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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63) 사제 필독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6-24 조회수1,338 추천수12 반대(0) 신고

2005년6월24일 금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ㅡ이사야49,1-6;사도행전13,22-26루가1,57-66.80ㅡ

 

             사제 필독

                     이순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이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르는 언어의 총칭일 것이다. 먼저 오신 길을 뇌성처럼 외치다가 욕심없이 가신 분이 세례자 요한이다. 그 시대의 이스라엘은 내가 알 수 없지만, 더구나 이 시대의 이스라엘조차 가본적이 없지만, 영화라든지 텔레비젼 뉴스에서 보면 아무래도 이스라엘 땅은 수풀이 우거진 초록의 광경보다는 흙먼지 뿌연 벌판에 마른 나무 몇 가닥 군데군데 심어진 곳에서 요한은 소리를 외친다. 외치다가 그토록 외치다가 눈빛 하나로 찡하고 통해버린 주님께 세례를 베풀어 주신다.

 

주님과 요한은 태중에서의 만남을 제외하고는 만난적도 없고 정담을 나눈적도 없이 서로의 갈 길이 다르고 바빴던 친척이 아니던가?! 신발끈을 묶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그렇게 높으신 분을 외치느라고, 물로 세례를 배풀지만 성령으로 세례를 배푸실 분이 오신다고 외치느라고, 고행길을 가신분이 요한이 아니던가?! 그리고 뒤따라 오신 분도 외치신다. 너무나 외치고 다녀서 요한의 제자들이 상당히 기분이 나쁜 존재였을 주님께서도 요한에 이어서 외치고 또 외치신다.

 

서로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여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그러면 너희의 생명이 영원할 것이다. 요한과 주님의 공통점은 모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지도록 순종하여 삶을 살아 내시기도 하였지만 두 분 모두 외치는 소리였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광야에서의 소리였고, 주님은 그 자체가 말씀이지 않았던가?! 먼저 온 소리가 나중에 오실 말씀께서 구원의 문을 열도록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을 태중에 담았을 때 아버지 즈가리야는 응답하지 않은 벌로 벙어리의 신세가 되었음에도 아들의 초성은 광야에 머물고! 그 시절에 마이크가 있었을 것인가? 아니면 군중이 모여 앉을 강당이 있었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치는 소리가 되어 벌판을 누비고 군중을 몰고 다니지를 않았는가?! 시대가 흐르면서 신부님들의 외침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그것을 혹자는 열정의 변화라고 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게 단정짓기는 무리일 것 같고 시대의 변화라 하고 싶다.

 

교회공동체가 어려운 이유는 남녀노소 뿐만 아니라, 희로애락과 생로병사, 인간이 지니는 모두를 수용하고 충족시켜야 하는데에 커다란 애환이 있다. 그럼에도 교회가 건재한 이유는 그 모든 해답과 능력을 인간의 능력이 아닌 신의 능력에 의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돌아서 기록에 보면 역사의 많은 사건들이 가톨릭이라는 조직적 성공에 대하여 연구 분석하고 권력의 영향력에 무수히 접목시켜 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투자와 영욕에 성공을 거둔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분명한 사실은 신의 개입이 없는 남녀노소 뿐만 아니라, 희로애락과 생로병사, 인간이 지니는 모든 것을 수용하기란 인간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게 증명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인간공동체에 한 사제가 선다는 것은 송곳 위에 선 나약한 인간이기 보다 더한 바늘 위에 선 먼지 같은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외침이 달라지고 있다. 말씀께서는 변하지 않고 영원한 존재성에서 단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그 자리 그곳에 그 모습으로 그렇게 계시거늘 세상은 눈 뜨고 잠 깨어 아침을 바라보기 조차 겁이 날 만큼 변화하고 있다. 그런 놀라움에 혈관들의 수축과 이완작용이 불규칙해진 이유였을까? 다양한 문화와 사회적 변화의 혼란으로 사람의 심성은 다원적 영성의 시대를 맞고 또 그 다양성에 발을 맞추기 위해 얼마나 고단한가!

 

언젠가 나는 감히 교회의 윗어른들께 변하는 사제들의 강론에 대하여 신학교에서 재고해 주실 것을 요창한 바 있다. 물론 신부님들의 반론을 모르고 있지는 않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사제들의 일상 자체가 단순하다 못해 절박함 조차 결여되다 보니 세속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교우들의 생존능력에 오히려 감동하여 할 말이 없다는! 또한 복음이라는 내용이 매년 매번 똑 같아서, 또는 교우들보다 사제 자신의 내면의 울림이 더 복음적으로 살아내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여러가지 상황과 변명과 이유들에 의하여 종종 매일미사에서 강론을 아예 하지 않으시는 신부님들도 상당한 것으로 알고있다. 그런데 신부님들이 모르는 게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사제의 입장에서 바라 본 시각에서 나오는 생각이다. 그러나 사제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남녀노소 뿐만 아니라, 희로애락과 생로병사, 인간이 지니는 모두의 입장에서 본 사제를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신부님이 신부님이 아니고 성당에 앉아서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을 바라보는 신자라면? 

 

내가 강론을 필기해 온 세월이 얼추 짐작하여 20년은 훨씬 넘었고, 25년은 쪼끔 안되지 싶으다. 좁은 셋방살이 하느라고 많이 태워 없애기도 하였지만 모아 둔 노트만 해도 상당한 양이며 그 안에는 강론을 미리 준비하시지 않고 즉석 강론으로 하신 신부님들의 즉석영성(?)들도 포함되어있다. 또한 어느 쪽에는 <오늘 강론 캡!>이라고 써진 곳도 있고 어느 쪽에는 <꽝!>이라고 크게 한 자로 써진 곳도 있다. 그 평가의 내용들도 다양하다. 요즘은 저렇게 간단하지만 예전에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들도 있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의 강론이 너무 좋아요.> <신부님 멋쟁이!> 라든지 <신부님은 어제 밤에 주(酒)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을까?>라고 쓴 곳도 있다. 그러고 보니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 강산이 두 번 하고도 또 반 벌의 옷을 바꿔 입었으니 강론을 적으면서 신부님들의 속을 들여다 보느라고 사심이 생길적도 있다. 25년의 세월동안 강론을 써 온 경험을 총정리를 해 본다면, 아무리 강론을 못하는 신부님이라고 미사중에 분심을 하였어도 적어서 돌아와 집에서 읽어보면 <아~! 이래서 사제구나.>라고 감동을 받고야 만다. 

 

사제의 강론 뿐만 아니라 즉석 영성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서당개 노룻을 삼년을 했더니 풍월을 읊더라는 우리네 속담은 결코 헛된 증언이 아니다. 신학생들은 10년이 다 되는 세월을 열심히 열심히 공부하며 기도하며 생활하며 살지를 않는가?! 그러므로 주(酒)님께서 아직꺼정 옆구리에 앉아 주절거리고 있어도 풍월보다 훨씬 선명하고 내용 깊은 말씀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을 하고있다. 최근이라고 볼 수는 없고.....

 

내가 그 시점을 정확히 짚어 잡을 수는 없다지만 대충 어림잡아 IMF를 기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분명히 신학교에서 미사경문을 읽는데는 잘 훈련되어서 오시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미사경문을 읽을 때와 강론을 할 때에 선포의 척도가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미사경문과 복음을 읽을 때는 광야의 세레자 요한이 분명하다. 그런데 강론을 하실 때는 선포의 우렁참은 간데 없고 밀실에서 조단조단 속삭이는 부드러운 대화가 되어버리니....

 

전에도 가신 어떤 보좌 신부님께 강론에 대하여 진언을 드린적이 있었다. 나는 귀가 어두운 나만 불편한 줄 알고 잘 참고 인내하느라고 여간 곤혹스러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미사중에 사제의 언어가 굴곡이 심하게 되면 제일 힘들어 하는 사람은 물론 나이지만, 또 노인분들이다. 젊은이들이야 잡념도 있고, 주보도 보고, 또 신심의 성숙도에 몰두하지 않아서 상관없는 경우도 있다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첫째 눈이 어두워 영적 독서는 커녕 글씨 보기도 어렵고, 둘째 세상사 모든 고민이 다 무상하다는 것을 앎으로 잡념은 주님께 꽁꽁 붙들어 매고, 셋째는 신심은 오직 신부님의 말씀에 의존하여 낙으로 삼아 즐거운! 그래서 노인분들은 강론의 영성이 어려운 것 보다 쉽고 소리 큰 강론이면 <우리 신부님 강론은 왜 이렇게 귀에 쏙쏙 잘 들어와?! 말씀도 잘하시고 을매나 좋은지 몰러!> 라고 은총을 삼아 만족을 하신다.

 

그런데 근자의 신학교에서 배우는 강론의 학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지만 사분사분하여지고 얄캉얄캉하여진 경향이 없지 않다. 강론은 미사 경본과 독서, 그리고 복음 말씀에 동등한 외침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소리가 큰 것이 꼭 외침이냐고 반문 할 수도 있다. 전에 나는 어떤 신부님께 이런 말을 했었다. <가끔 전철역이나 역 광장에서 목회를 지망하시는 분들의 소리를 따갑도록 들어야 하는 광경을 목격할 때가 있습니다.

 

가톨릭의 사제가 개신교의 목사님들 보다 절박하지 않은 점이 많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 절박함이 다르다고 해서 목사님을 지원하는 분들의 통성을 우리 신학생들이 훈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엄연한 위반입니다.> 라고. 어쩌면 문명이라는 네모상자에 갖혀 성장한 세대 출신의 성직자들은 네모상자에 갖혀 함께 성장해온 세대들에게 맞는 선포를 하시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어느 한 사제에게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니라 수 년 전부터 내가 제시 하여온 질의였기 때문에 가능한 짐작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가  눈 뜨고 잠 깨어 아침을 바라보기 조차 겁이 날 만큼 변하고 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그 변화의 물살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첨단의 젊은이들도 늙게 되어 있고, 인간의 한계적 구조는 쇠약해질 것이며, 나는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했던 어른들의 욕구를 고스란히 요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게임으로 오락을 삼아 살아 온 후의 세대들이 늙어서 꼬부랑 깽깽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도 칙칙한 의자 하나에 머물러 게임을 하며 오락을 삼을지에 대하여는 알지 못한다. 그때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광야의 요한께서도 지금 이 시대의 성전에 앉아 외침이 아닌 마이크 소리를 듣는 군중을 감히 상상이나 했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께서는 변하지 않고 영원한 존재성에서 단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그 자리 그곳에 그 모습으로 그렇게 계시지 않는가?!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해도 사제는 광야에서의 외침일 것이다. 먼저 오신 요한께서 광야에서의 소리였다면! 주님께서 그 자체가 말씀이었다면! 후에 주님을 선포하며 살고있는 신부님들께서는 광야의 외침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신자의 입장에서 본 제단의 사제는 예수님의 대리자요, 요한의 소리이며, 구원을 선포하는 외침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신학교에서 배워서 쌓은 능력을 결코 가벼히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후학들을 돌보시는 신부님들께서는 주어진 소명에 더욱 충실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의 사제들이여! 좀 더 자신감있게 주님을 믿고 의지하라. 그대들에게는 요한의 외침이 있다.

 

ㅡ아기는 날로 몸과 마음이 굳세게 자라났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루가1,80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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