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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언제나 선택의 여지는 있다!
작성자황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5-05-14 조회수869 추천수8 반대(0) 신고

 

 

 

 

 

 

송봉모 신부님 <고통, 그 인간적인 것> 중에서


 

 

웃고 있는 예수님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의 예수님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은 크게 벌리고 웃고 계신다. 그냥 미소만 짓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어 웃고 계시다. 숨도 쉬기 어려울 만큼 크게 웃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늘 고통스런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계시지만 생의 경이로움을 놓치면서 살아가신 적은 없다. 웃는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인 우리도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고통 속에 있다 하여도 삶의 의미를 찿아야 한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어떠냐에 따라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고 불행하게 살 수도 있다. 마을 근처에 있는 나무들은 깊은 산에 있는 나무들처럼 크게 자랄 수가 없다. 환경 때문이다. 나무들이 좀 자랐다 하면 사람들이 와서 베어가기 때문이다.

 

 

'인간은 환경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 놓여 고통을 겪는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다. 내적인 자유를 갖고 의미있는 삶을 찿아 행위하고 안 하고는 우리 선택에 달려 있다. 빅토어 프랑클은 이 점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사람이다. 그는 나치 집단 수용소에서 3년간 수인(囚人)생활을 하다 가스실에 들어가기 직전에 살아난 정신과 의사이다. 그는, 인간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영적 자유와 의지의 존귀함을 보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그가 한 말이다.

 

 

언제나 선택의 여지는 있다. 하루, 매시간 선택의 여지는 있다. 당신의 내적 자유를 빼앗아 가려 위협하는 환경에 굴복당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선택의 자유는 당신에게 달려 있다. ...집단 수용소의 조건이 열악하고, 잠도 부족하고, 음식도 불충분하고, 알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심적 불안감도 크지만 그러한 환경에서도 선택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보존할 수 있다. 도스토예스키는 말하였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내가 내 고통에 맞갖지 못할까이다." 이 말을 나는 집단 수용소 삶에서 자주 내 자신에게 들려주었다. 이 말과 함께 고통과 죽음이 눈앞에 펼쳐지는 집단 수용소에서도 마지막까지 나의 내적 자유를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결심하였다.

 

 

활기에 차고, 평화로운 삶의 조건이 갗추어지지 않았을 때에도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찿을 수 있다. 창조적인 삶과 즐거움을 누리는 삶만이 의미있는 삶은 아니다. 우리 생의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 고통스런 삶도 그렇다. 고통은 결코 제거할 수 없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고통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이 완성될 수는 없다.

 

 

고통 속에서 별로 의미를 찿지 못하면 우리는 마치 고통의 희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역경 중에서도 의미를 찿게 되면 고통은 우리의 성장과 변화를 위한 디딤돌이 된다. 형들의 시기 질투로 인하여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이 훗날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형들을 만났을 때 했던 말, "하느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이 곳으로 보내신 것은 형님들의 종족을 이 땅에 살아 남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45, 7) 이 말은, 요셉이 운명의 단순한 수동적 희생물이 아니라 커다란 운명이라는 수레의 적극적인 참여자임을 나타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악을 허락하시지만 이는 그것을 더욱 큰 선으로 바꾸어 놓으시기 위함이다." 라고 하셨다. 그러니 삶의 의미를 찿고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 찬미 예수님,

 

 

이 글은 특히 고통중에 계신 형제 자매님들을 기억하며 올려드립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고 행복하소서!

소피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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