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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먼저 인간이 되어야..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5-06-25 조회수1,053 추천수7 반대(0) 신고


인간이 되어야

 

독서: 창세 18,1-15
복음: 마태 8,5-17

 

마므레가 있는 헤브론의 거친 광야.
살인적인 여름 한낮의 열기에 지친 나그네들은
반가운 손님인양 자신들을 뛰어나와 맞으며
생명보다 귀한 물을 길어와 발을 씻게 해줄 뿐 아니라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서 음식과 신선한 우유를 대접하고  
그 곁에 서서 종처럼 시중을 드는 마음씨 좋은 노인을 만났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융숭한 대접을 베풀고 있는 아브라함.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은 고대 근동의 미풍 양속이었다.
그러나 필경 사막의 열기와 먼지로 꼬질꼬질 때꾹물이 흘렀을, 그리고 냄새까지 났을,
그 나그네들에게 베풀어준 아브라함의 대접은 분명 분에 넘치는 환대였음을
성서 구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떻든 아브라함이 대접한 그 나그네들은 사실상 하느님의 특사였다.
갑자기 나그네가 "하느님"(10절)으로 변하며.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 내가 틀림없이 너를 찾아오리라.
그때 네 아내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이들이 하느님이 보낸 천사들일지.

 

하느님의 전언을 듣고, 사라는 천막 문 어귀에서 속으로 웃었다.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였고 사라는 89세.
곧이곧대로 나이를 믿지 않는다쳐도, 이미 가임(可妊) 기간이 끝난지 오래다.
당연히 자조적인 웃음이 나올 수밖에.
더위에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을테지. 줄려면 일찌감치 주지 싶었을테지.

 

사실 이 본문 바로 앞의 17장에서는 자식을 주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고 있다(17,17).
그러니까 결국 아브라함도 사라도 믿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차라리 이미 열 세 살이 된 이스마엘이나 축복해달라는 요청을 한다(17,18).
주님이 오실 때마다 ''준다 준다'' 했지만, 아무 변화가 없으니 어찌 웃지 않겠나?

 

그러자 사라가 천막 뒤에서 웃었다는 사실을 알아맞추는 주님.
사라는 속으로 웃었을 뿐, 겉으론 멀쩡했으므로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뗐다.
그러나 인간의 속까지 꿰뚫고 계시는 주님의 눈을 어찌 피하랴?

 

사라의 자조적인 이 비웃음은 바로 다음 해 봄날, 화창한 웃음꽃으로 피어났다.
아니 그 이전,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웃음꽃은 만발했을 것이다.
열달 내내 오죽 웃고 다녔으면, 아들 이름이 ''이사악''(''웃다''는 뜻)일까.

 

오늘 복음에서는 ''이스라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이라며
극찬을 받고 있는 이방인 백인대장이 나온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도 갖지 못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믿음 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적 면모도 남달랐다.

즉 예수님의 위치를 보아서 감히 자신의 집에 직접 오신다는 것 자체를
황송하게 여기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며, 
하찮은 하인 하나를 고쳐주기 위해 몸소 먼길을 찾아온 따듯한 사람이었다.
또한 이방인인 자신의 집으로 유다인이신 예수님이 찾아올 경우,
정결법에 저촉될 것까지 사려깊게 생각한다.
(루가복음에서는 유다인 회당까지 지어준 사람으로써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오늘 독서에서 보여지는 아브라함의 모습도
그 사회에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초과달성하고 있는 모습이다.
백인대장도 그러하다.

베드로의 장모도 치유되자마자 예수께 시중을 드는 봉사의 여인이다.

 

이는 한 사람의 신앙인이기 이전에

마음이 따듯한 사람, 겸손한 사람, 희생적인 사람.
곧 인간적으로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신앙 따로 인간 따로가 아니다.
신앙은 이 인간성에 더욱 깊이를 더해주고,
인간적인 것만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더 먼 지평으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한마디로 인간을 완숙하게 실현시켜주는 것이 신앙이다.

그 완성의 단계로 이끌어가기 위해 하느님은 우리를 몸소 찾아오신다.

 

변장을 하고 찾아오시는 그분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있을까?
소리없이 내미시는 그분의 손을 어떻게 순순히 잡을 수 있을까?
그래서 어떻게 그분의 은덕을 입고 칭찬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주님이 원하시는 바의 자기를 실현하는

우리 생의 목적에 이를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평소 주위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평소 주변 사람들 안에서 어떻게 미덕을 실현하고 있는가.
그런 것이 그분을 맞이하는 것이며 그분을 초대하는 것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새삼 발견한다.

 

주님, 우리의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항상

당신을 모셔들이는, 마음 따듯하고, 넉넉하고, 겸손한,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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