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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복음묵상(2005-06-13)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6-13 조회수889 추천수4 반대(0) 신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마태 5, 38-39)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 대당명제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구약성서

 

가 말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

 

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출애 21,23-25; 레위 24,20;

 

신명 19,21 참조)는 명제를 폐기하시고 "앙갚음하지 말라"는 반명제를 제

 

시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는 앙갚음은 피해자가 받은 것과

 

같은 종류의 해를 가해자에게 주거나 같은 종류의 방법으로 가해자를 해

 

치는 소위 동해형법(同害刑法), 또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이 법칙이 앙갚음이나 보복을 정당화하고 복수를 부추기는 법이

 

라고 생각하면 안되는데, 모든 종류의 형법은 사전에 범법행위를 방지하

 

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규정은 오히려 가해자에 대한 어

 

떤 조치가 개개인의 일이 아니라 이를 관장하는 기관이나 공동체의 장치

 

에 속한 일임을 밝히려는 것입니다.(민수 35,24) 나아가 구약의 율법은 가

 

해자에 대한 일련의 조치가 하느님의 전적인 통치권에 속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신명 32,39-43; 집회 28,1; 이사 35,4; 예레 46,10; 에제 25,17)

 

이러한 동해형의 가해 형법이 원시사회나 고대문화권에서는 어느 정도 통

 

용된 규정일지 모르나 법이 발달한 오늘날 사회에서는 국가가 이를 용납

 

하지 않고 있습니다.

 

 

복수와 보복의 오해를 내포하고 있는 동해형법, 또는 동태복수법이라는

 

용어보다 "탈리오법(lex talioni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옳을 지

 

도 모르는데, "탈리오(talio)"는 "동등한, 동일한"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형

 

용사 "탈리스(talis)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그 원초적인 유형은 바빌론 제1왕

 

조의 6대 대왕인 함무라비(Hammurabi, 재위 B.C 1792-1750)의 법전에서

 

발견됩니다. 탈리오 유형의 형법은 고대 앗시리아와 그리스문화권에서도

 

발견되며, 고대 로마문화권에서는 십이동판법이라고 불리는 법전의 한 조

 

항으로 성문화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의 사지를

 

분리시키고, 타협에 이르지 못하면 탈리오 해야 한다"(제8표 2)고 규정하

 

고 있는데, 이 규정의 뜻은 어떤 사람이 남의 손이나 발을 부러뜨렸는데

 

가해자와 피해자가 금전적 배상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탈리오"가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가해자도 동일한 해를 입도록 조처해야 한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경우 탈리오는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소멸되고 국가에

 

서 정하는 특정한 형법이나 재산에 의한 손해배상으로 변화하였는데, 그

 

근본적 사고방식은 응보이며 이러한 견해는 형벌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

 

었습니다.

 

 

탈리오법은 언뜻 보기에 적용이 쉽고, 상당히 이성적이며, 정의롭게 느껴

 

집니다. 그러나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

 

쨌든 예수께서는 "앙갚음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시고, 예수님의 요구는 여

 

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예수께서는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으로만 머

 

물 것이 아니라, 악을 선으로 되 갚으라고 하십니다. 오른 뺨을 치는 자에

 

게 왼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재판 거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

 

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와 십리를 같이 가 주라는 것입니다.

 

또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악을 관용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

 

닙니다. 대사제 안나스가 예수를 심문하는 자리에서 그의 가르침에 대하

 

여 묻자 예수께서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

 

에게 물어 보아라. 내가 한 말은 그들이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자 경비병

 

이 예수의 뺨을 때리자, 예수께서는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않으시고 "내가

 

한 말이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 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요한 18,20-23 참조)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요. 
 

악은 분명히 악입니다. 예수께서 악을 선으로 되 갚으라고 하시고, 요구하

 

는 것보다 훨씬 더 베풀라고 해서 옳고 그름의 척도가 파기된 것은 아닙니

 

다. 문제는 악의 도전을 받았을 때나 어떤 요구를 받았을 때, 이에 어떤 태

 

도를 취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분명 실천하기 어려운 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보다는 선을, 법보다는 사랑을, 강함

 

보다는 약함을 더 선호하시는 것입니다. 이 선호는 그리스도의 참다운 자

 

유에 뿌리박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입니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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