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단 한가지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5-06-01 조회수1,267 추천수15 반대(0) 신고

  

 

이 글은 현재 서울 대학교 명예교수로 계신
박동규 교수의 글입니다.

제목: 어머니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육이오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 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로 씌어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삼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서른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
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갔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이 글을 올려주신 학부모님께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정재 어머님, 감사드립니다.

TV안보기 주간(인터넷 포함)의 시작인 5월 16일 (월)요일 부터 실천하지 못하고 3일 늦게 목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실천하다보니 정재 어머님의 글을 이제사 대합니다.

원래 TV는 보지 않아서 어려움이 없었지만 인터넷을 일주일 동안 쉬어 보았더니 제게 도움이 되는 점이 많았습니다. 우선 인터넷을 전보다 조금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절제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좀 더 생활이 오히려 여유로와진 것 같습니다.

제가 박 교수님의 어머니 나이였을 때를 돌아보았습니다. 아들이 낯선 청년을 따라가지 않은 것에 촛점을 맞추기보다는 "왜 쌀을 맡겼느냐?" 고 나무란뒤에야 그래도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것 같았습니다.

오래전에 들었던 강의가 생각납니다. 영등포 지하도에서 아이를 잊어 버렸다가 찾게 된 강사님이 아이를 붙잡고 울었더니 상점에 계신분께서 많은 어머니들이 아이를 잊었다가 찾는데, 아이를 찾고 어머니들의 처음 반응이 우선 야단을 치거나 때려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찾은 아이를 붙잡고 우는 분은 처음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1차적인 감정, 즉 아이를 찾은 기쁨과 다행스러움을 표현한 후에 2차적인 감정 엄마가 애타고 속상했던 점을 표현해야 합니다.

정재 어머님,

박교수님의 어머니 이야기를 통해 자녀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오늘의 삶에서 실천해 나아가야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박목월 시인의 아내이신 박동규 교수님의 어머님은 신앙심이 깊으셨던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득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도 우리의 잘못을 따지시기보다는 먼저 이 어머님의 사랑과 같이 우리를 끌어 안아 주시는 분이 아니실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계기가 있어 제 지난 삶에서 잘못 살았던 부분을 민감하게 성찰해보고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성사를 보고 난 후에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제 어느분과의 대화에서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단 한가지는 우리의 양심이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출애급기(3, 1-6)을 묵상하면서 "모세가 활활 타는 양심의 떨기 앞에 서서 하느님의 현존에 마음의 문을 연다."<'사랑' 에서 인용> 라는 부분에 오래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활활타는 양심의 떨기 앞에 하느님께서는 저를 만나 주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느끼나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면 더욱 하느님의 현존을 선명하게 느끼게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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