인의 기도와 노래소리는 그속에 묻혀 들리지도 않는다. 제각기 기를 쓰며 자기식대로 고인을 위한 추모와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그  소리가 아예 소음이고 발악처럼 시끄러워 순간 눈쌀이 지푸려 지는 것이었다. 더우기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듯 절규하듯 사살오살(?)을 하며 울어대는 젊은 여자의 행태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누군가가 살짝 알려준다.

 

( 죽은 사람이 젊은 총각이래요. 보세요. 전부 젊은 사람들이잖아요.)

그때서야 뒤를 돌아보니 검은 양복을 입고 죽 서있는 십여명의 이십대 중반쯤 된 청년들이 보인다. 망자의 친구들인 것 같았다.

( 아! 그렇구나! 그래서 저 야단이구나! 그런데 상복도 입지 않고 저렇게 소리소리 질러가며 우는 여자는 누구일까? 어떤 관계이길래 저렇게도 죽을듯이 울어댈까? 누나? 여동생? 아니면 애인? 약혼자?)

 

어른들 모습은 보이지 않고 젊은 남녀만 보이는데 아무튼 그 얘기를 듣고나니 이상하게도 그렇게 절규하는 통곡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고, 어느 순간에 전염되었는지 괜히 눈물이 나오는 것이었다.

사람이 태어나 그래도 살만큼은 살고 떠나야 하는데 이십대에 세상을 등졌다니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였다.

 

우리 쪽의 망자는 그래도 팔십세에 돌아가셨으니 복락을 누리고 가신 셈이 아닌가!

그래서인가 지하 식당으로 내려와 좀 이른 저녁을 먹는데 상주들도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산 사람은 어쨋건 먹어야 살지만 그래도 슬픔과 원통함이 목까지 차오르는 죽음이라면 당장은 먹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살만큼 살고 떠남으로써 남아있는 사람에게 원통함을 남겨주지 않는것도 크나큰 은총이고 봉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실에서 종료라는 자막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화단에 연두색 옥잠화의 야들해보이는 잎사귀가 보슬비를 맞아 싱그럽다. 진한 녹색의 난초들도 싱싱하고 여기저기 피어있는 빨갛고 노랗고 파란 가지가지 색깔의 꽃들이 처연하도록 아름답다. 망인은 한줌의 재로 태워지는 아픔을 겪고 있는데 살아있는 나무와 꽃들은 왜 저리도 아름다울까!

화장장의 모든 식물들과 꽃들은 저토록 아름다운데 왜 이리도 처연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곳에선 망자가 통과의례의 마지막을 마감하는 또다른 고통을 치루고 있어서일까?

드디어 우리쪽의 망자 19번이 종료되었다는 자막을 보고 모두 관망실로 내려왔는데 왼쪽에선 그 젊은 여자가 아까보다 더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통곡하고 있었다.

그 비명소리가 마치 송곳처럼 머리속을 날카롭게 찌르는듯 했다.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창밖을 바라보며 그 여자의 통곡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아 마음이 울적해졌다.

 

작년 10월 동네 뒷동산으로 우리 팀 쁘레시디움이 소풍을 갔을때, 지팡이를 짚고 와 주셨던 고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단지 다리만 불편해보였던 어른이 그렇게 갑자기 돌아가심에 사람이 살아 있음과 죽음은 한순간이라는생각이 들고  괜히 울적해지는 것이었다.

어제는 탄생과 죽음, 죽음과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하루였다.

데레사 자매님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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