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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복음묵상(2005-06-02)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6-02 조회수927 추천수3 반대(0) 신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 29-31) 
 

마르코복음 11장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에 속합니다. 갈릴래아

 

지방에서 공생활의 대부분(1-9장)을 보내신 예수께서는 그 마지막 시기에

 

베드로의 메시아고백을 받으셨고, 이어서 두 번씩이나 자신의 수난과 죽

 

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길목

 

에서 세 번째로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고(10장),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성전정화 사건(11,15-19)으로 예루살렘 활동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예루살

 

렘 활동기는 사실상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위한 준

 

비단계로서 외적인 업적보다는 적수들과의 논쟁과 대담을 통한 자기계시

 

적 가르침, 그리고 종말과 재난의 예언 등으로 일관됩니다. 논쟁과 대담은

 

주로 적수들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으로 이루어지는데 예수의 권한논쟁,

 

납세에 관한 대담, 부활논쟁 등은 이미 치러졌고, 오늘 복음은 첫째가는

 

계명에 관한 대담을 들려줍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부활에 관한 논쟁을

 

벌였고,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오늘은 율법학자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

 

면, 서기관 또는 랍비(스승)라고 불리던 율법학자들은 바빌론 유배(B.C

 

587년) 이전에는 예언자와 사제들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삼대 지도계급에

 

속했지만 유배 이후(B.C 538년)에 들어 사제들은 권위를 잃었고, 기원전

 

500년경에 활동하던 예언자 하깨와 즈가리야와 말라기를 끝으로 더 이상

 

예언자들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메시아 사상이 강하게

 

싹트기 시작하면서, 백성들은 모든 희망을 토라(율법)에 두게되는데, 이

 

때부터 율법학자들이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희랍의 통치(B.C 333

 

년)와 로마제국의 통치(B.C 63년)가 이어지면서 침략자들에 의해 짓밟힌

 

예루살렘 성전은 신앙의 구심점을 잃게 되고, 흩어진 유대인들이 디아스

 

포라를 형성하여 그 안에 회당(Synagogue)을 세워 안식일 예배를 드림으

 

로써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들의 활동이 크게 두드러지게 됩

 

니다.
 

회당에서의 예배는 제사 없이 율법서와 예언서의 봉독과 해설이 큰 비중

 

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율사들이 사제들보다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게 됩니

 

다. 물론 신약시대에 들어서도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각종 제사는 거행되

 

었습니다. 율법학자는 상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년간의 정규적인 연구과

 

정을 거친 사람이면 40세의 나이를 채운 자에 한하여 서품을 통하여 누구

 

나 될 수 있었고, 따라서 율법학자들 중에는 바리사이들, 사두가이들뿐 아

 

니라 일반직업을 가진 평신도 출신도 있었고,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에 속

 

한 자도 있었습니다. 특히 바리사이파의 지도자는 모두가 율사들이었습니

 

다. 율법학자들의 힘은 오직 율법에 대한 지식이었는데, 백성들은 그들을

 

존경했고, 술 달린 긴 예복을 입고 다녔으며, 향연에서나 회당에서 항상

 

윗자리에 앉았습니다.

 

 

이러한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248개 조항의 행령과

 

365개 조항의 금령을 합한 613개 조항의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에 대

 

하여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가 예수와 사두가이파 사람들 사이의 토론

 

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호쾌한 답변을 주시는 것을 보고 예수께 이 질

 

문을 하였다(28절)는 오늘 복음의 서두와 "그런 일이 있은 뒤에는 감히 예

 

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34절)는 말미는 순전히 마르코복음사가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추정되지만, 아무튼 오늘도 예수님의 답변은 명쾌합니

 

다. 613개 조항을 축약하면 십계명이 될 것이고, 십계명을 축약하면 첫째

 

가는 계명이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

 

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4-5)는 계명이고, 둘째가는 계명이 "네 이

 

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레위 19,18)는 계명임을 이 율법학자가 모를

 

리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께서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의 골자로

 

선포하신 사랑의 이중계명인 것입니다.(마태 22,34-40; 루가 10,25-28 참

 

조)

 

 

오늘 복음의 핵심은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유일신 사

 

상의 재확인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율법학자의 답변도 오늘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 큰 성과입니다. 그

 

렇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사랑이며, 재물

 

을 바치기 전에 하느님이 마음을 알고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호

 

세 6,6) 사랑의 이중계명을 다시 환원시키면 십계명이 되고, 십계명을 다

 

시 환원시키면 수백 개의 계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말이나 지식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도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이중계명의 핵심정신을 비켜갈 수는 없

 

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사랑의 이중계명을 잘 알고 지키

 

는 자에게 이미 하늘나라를 약속하시는데, 즉,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하고 말씀하

 

셨다.(34절) 그렇다면 이 율법학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갔을까요? 아마

 

도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다는 것과 실천한다는 것의 차

 

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

 

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

 

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고 말만 한다

 

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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