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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마음은...(연중 제 10주일)
작성자이현철 쪽지 캡슐 작성일2005-06-04 조회수992 추천수7 반대(0) 신고
 

                  예수님의 마음은...(연중 제 10주일)


  한번은 유명인과 부자들을 상대로 하는 어느 보석상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가게에서 베테랑이라는 점원이 한 부자 손님에게 보석을 팔지 못하자, 주인이 직접 나와서 그 손님에게 쉽게 보석을 팔았습니다. 손님이 가고나자 누군가 그 주인에게 어떻게 그렇게 장사를 잘 하는지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보석상 주인은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종업원들은 저보다 마케팅 실력이 뛰어납니다. 그리고 모두들 보석 전문가예요. 한데 종업원들과 나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어요, 그것은 우리 종업원들은 보석에 대해 잘 알지만, 난 보석을 사랑하죠, 나는 '나의 보석에 무슨 일이 생길까? 누가 그 보석을 갖게 될까? '하고 늘 염려해요. 손님들도 이러한 내 마음을 느끼죠. 그래서 그들은 나의 보석을 간절히 사고 싶어 하는 것이고, 흔쾌히 저는 그 보석을 기쁘게 파는 것이지요..."


  위의 예화에서처럼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가족과 이웃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도 실상은 사랑과 자비가 부족하지 않았는지요?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아마 위의 보석가게 주인처럼 그들을 아마 손님들에게 잘 팔 수(선교?) 있었지 않았을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사랑과 자비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호세 6, 3- 6)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 9- 13)

   이러한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우리 부모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그 사랑과 희생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아브라함과 같은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께 ‘올바른 이’(로마 4, 18- 25 참조)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면서 조재형 신부님의 ‘부모님의 마음’을 퍼드립니다. 가브리엘통신


                                <부모님의 마음>


  자식이 성공해서 출세하면 부모님의 마음은 즐겁습니다. 그래서 동네를 다녀도 어깨를 펴고 다니십니다. 마을 사람을 만나도 아는 척을 합니다. 그러나 자식이 실패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 부모도 똑같이 죄인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다니십니다. 마실(마을)을 나서도 대로보다는 골목길로 다니시곤 합니다. 이런 것이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여당의 대표도 천주교 신자라고 합니다. 야당의 대표도 천주교 신자라고 합니다.  사이좋게 지내면 좋으련만 늘 싸우더니 이번에는 다시 안볼 것처럼 싸우고 말았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지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마음이 영 편하지 않습니다. 마치 짚신장수 아들과 우산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가 어느 아들을 위해서도 마음을 쓰기 어려운 심정입니다. 비가 온다고 하면 짚신장수 아들 걱정이 되고, 햇빛이 나면 우산장수 아들이 생각나서 걱정 되듯이 말입니다.

  이런 일은 카인과 아벨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카인과 아벨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카인의 제물을 하느님께서는 받아들이시지 않고 아벨의 제물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카인은 동생의 제물만 받아들이신 하느님께 섭섭했습니다. 그런데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여 버립니다.  사람들은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둘의 제물을 똑같이 받아들였으면 좋으련만 어째서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이셨을까? 어떤 사람은 카인의 제물은 정성이 부족했다고 하고 아벨의 제물은 정성이 가득 담겨서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런 정성이 있고 없고를 가지고 따질 정도로 쪼잔 하시지는 않을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께서 육식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양을 키우는 동생의 제물을 받으셨으리라 이야길 합니다. 아무리 육식을 좋아 하신다고 하더라도 카인의 성품을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 그런 무리수를 두시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엿장수가 가위로 소리를 내는 것이 ‘엿장수 마음대로’ 이듯이 제물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하느님 마음이라고 합니다. 일면 말이 안 되듯이 보이지만 성서를 보면 이는 정확한 대답이 아닐까 생각이듭니다.

  문제는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생각으로 재단하고 판단하려는 카인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요? 20여 년 전에 나온 영화 ‘아마데우스’는 바로 그런 카인과 아벨의 전형을 보여주는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모짜르트에게 천재적인 재능이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살리에르가 하느님을 원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편 ‘넘버 3’라는 영화에서 불사파의 보스 송 강호가 ‘라면을 먹고도 달리기에서 우승을 한 현 정화’라고 이야기하자 부하가 ‘임 춘애가 아니냐?’고 토를 달았다가 엄청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송 강호는 이야기 합니다. ‘내가 하늘이 빨갛다면 빨간 거야.’ 이치적으로 틀릴지 모르지만 절대적인 보스의 권위를 느끼게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하늘아, 높은 곳에서 정의를 이슬처럼 내려라. 구름아, 승리를 비처럼 뿌려라. 구원이 피어나게, 정의도 함께 싹트게 땅아, 열려라. 이 모든 것을 창조한 것은 나 야훼다. 아! 네가 비참하게 되리라. 자기를 빚어낸 이와 다투는 자야. 옹기그릇이 옹기장이와 어찌 말다툼하겠느냐? 옹기 흙이 어찌 옹기장이에게 ‘당신이 무엇을 만드는 거요?’ 할 수 있겠느냐? 작품이 어떻게 작자에게 ‘형편없는 솜씨로군.’ 하고 불평할 수 있겠느냐? 어느 누가 제 아비에게 "왜 이 모양으로 날 낳았소?‘ 할 수 있겠느냐? 자기 어미에게 어찌 ’이 모양으로 날 낳느라고 그 고생을 하였소?‘ 할 수 있겠느냐? 이스라엘을 빚어 만드신 거룩하신 이,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내 자식들의 일로 너희가 나를 심문하는 것이냐? 이 손으로 하는 일을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것이냐?...“

아브라함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자식이라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갑작스럽게 생기는 고통과 재난에 대해서 하느님께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가는 것 아닌가!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으니 나쁜 것을 주셨어도 감사하자!’라고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자식이라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갑작스럽게 생기는 고통과 재난에 대해서 하느님께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가는 것 아닌가!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으니 나쁜 것을 주셨어도 감사하자!’라고 말을 합니다

. 성모님도 그렇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한 것에 대해서 토를 달지 않습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습니다.“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하지만 제 뜻대로 마시고 하느님 뜻대로 하소서.” 라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토를 다는 것은 참된 신앙인의 태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국민은 하늘’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을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할 때도 국민 때문에 한다고 이야길 합니다. 그런데 국민의 다수가 반대하는 일을 하는 것은 국민을 위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국민을 하늘로 받들어 모시는 태도도 아닙니다.  국민이 성숙하지 못해서 잘못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은 카인과 같은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국민이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국민의 몫이지 정치인들이 평가하고 판단하고 시비를 따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국민은 선택할 것입니다. 그 ‘선택에 대해서 토를 다는 우를 범하는 정치인’들은 더 이상 없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국민은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국민은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지 않고, 우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사 어리석고 우매하다 하더라도 국민의 선택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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