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368) 가슴을 짜서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7-10 조회수1,182 추천수7 반대(0) 신고

 

          가슴을 짜서

                            이순의

 

 

 

 

산의 밤은 일찍 깊어진다. 그래서 서울의 아들이 수학문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초저녁이면 짝궁은 고단함에 세상을 잊고 등을 펴 누울 것이다. 그래도 하루 종일 생각만 하다가 뱉어내지 못한 소리를 해야만 했다. 전화 벨에 신호음이 가고.... 다행히 취침중이지는 않은 목소리였다. 먼저 옆에 누구라도 손님이 있는지 확인하고

<내일 새언니 수술이야.>

<그래?> 그리고 말이 없다.

 

오늘도 무작정 디카를 들고 놀이마당으로 갔다. 아무래도 방에 있으면 하루 해가 너무나 너무나 길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다행히 공연 내용은 신명과 실력을 갖춘 공연들로 이어졌고, 사진에 담느라고 시간이 잘도 흘렀다. 감사함이 사무치는 공연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호수가를 걸으며 생각을 깊이 해 보았다. 잠시 일을 할 때도 건강을 이겨내지 못해서 토혈을 하며 아팠었는데 그래도 좀 더 일찍 돈 벌이에 직접 나셨더라면 지금 나의 입장이 이지경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밖에 못 살아낸 결과가 나의 탓이 더 큰가를 생각해 보았다. 훨씬 훨씬 전에 가게 자리 하나를 봐 놓고 돈이 모자란다고 친구랑 동업을 해서 해 보라는 짝궁의 권유를 거절한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때 그 가게를 했더라면 지금 나의 입장이 이지경은 아니었을 것인가? 그런데 왜 나의 마음은 내 탓이라고 하지를 않는 것일까? 아마도 내가 그 가게를 운영하여 흥했을지 망했을지는 몰라도 짝궁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서라도 요구할 게 있었을 것이다.

 

불성실하거나 잡기에 빠진다거나 불필요한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 건전하고 성실한 사람이지만 한 번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는 겁없이 도미노 처럼 연속적으로 와르르 무너졌었다. 집을 늘려 가려고 마련해 놓은 2천만원이 있었는데 그것마저 요구했었다. 저녁내내 얼굴의 볼이 헐어서 껍질이 벗겨지도록 울었었다. 우리 아이가 자라서 청소년이 되었는데 또 다지 좁은 골방으로 갈 수는 없다고, 그 돈만은 절대로 안된다고, 정말로 치료를 해야했을 만큼 볼살이 벗겨지도록 울면서 거절을 했었다.

 

그래도 남편이라서 이기지 못했다. 벌어 보겠다는데, 마누라가 남편의 앞길을 막는다는데, 내가 짝궁의 다리를 자른다는데, 못 이기고 줘버렸다. 그리고 3일만에 그 2천만원이 먼지도 남지 않았다. 그날 아침에 물건 값을 지불했는데 밤에 폭우가 쏟아져서 또 하늘이 망쳐 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남편을 못 이기고도 살아있음에 감사하자고 달랬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나의 마음을 비워버린 것이다. 나는 나의 손이나 입으로는 절대로 돈 거래를 하지 않는다. 차라리 죽을 먹고 빌어를 먹고 살자. 짝궁의 좌절은 나를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고 벗겨내고..... 나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내게 돈을 벌어야 할 능력이 있었다면 짝궁이 그냥 가만히 벌어서 모아 살게 두지도 않았겠지만 그런 짝궁이 남편이라고 인내할 한계도 무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나를 바보로 만들어서라도 가정이라는 성역을 지켜야만 한다고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벗들은 물론 친가와의 정 조차도 모질어지는 선택을 한 것이다. 지금 나에게 유일한 한가닥 세상의 끈은 큰언니 한 사람 뿐이다. 큰언니가 전화 해 주면 그게 하루중에 유일하게 내 입이 열리는 순간이다. 나를 깍아버리는 훈련을 해 오면서 세상에 안달이 나지도 않았다. 그러려니 해 버리는.....!

 

그래서 나는 누구랑 다투기 위해서 혈안이 되지도 못하지만 화해를 하기 위해서 방편을 찾지도 않는다. 다퉜으면 그걸로 끝! 그게 나다. 그렇다고 계속 다툴 의향도 없고, 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도 없는 사람이 나다. 그러니 때로는 상대편에서 볼때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황당하며 웃기는 짬밥으로 보이겠는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러든지 말든지 해 버리는 게 또 나다. 살아보니 세상살이가 다 그게 그거드라는 말이다. 잘난 사람은 계속 잘났다 하고, 돈 있는 사람은 그대로 또 권위를 내세우느라고, 이래저래 사람이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드라. 사람은 다 똑 같드라. 신부님도, 수녀님도, 일반적인 그냥 평범한 사람들도!

 

못난이 되어 말 한 마디 뱉어 놓으면 그냥 가만히 두고 보아주는 벗을 만난적이 없었고....! 신부님도 그랬고, 수녀님도 그랬고, 벗들도 그랬고.... 어쩌면 가족들 마저도 내가 묵상글을 쓰면서야 나를 알아가고 발견해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전에는 그냥 못난이! 지금도 나는 못난이다. 너무나 못나서 누구에게 나를 열어보일 용기도 희망도 부릴 줄을 모른다. 유일하게 짝궁에게 나를 열어보려 하지만 19년 살은 짝궁은 언제나 타인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내가 무엇을 바라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내지 못한다. 짝궁의 생각은 모든 것을 한 가지의 방편으로 결정을 놓아 버린다. <내가 돈을 벌어야 자네가 날개를 달아.>

 

그 말이 맞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틀렸다. 내가 느끼는 체감은 나를 아끼는 것이 아니라 고문보다 지독한 무지로 다가 온다. 아니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그걸 들어줄줄 알아야 같이 사는 사람이다. 하기야 짝궁도 내 말을 죽어라 안듣는데 남들이 어찌하여 내 말이 말처럼 들렸을 것인가?! 결국 나는 같이 살기 위해서 내 자신을 망가뜨려버리는 선택을 해 버렸다. 그것을 지적해 주시는 분이 계셨지만 그렇다고 나에게는 이대로의 방법 이외의 어떠한 자구책도 없었다. 이제 겨우 묵상글에 담아 가슴을 짜서 쏟느라고 서러운, 그런 나약하디 나약한 존재가 되어 때로는 한없이 부끄러워 사무치는 슬픔을 앓고 있다. 살아내지 못한 현실을 나열하는 것 같은...! 이 또한 다 무슨 소용인가?!

 

그래도 오늘은 짝궁에게 하고 싶은 말 보다는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내 새언니가 수술을 한다는데 짝궁은 뭐라고 해줄 말이 있어야했다. 내 새언니는 상다리가 부러지게 상을 차려 짝궁의 어머니를 사부인이라고 융숭한 대접을 해 드렸고, 짝궁이 아들을 낳았을 적에는 출산비용을 송두리째 감당해 주었고..... 내가 학교에 다닐 적에 같이 살아서 출가할 때까지의 10년 사랑은 제외하고 라도, 수도 없이 알게 모르게 받아온 은혜들을 주워담고 세느라고 각시의 하루 해가 얼마나 얼마나 길었으니 짝궁의 한마디가 나에게는 필요했다. 그런데

<받은 것이 많았으니 이런 때 사람의 도리가 있어야 하지만 어쩌것는가?! 자네가 가서 몸으로 때우고 오소.>

 

ㅡ하느님 아버지!

   제발 친정식구들이 아프지 않게 해 주십시요.

   제게는 갚아드릴 것이 없습니다.

   이럴 때 산다는 것이 정말로 싫습니다.

   주님!

 

그래도 짝궁이랑 백년해로 하며 살아야만 큰오빠께도 새언니께도 언니들이랑 형부들이랑 또 친정엄마께도 불효가 아니것지!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