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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방주(方舟)가 되리라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5-06-23 조회수1,008 추천수8 반대(0) 신고

 

 

 

독서: 창세 16,1-12.15-16
복음: 마태 7,21-29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자식을 주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다.
아니,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기다리다 지쳐서 편법을 써서라도 그 약속을 이루려고한다.
종, 하갈의 몸에서 대를 이어줄 아들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이런 일은 고대 사회에서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당시대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자신의 몸종을 남편에게 소실로 줄 수 있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본부인의 친자식으로 간주되었다.(함무라비 법전 146항)

 

이처럼 대리모(代理母)를 통해서 양자를 얻어야 할만큼
아들이 없는 여자의 신세는 그 가문과 사회 안에서 상당히 불리한 입장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럴 때, ''씨받이''로 들어간 여자들이 종종 그랬듯이 하갈도 태기가 있게 되자 도도해졌다.
안주인 사래를 업신여기고 기고만장해졌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더 신세가 처량해진 사래, 아브람에게 자기 처지를 하소연해보는데
다행히도 아브람은 조강지처를 박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던지라
몸종 하갈의 처분권을 원래의 소유주인 사래에게 위임한다.

 

분수를 모르고 판단착오를 일으켰다가 졸지에 전세가 역전된 하갈.
태중의 아기와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운 신세가 되었다.
여주인의 박대를 피해 수르 광야로 피신을 올 정도라면
사래의 박대가 어떠했겠는가 짐작할 수 있겠다.

 

막상 도망은 쳤으나, 살 길이 막막한 하갈.
샘터에서 천사를 만난다.
주님의 천사는 돌아가 고생을 참고 견디라고 한다.
그 말은 주님이 돌보아주시겠다는 말이 아닌가?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며 그의 자손도 셀 수 없을만큼 많이 불어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생계의 보장도 없는 빈 들판으로 무작정 피신해올 정도의 강인한 성격과 행동파인 하갈.
그런 저돌적인 성격이 그의 아들 이스마엘에게 그대로 유전될 것인지.
아기는 자라 "들나귀같아 닥치는 대로 치고 받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가나안 주변 사막에서 아무런 속박도 받지 않고 들나귀처럼 떠돌아 다니며 생활하는

베두윈 족의 강인한 모습은 바로 하갈과 이스마엘의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성서 편집자는 해설하고 있다. 

 

한편, 집으로 돌아간 하갈은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그 때의 아브람의 나이는 팔십육세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 끝에 얻은 이스마엘은 우리가 알다시피

자식을 주겠다는 주님의 약속의 성취자는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사라가 만든 임시적인 계획에는 예기치않은 갈등과 장애가 발생했다.
거기엔 반목과 질투, 배반과 폭력이 자연스레 뒤따라 왔다.
약자들의 소외와 인권의 유린이 아무렇지도 않은듯 자행되었다.
이같은 인간의 무모한 계획과 비윤리적인 행동들.
그러나 그에 대조되는 주님의 놀라운 자비와 공평한 사랑. 

 

주님은 사래의 박대와 아브람의 방관, 하갈의 교만 등을 나무라며
그에 걸맞게 시시비비를 가리시는 ''정의''의 심판관이 아니라
이유를 묻지 않고 돌보아주시는,
만인에게 평등한 사랑을 베푸시는 ''공평과 자비''의 주님이시다.

 

그분 안에서 선택을 받지 않은 이는 사실상 없다.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은 특별한 사명과 연관되는 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래는 선택받았고, 하갈은 선택받지 못했으며
이사악은 축복 받았고, 이스마엘은 축복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 모두의 후손에 축복을 주시고, 그 모두를 돌보시는 주님이시다.

(라하이 로이-"나를 돌보시는 하느님"이란 뜻.: 하갈이 천사를 만난 후 붙인 샘의 이름이다)

 

그렇기에 오늘 복음은
주님 주님하고 부르는 사람이라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 내고 많은 기적을 행했다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한다고, 그 신앙을 실천한다고 

그렇지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유리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고백이, 신앙행위가 가치없다는 말인가?

그렇진 않다.

문제는 뭘 좀 안다고 떠들 것도 없고, 뭘 좀 한다고 안심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부서지는 모래알처럼 나부대지 말고,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표징들에 마음 흔들리지도 말고
안으로 안으로 내실있는 신앙의 기반을 다지라는 말이다.
묵직한 반석처럼 굳건하게, 편안하게, 있는 듯 없는 듯이, 자기 할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큰 홍수가 날 때 그가 지은 반석같은 신앙의 집이 많은 사람을 구할 방주가 되리라. 

 

사실 아브람을 불러 후손을 주겠다는 축복의 약속은 그에게 특별한 사명,

즉 만인에게 복을 끼쳐주는 사람이 되게하기 위한 선택이었다(창세 12,2).

그의 아들, 이사악도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하고,

그의 손자, 야곱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그 사명은 하늘의 별처럼 널리 퍼진 그의 신앙의 후손인 우리에게까지 

이어져야 할 사명이다.


"내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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