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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7주간 월요일 복음묵상(2005-05-16)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5-16 조회수732 추천수3 반대(0) 신고

이 말에 예수께서 "'할 수만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 하시자 아이 아버지는 큰 소리로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마르 9, 23-24)

 

이제 우리는 다시금 연중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성령강림대축일로 부활

 

시기가 막을 내렸고, 사순시기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로 중단되었던 연중

 

시기가 계속된 것입니다. 연중시기는 편의상 연중시기 제1기와 제2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성탄시기를 마무리하는 주님세례축일 다음 월요

 

일부터 재의 수요일 직전 화요일까지를 말하며, 제2기는 성령강림대축일

 

다음 월요일부터 한해의 전례력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시작하는 대림 제1

 

주일 직전 연중 제34주간 토요일까지를 말합니다. 연중시기 제1기와 제2

 

기의 구별은 정확하지 않은데, 즉, 어느 주간에서 정확히 중단되었다가 어

 

느 주간부터 재계되는지가 정확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매년 달

 

라지는 부활대축일(춘분이 지난 후 보름 다음에 오는 일요일) 때문입니

 

다. 


 

매년 부활대축일이 정해지면 부활절 50일, 사순절 40일에 따라 연중시기

 

제1기가 7주간에서 10주간으로 중단되었다가 제2기가 7주간에서9주간,

 

또는 10주간으로 다시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연중시기 한 주간 정

 

도가 생략되기도 하는데, 어떤 일이 있어도 연중시기는 연중 제34주간으

 

로 마쳐야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연중시기 평일미사에 봉독되는 복음을

 

살펴보면, 연중시기에는 마르코, 마태오, 루가복음이 차례로 봉독되는데,

 

마르코복음은 연중 제1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제9주간 토요일까지로서 마

 

르 1,14에서 마르 12,44까지가 봉독되며(마르 1,14-12,44), 마태오복음은

 

그 다음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제21주간 토요일까지로서 마태

 

5,1에서 마태 25,30까지가 봉독됩니다.(마태 5,1-25,30) 루가복음은 그 다

 

음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연중시기의 마지막인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까지로서 루가 4,16에서 루가 20,40까지가 봉독됩니다.(루가 4,16-20,40)

 

물론 중간에 축일이나 대축일로 인해서 생략되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연중시기에 사제는 녹색 제의와 영대를 착용하고 미사를 봉헌하는데, 녹

 

색은 다른 색에 비해 나서기를 꺼려하고 멀리 있는 느낌을 주며, 희망.겸

 

손.인내.차분함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연중시기는 한해의 전례력 중 대림.

 

성탄.사순.부활시기 같은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

 

안에서 드러난 특수한 신비를 고려하지 않고 이를 포괄적으로 기념하며

 

지내는 시기입니다. 한 마디로 연중시기는 예수님의 "공생활 따라잡기"의

 

시기인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공생활은 세례자 요한

 

의 투옥사건에서 시작되는데,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비록 강제로 중단된

 

것이지만 이로 인해 예수님의 공적 활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

 

르 1,15)는 절대절명의 말씀 속에 간단명료하게 선포됩니다. 이 복음은 세

 

상창조 때 이미 계획되고 약속된 것이며,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하

 

여 예고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기다림을 거쳐 예수님과 함께 성취의 단계

 

에 접어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은 아니지만 가까운 장래에 예

 

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실현될 것이고,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

 

느님의 세상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느님 스스로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과 함께 계심(임마누엘)을 뜻하게 됩니다.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세상이 취할 태도는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

 

개는 죄악의 세계에 빠진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은총의 세계로 복귀시키

 

는 일련의 행위를 말하는데, 회개는 여태껏 살아오던 삶의 방식과 방향을

 

바꾸고 전환하여 전적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질서 지우는 것입니다. 믿음

 

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복음을 수락하고, 수락하였다는 표시를 보

 

이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복음에 대한 응답이죠. 즉, 기쁜 소식의

 

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구체적인 행동은 추종인데, 모든

 

믿음이 다 적극적인 추종일 수는 없지만, "나를 따라오너라"는 주님의 부

 

르심에 적극적인 추종이 필요합니다. 성소에 대한 적극적인 추종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것입니다. 추종은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사람을 낚

 

는 어부가 된다"는 뚜렷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람 낚는 어부로서 복음선포의 길에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그

 

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복음이 말하는 가르침을 자신이 먼저 받아들이고 삶

 

의 지침으로 행해야 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

 

의 공생활이 주는 가르침을 누구보다 먼저 배워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에 이어 악령이 들려 말을 못하는

 

아이를 치유한 기적을 들려주는 대목으로서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

 

습니다.(마태 17,14-21; 루가 9,37-43) 그러니까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

 

방에서 시작한 베드로의 메시아고백부터 오늘 복음의 기적까지가 공관복

 

음의 공통된 내용인 셈입니다. 아울러 오늘 기적은 예수께서 갈릴래아 활

 

동기(마태 4,12-18,35; 마르 1,12-9,50; 루가 4,14-9,50) 중에 행하신 마

 

지막 기적인데, 마르코복음은 갈릴래아 활동기의 마지막 기적을 대단히

 

상세하고 장황하게 서술하고 있는 반면 마태오와 루가는 분량을 대폭 줄

 

여서 보도합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

 

다는 것(9,2)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거룩하게 변한 영광

 

스러운 모습을 따로 데리고 간 3명의 제자들에게만 보여 주시는 동안 다른

 

9명의 제자들은 군중과 함께 산 아래에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3명

 

의 제자들에게 목격한 것을 자신이 계실 때까지는 절대 함구해야 한다는

 

명을 내리고 산 아래로 내려와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그때

 

마침 제자들이 군중에 둘러싸여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14

 

절)고 하는데, 연유인즉 예수께서 따로 산에 계시는 동안 남은 제자들에게

 

한 아버지가 악령이 들려 말을 못하는 아이를 데려와 고쳐달라고 청하였

 

고, 제자들의 능력이 그 요구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사유를 알게

 

된 예수께서 제자들과 군중과 율법학자들 모두를 포함한 이 세대에 믿음

 

이 없음을 통탄하십니다.(19절) 즉, 모두에게 믿음이 없음을 나무라신 것

 

입니다. 사람들이 예수께 아이를 데려오자 아이를 사로잡고 있던 악령이

 

먼저 예수를 알아봅니다. 예수께 대한 악령의 인식은 아이에게 심한 발작

 

을 일으킨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께 '하실 수 있다

 

면'(22절) 하는 단서를 붙이고 치유를 청하게됩니다.

 

 

조건부 청원에 예수께서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믿음의 중요성을

 

재삼 깨달을 수 있는데, 아이의 아버지가 큰 소리로 "저는 믿습니다. 그러

 

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24절)하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께

 

서 큰 호령과 함께 아이를 치유해 주시게됩니다. 사람들이 다 떠나고 예수

 

의 일행이 집에 들어갔을 때 제자들이 자기들에게 기적의 능력이 없는 이

 

유를 묻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십니

 

다. 이 대목에서 마태오는 제자들의 '약한 믿음'을 이유로 들면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해도 그 믿음이 산을 옳길 수 있는 효과를 낸다고

 

하였습니다.(마태 17,20) 이 대목에서 마태오가 마르코와는 달리 '기도' 대

 

신에 '믿음'을 언급한 이유는 병든 아이의 아버지가 지닌 부족한 믿음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즉, 부족하나마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가능

 

하다는 것을 마태오가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르코의 '기

 

도'를 생각해봅니다. 여기서 '기도'라는 요소가 언뜻 보기에 전체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게 보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오늘 구마치유기적의 마지막

 

에 가서 '기도'를 언급했을까요? 마르코에 의하면 예수께서 기도하지 않는

 

자는 기적을 행할 수도 바랄 수도 없다는 식의 의도를 가진 것이 분명합니

 

다.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도중에 기도하신 일은 두

 

번 인데, 빵을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과(6,41;

 

8,6) 그 외에도 예수께서는 자주 한적한 외딴 곳이나 산에서 기도하셨고

 

(1,35; 6,46), 잡히시던 날 밤에 게쎄마니 동산에서 친히 아버지께 기도하

 

셨고, 제자들에게도 깨어 기도하도록 권유하셨습니다.(14,37-39) 이렇게

 

볼 때 기도는 예수님의 일상에 속하며, 모든 가르침과 행적 아래 기도의

 

힘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기도'없이 아무 것

 

도 하시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사실 어떤 '힘'이라

 

기보다는 어떤 '조건'이나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는 무엇을 행할

 

수 있는 '힘'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준비

 

하는 '조건'이며 '상태'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곧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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