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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복음묵상(2005-05-26)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5-26 조회수871 추천수4 반대(0) 신고

나자렛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여러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 질렀다.(마르 10, 47-48)

 

대부분의 사람은 볼 줄도 알고 들을 줄도 알며, 그런 능력이 자기에게 있

 

다는 사실도 압니다. 할 수 있음을 안다는 것이 사람을 동물과 구별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고 듣는 감각기능이 고장을 일으키면 사람은 의기

 

소침하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평탄치 못한 인생을 살게될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사물을 보고 듣는 외

 

적인 감각기관 외에도 보고들은 것을 감지하는 내적인 기관이 있는데, 이

 

기관을 우리는 마음이라 부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보고들은 것을 근거로

 

움직이지만, 보거나 듣지 않고도 작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마음 또

 

한 눈과 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은 앞에 있는 것만 볼뿐,

 

뒤에 있는 것은 볼 수 없으며, 귀는 소리나는 것만 들을 뿐 소리나지 않는

 

것, 즉 침묵을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외적인 눈이 보지

 

못하는 것도 보며, 마음의 귀는 소리나지 않는 것도 듣습니다. 바로 하느

 

님의 실재가 그런데, 아무도 하느님을 사람의 외적인 눈이나 귀로 보거나

 

들은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과 귀는 하느님의 실재를 보고, 침묵

 

가운데 울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느님

 

의 실재에로 마음의 문을 열게되면 인생의 행복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소경 바르티매오의 치유사화를 들려주는데, 이 기

 

적이 공생활 중 사람에게 베푼 예수님의 마지막 기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경의 치유기적은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도 복음서 전

 

체의 구조에서 같은 자리인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마

 

태 20,29-34; 마르 10,46-52; 루가 18,35-43) 그렇다면 예리고 소경의 치

 

유는 단순한 치유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으실 것이며, 만약 행하신다면 그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

 

활로 이루어질 기적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지막 공식적 기적으로서

 

의 소경 치유기적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기적에 앞서, 즉 예수께서 예리고에 당도하기 전에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복음마다 다소 차이는 있으나, 공통된 내용, 그것

 

은 바로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와 "추종의 의미와 섬김의 자세"입니

 

다.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은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에 이어 즉각 "추종

 

과 섬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제자들의 예수님의 수난예고

 

를 사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루가복음에는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 다음에 오늘 복음인 예리고 소경의 치유사화를 배치하는데, 루

 

가가 "추종과 섬김"의 언급을 다루지 않은 이유는 예고의 끝 부분에 마태

 

오와 마르코에 없는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도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는 가리워 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말씀인

 

지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루가 18,34) 라는 말을 덧붙였기 때문입니

 

다.


 

결국 소경은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보게 해 달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는 보이지 않는 암흑을 향한 부르짖음이

 

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무관심하다못해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기까

 

지 하였으나, 그는 나자렛 예수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바르티매

 

오는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었던 것이고, 예수께서는 그가 이미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던 것을 실제로 보게 해 주셨을 뿐입니다.(52절) 그

 

러나 제자들은 두 눈을 뜨고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자의 본질적인 부분인 수난과 죽음, 추종과 섬김은 눈을 가지고

 

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기적과 권위, 자리와 보상만 보려했습니

 

다. 이러한 제자들에 비하여 예리고의 소경은 장님의 처지에서 예수님의

 

본질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의 앞서간 대목을 보면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예고에도

 

불구하고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 나라에서 오른편과

 

왼편 자리에 앉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사실은 같은 마음이

 

었습니다. 그들이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스승

 

은 머지않아 만신창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인데도 말입니다. 오

 

늘 복음의 바르티매오는 믿음의 눈을 가졌을 뿐 아니라, 침묵하지 않는 마

 

음의 소리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소리가 바로 기도입니다. 외적인

 

눈과 귀에 많이 의존하는 사람은 그만큼 마음의 눈과 귀의 기능이 떨어집

 

니다. 오늘 광명을 찾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루살렘에 함께 입성하게

 

될 바르티매오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예수님의 마지막 일을 목격하고 증

 

언할 진정한 "보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참된

 

기적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고 믿겠다는 사람들은 보통 볼 수도

 

없을 뿐더러 보고도 믿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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