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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먹어야 산다 (성체성혈 대축일)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5-05-28 조회수1,377 추천수6 반대(0) 신고
 

                                먹어야 산다 (성체성혈 대축일)


  십자가를 안테나로!

  지난 몇 개월간 아침식사를 주로 빵을 먹었습니다. 저녁에 시내에 나갔다가 성당으로 돌아오면서 아침에 먹을 샌드위치를 사서 냉장고에 넣었다가 아침에 먹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웬 빵집과 웬 빵들이 그리 많은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먹거리(?)가 제공되어야 할텐데...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늘 찬 샌드위치를 먹다 어쩌다 길에서 따뜻한 토스트를 먹을 때는 감격하여(?) 눈물마저 났습니다. 아무래도 찬 빵보다는 따뜻한 빵이 먹기에도 좋고 소화도 잘 되겠지요.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빵과 포도주로 오신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만 우리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라고 고백한 사도 바오로처럼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살아간다면 어느 신학자가 이야기한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드신다’라는 말도 성립된다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성체에 관한 저의 글들과 김환철신부님, 작가 최인호씨의 글들을 차례로 퍼드립니다. 가브리엘통신


                                             <살아있는 빵>


   부활절을 지내고  어느 한정식 식당에 초대되었습니다. 식당 주인은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제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과 양로원을 수년 전부터 돕고 있는 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식당뿐만 아니라 요리학원까지 운영하는 교육자이셨습니다. 함께 간 수녀님들에게 친절하게 음식에 대한 설명도 해주시자 갑자기 어느 수녀님이 빵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니, ‘빵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만든 빵을 먹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살아있는 빵이 아니라 죽은 빵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 35- 40)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말씀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요한6, 33참조)  그리고 베들레헴( 빵의 마을)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 구원과 생명을 위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공해 빵’ 즉 곰팡이(죄?)도 방부제(위선?)도 없는 살아있는 빵,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처럼 우리 교회(가정교회도 포함)도 살아있는 빵을 굽는 빵집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덧 식사가 끝나자 저는 후식(?)으로 준비해간 말씀사탕을 꺼냈는데  식당주인은 그 말씀사탕을 아주 맛있는 후식이라며 감탄을 하였고 ‘성호를 긋고 말씀사탕을 뽑아야한다’는 짓궂은(?) 어느 수녀님의 말씀을 따라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성호를 긋고 말씀을 뽑아 오히려 저희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며 더 나아가 또 식당 종업원들, 주방장, 주차관리인들까지 불러내어 모두 성호를 긋고 말씀사탕을 뽑게 하여, 저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아무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빵을 떼어주실 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본 것처럼 우리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담소를 나누다보니 눈이 열려 모두가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주님과 식당주인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빵을 살립시다!>


   요즘 복음에서 ’생명의 빵’에 관한 내용이 계속되어 강론으로 저도 계속 빵이야기를 많이 하다보니 항상 배가 고프군요.^^*. 그런데 생명의 빵인 성체를 우리가 자주 영해도 우리의 피와 살이 되지 않고 계속 영적으로 배가 고픈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체가 가짜 생명의 빵이란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영적 영양실조가 되는 이유는 생명의 빵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생명의 빵이 잘 소화되기 위해서는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대로 합당한 영성체 준비와 성체의 정신 즉 나눔과 희생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성체는 모령성체가 되고 생명의 빵을 헛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이에 관하여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한번 들어봅시다.


  "그러니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몸이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죽은 자도 적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1고린 11,27-30)


   하지만 나눔과 희생 즉 성체적 삶을 우리가 살 때 그것이 생명의 빵을 살리는 것이고 우리도 생명의 빵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이 "나는 그리스도의 빵이 되기 위해 사자이빨에 짓이겨지는 밀이다"라고 순교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소생수술>


   가끔 병원에서 수술을 하다가 환자의 출혈이 많으면 수혈을 하게 되고 또 환자의 장기가 상하면 장기이식수술을 통해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요한 6, 52-59)에서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영적으로 수혈과 장기이식이 필요한 중환자(?)라고 생각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목격자들과 증인들의 말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숨을 내쉬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마치 태초에 야훼 하느님께서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드시고 입김을 불어넣는 ’심폐소생’을 생각하게 됩니다. 태초에는 부드러운 흙으로 빚었지만 그것이 나중에는 딱딱한 돌(?)이 되어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시 소생시키는데는 얼마나 어려우셨을까?하는 안타까움마저 듭니다.(창세 2, 7: 요한 20, 21-23 참조)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대수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엄청난 수술비를 청구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3)라는 우리들의 작은 새 계명 실천으로 만족하십니다.



                                   <성체는 답을 알고 있다>


   어릴 때 노란 카나리아를 집에서 기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카나리아가 당근을 먹자 붉은 색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당근의 카로틴 색소가 깃털의 색을 노란 색에서 붉은 색으로 변하게 한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지난 번 미사 강론에서 들려드리면서 "우리는 그동안 미사에서 수없이 많은 성체를 영하면서도 왜 ’주님의 색깔(?)’로 변하지 못하고 있느냐? 혹시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함께 반성해보자"라고 자성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성체의 기적에 관한 비디오와 책을 소개하면서 교회 안의 수많은 성체, 성혈의 기적을함께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자신의 손가락을 예수님의 늑방에 넣어보고 믿은 사도 토마스(요한20, 27참조)의 손가락(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소장: 로마) 사진도 함께 보았습니다.


  요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이 화제가 된다고 합니다. 8년간 물을 연구하고 그 결정체의 사진을 찍은 일본인 에모토 마사루씨는 ’물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사랑과 감사라는 말과 음악을 들으면 아름다운 육각수가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욕을 먹는 물도 흉칙한 모습으로 변하지만 무시당하는 물은 더 흉칙한 모습으로 바뀐다’라고 하며 "우리는 물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살아가자"고 역설합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안티오키아의 성이냐시오는 성체를 불사불멸의 약이요 영혼의 보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보약을 먹으면서도 왜 전혀 약발(?)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체가 가짜 보약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보약을 먹을 때는 음식을 가려먹으면서, 영혼의 보약인 성체를 영하면서는 음식을 가리지 않기 때문 즉 죄를 짓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때는 깨끗한 그릇에 담아 먹을려고 하면서도 성체를 영할 때는 더러운 그릇(고백성사를 본지 오래된...)으로 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사도 바오로께서는 최초로 성체성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시면서 이웃사랑, 자선의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영성체는 또 하나의 모령성체가 된다고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 그러니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몸이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죽은 자도 적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우리 자신을 잘 살핀다면 하느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살피지 않기 때문에 지금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단련하여 마침내 이 세상과 함께 단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거룩한 회식을 하려고 교회가 모일 때에는 서로 남을 기다려 주십시오. 만일 배가 고프면 집에서 미리 음식을 먹고서 모임에 나오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단죄받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1고린 11,23-34)


  성체는 그동안 우리에게 본의 아니게 많이 무시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 수녀에게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은 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었지만 나의 자녀들은 나의 불타는 성심에 가시관을 씌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물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주님의 성체와 성혈은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참된 흠승과 찬미,감사를 드려야할 대상이 아닐까요? 이것이 실천되지 않는다면 또다른 성체의 기적과 함께 "성체는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이 나오겠지요.^^* 


                                     <먹어라, 먹어야 산다 >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이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세1.16-17)


구약에서는 '먹지 말라'는 것을 먹어서 죽었고

신약에 와서는 '먹어라'는 것을 먹지 않아서 죽는 셈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이것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이 빵은 너희의 조상들이 먹고도 결국 죽어간 그런 빵이 아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요한 6,48-58)


  사제들은 미사 때마다 기적을 이룬다. 밀떡과 포도주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성체를 이루다니! 웬, 세상에 이런 일이! 우리는 이를 믿는다. 믿음 자체가 곧 기적이다. 기적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여기에 생명을 걸겠는가?


"엎디어 절하나이다.

숨어 계신 천주성이여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길 없삽기에,

보고 맛보고 만져봐도 알길 없고

다만 들음만으로 믿음 든든하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

진리의 말씀보다 더한 진실 없나이다.

십자가 위에서는 천주성만 감추시더니,

여기서는 인성마저 숨기고 계시오니,

나는 두 가지를 다 굳이 믿나이다.

주님의 죽으심을 되새기는 기념이여,

우리에게 주는 생명의 빵이시어,

당신으로 내 영혼 살아가나이다.

더러운 나 당신 피로 씻어주소서.

그 한 방울만으로도

온 세상을 모든 죄악에서 넉넉히 씻으시리다.

지금은 우러러도 숨어 계신 예수님,

언젠가는 드러나실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환히 보며 복되게 하소서. 아멘

(성토마스의 성체찬미가)


  1989년, 세계 성체대회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될 즈음, 서울 여러 극장에서 영화 '로메로'가 한창 상영 중이었다. 이 영화의 핵심은 남미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주교님이 미사를 봉헌하던 중 반란군이 성체를 향하여 총을 쏘아 성체가 마루바닥까지 흩어진다. 흩어진 성체를 모으려다 로메로 주교님이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이다. <미션>이라는 영화도 모든 이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선교사 신부님 한 분이 미개발 지역에 들어가 가난한 마음 작은 성당에서 성체를 모시고 행렬을 하는 중이었는데 이 지방을 침략하려는 약탈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 손을 잡고 30여 리를 걸어가서 성체거동에 참례했다. 그 당시 전주 시내에는 전동성당 하나밖에 없었다. 성당광장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성가를 올렸을 때의 장면을 지금도 마음의 스크린으로 비쳐 본다. 너무 환하게 화면에 뜬다. 가끔 오목대를 올라 가 본다. 지금은 왜 그리 좁게 보이는지! 남원성당을 출발하여 성체를 모시고 시내 한복판으로 행렬이 계속되는데 길옆에 서있던 구경꾼 중 한 여인이 약간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로 " 야 저기 좀 봐, 저 신부들은 장가를 안 간대! 저 가운데 있잖아. 야 , 아깝다, 아까워." 가운데 신부가 나임을 알고 있었지만 시치미를 떼고 계속하였다. 신부들이 소란을 피우는 것이다. 나보고 "잘났다"했다고.

  루갈다와 요한은 첫영성체할 때 동정 지키기를 서원 하였다. 혼인을 맺고 동침하면서 육정이 일어날 때마다 예수님의 성혈 공로 로 유감을 물리쳤음을 친정어머니에게 적어 보내드렸다.


소녀가 시댁에 들어오던 날, 우리 내외 서로 수절하기로 맹세하니

평생 근심이 일시에 풀려 4년 동안 형매같이 살매, 그 사이에 혹독한

유감이 몇 번 있어 거의 열 번이나 무너질 뻔하였사오나 공경사올

성혈 공로로 악마의 계교를 물리쳤나이다.(옥중편지 요약)


  이들이 동정을 지킬 수 있음은 성체 성혈의 은덕이었다. 초남이 성지는 성체성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곳에 순례할 때는 성체를 모셔야 함은 당연하고 마땅하다. 불가에서는 수도자들이 좌선함을 으뜸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성체 앞에 손을 모으고 있노라면 일만 근심이 녹아내린다. 좌선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좌선 할 때의 자세는 벽을 바라보지만 우리는 성체께로 향한다. 좌선의 방법은 참회도 청함도 감사도 없이 무아지경에 이르기만을 바랄 뿐이지만 성체 앞에서는 소망, 감사, 용서를 청한다. 벽은 소망을 채워줄 능력이 없지만 성체는 전능한 분이시다.


  모든 수도원에서는 성체 조배 시간을 제일 소중하게 여긴다. 봉쇄 수녀원에서는 하루 대부분을 성체 앞에서 묵상한다. 글라라 수녀원이 독일에서 전주교구로 처음 진출했을 때는 지도 신부님도 정해져 있지 않아 교구청 신부님들이 매일 미사를 봉헌했다. 하루쯤 미사를 궐함직하지만 미사가 없는 날에는 대재를 지킨다기에 행여 수녀님들이 굶고 있을까 염려되어 하루도 빠뜨리지 않았다. 밥은 굶더라도 성체를 모시지 않을 수 없다는 원장 수녀님의 말씀이다.'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주님의 기도가 육신의 양식을 주시라는 기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예수께서 주야 40일 동안 단식하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을 때 악마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게 해보시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하고 대답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성체가 내 피와 살과 하나 되기를 바라신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와 밀착시킬 수 있는 더 깊은 방법이 있을까? 성체를 모시는 순간 내 안에 모든 불순물이 모두 녹아버린다. 성체가 내 안에서 피와 섞여 있는데 무슨 오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성체를 내가 모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먹히신 것이다.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 안에 사신다."<갈라 2,20>


  성체는 생명의 빵이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잘 분간하지 못한다. 회개함이 없이 성체를 마구 영할까 봐 사도 바오로는 경고 하였다.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주님의 빵을 먹거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신을 살피고 나서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고린 11, 27-29) 

                                                                     (김 환철 신부님/ 속아서 된 神父 )



                                           <생명의 빵>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1768-1848)은 프랑스 낭만파 문학의 선구자입니다. 그는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군대생활도 했었고, 정치가로도 활동했습니다. 어렸을 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한때 종교를 부정하기도 했던 그는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머니와 누이가 희생당하자 가톨릭에 복귀, 호교론(護敎論)의 열렬한 투사가 되어 [그리스도교의 정수(精髓)]란 책을 썼습니다. 이후 자연에의 동경, 연애지상주의적 정열, 허무주의적 번민 등을 화려한 필체로 묘사함으로써 낭만주의 문학을 꽃피우기도 했습니다. 말년에는 방대한 자서전 [무덤 저편의 추억]을 집필하였는데 이 자서전에는 15살 때 첫영성체를 했던 자신의 기억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활절 전주 수요일에 판공성사를 받으러 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저의 첫영성체 전날이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철야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미리미리 준비했습니다. 성당에 도착하여 저는 성체를 모신 감실 앞에서 완전히 도취된 채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 차례가 왔을 때 저는 마지막으로 올바르게 고해하고 거룩한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고해실로 들어갔습니다. 온몸이 떨려서 무릎을 꿇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스스로 놀랄 정도의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고백했습니다. 이제 제 영혼을 압박하던 어떤 부담감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커다란 기쁨이 제 마음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이런 축복과 사랑이 언제나 저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흐느꼈습니다. 그것은 참회의 눈물이었고 천국의 행복감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하루 뒤인 성목요일에 샤토브리앙은 마침내 첫영성체를 했습니다. 그때의 기쁨을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겸허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주시는, 하늘과 땅의 왕이신 주님께 저 자신을 바쳤습니다. 성찬례 때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신 것을 마치 어머니가 옆에 같이 계신 것처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입을 벌려 성체를 받았을 때 저는 제 자신이 축복을 받는 상태로 변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격과 경외심으로 몸이 떨렸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제 마음속에 불을 붙여주셨기 때문에 하느님을 공경하기 위해 마치 순교자처럼 기꺼이 제 생명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샤토브리앙은 빵과 포도주의 겸허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는 주님을 첫영성체 함으로써 자신이 축복받은 상태로 변화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참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만 밀로 만든 떡을 먹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 서울주보 : 최인호 베드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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