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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69) 가슴살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7-14 조회수1,106 추천수10 반대(0) 신고

2005년7월14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성 가밀로 데 렐리스 사제 기념 ㅡ출애굽기3,13-20;마태오11,28-30ㅡ

 

             가슴살

                    이순의

 

 

"고모. 가서 몸살 나지 말어."

새언니께서 퇴원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나는 몸살은 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입원 기간이 너무 짧다 보니 달리 새언니를 위해서 해 드릴 것이 없었다. 그런데 새언니는 나에게 자꾸만 몸살나지 말라고 하신다. 아마도 잦은 나의 수술 뒷바라지를 하시고 새언니는 몸살이 났었을 것이다.

 

벌써 10년이 되었다. 내가 연속 6개월 간격으로 눈에서 종양을 제거해야 했고, 자궁절제 수술을 해야 했으니 새언니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구나 나는 개복을 하는 수술이기도 했지만 수술의 경험이 많다는 것은 정신력은 뛰어나지만 육신의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새언니의 수고를 다 갚아드리지는 못하더라도 이 차지에 얼마의 정성이라도 답례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늘이 뜻을 두지 않으신다. 나는 늘 빚쟁이로 살라하시나 보다. 의술이 발달하여 새언니는 개복을 하지 않고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셨으며 다음 날 퇴원을 하셨다. 고작 입원에서 퇴원까지 2박3일이었다. 그렇다면 단 한 번이라도 큰오빠처럼 나도 새언니를 위해서 물질적으로라도 갚아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가뭄이 심하다가 갑자기 비가 너무 많이 오시는 바람에 산에서 일하는 짝궁의 생산라인에 차질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잘 생기지도 못한 얼굴 마담만 하고 다녔다. 

 

그런데도 새언니는 나더러 몸살을 앓지 마라는 당부를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새언니 나는 몸살은 안할 자신이 있는디 마음살은 심하게 할 것이여."

그렇다. 나는 마음살을 너무나 많이 하며 사는 사람이다. 마음살을 하다가 하다가 안되면 무기력해져 버리고, 의욕을 상실하며, 그러다가 세상살이여 가라 가라 어서 가라. 죽자. 죽자. 날자여 어서 어서 넘어가라. 어서 죽어 이 세상에 분토도 남기지 말고 어서 어서 죽자.

 

그런데 단기간이었지만 새언니의 입원으로 오랜만에 큰오빠랑도 새언니랑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종교가 같고 신앙의 열정이 비슷하다는 것은 형제간의 간격도 그렇게 좁혀주고 있었다. 여행으로 경험하신 지구촌의 가톨릭과 이론으로 공부한 지구촌의 가톨릭은 심도있는 대화가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게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화재가 있다는 사실이 병실의 어색함을 녹여내고 있었다. 같은 형제이지만 인생의 몫이 달라도 너무나 달라버린 동생의 입장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큰오빠 곁을 떠나와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해버렸다. 그러니 궁핍한 환경만큼이나 내 자신도 옹졸 해졌을 것 같은 두려움에 선뜻 말을 뱉고 주워 담는데 나도 모르게 예민해져 있었다. 혹시 이 말이 걱정을 드리지나 않을까? 저 말은 부담을 드리지나 않을까? 없는 사람은 그대로 다 이골이 나서 방편을 찾아 잘 사는 법인데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은 아닐까?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었다. 그런데 나의 소심함은 하느님을 함께 믿는다는 데서 크게 염려함을 덜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착하디 착한 우리 새언니는 인심도 푸지시다.

"고모. 내년에 우리 성당에서 유럽성지순례팀 모집하는데 가자."

죽기 전에 로마는 한 번 가보고 죽을란다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새언니의 인심은 후하기도 하시다. 후후후후후후! 그동안 지우고 살은 신세도 못 갚아서 몸살이 아닌 마음살에 가슴살 꺼정 앓느라고 죽을지경인데 여행꺼정 신세를 져야한다면 무슨 염치로 나로 하여금 하늘에 고개를 들라하시는지.....!

 

지금도, 아니 나는 짝궁과 살아오면서 내가 짝궁보다 글을 많이 안다는 것을 후회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냥 짝궁에게 맞는 여자로 겨우 한글정도만 습득하여 건강한 육체에 단순한 정신으로다가 남편 따라서 투박하게 살아낼 여자였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머리속에 먹물이 너무 많이 들은데다가 육신은 건강하지 못하고, 이상은 또 얼마나 기고만장하였더란 말인가?! 그래도 하늘이 맺어주신 낭군이시니 나를 낮추고, 줄이고, 접어서, 살은다고 살아보지만 그것이 어데 서로에게 가볍기만 하겠는가?!

 

그래서 방편을 삼아서 사는 방법이 짝궁보다 잘난 사람은 무조건 돌같이 보기로 작심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단 한가지 예외가 있어야만 했다. 자식은 짝궁보다 나아야 한다는 조건! 그렇다면 나의 인생은 이중성의 잦대 안에서 그 척도를 잘 저울질하지 않으면 내가 받는 내 중압감에 정신이 돌을 지경일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은총이었을까? 잘 살아냈다. 그 이중성의 혼란에서 짝궁은 짝궁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서로를 포기하지 않으며 잘 살아냈다. 오늘도 나는 세상에서 딱 한 사람에게만 높아 보이면 된다.

 

내 자식에게만은 높아 보여야 한다. 그래서 자식도 높은 세상을 볼줄 알아야 한다. 그 이외의 누구에게라도 나는 내 짝궁보다 높아 보이는 것을 거부한다. 지금도 나는 내가 짝궁보다 먹물이 더 많다는 사실에 마음살을 하고 가슴살을 한다. 사람들과 어울려도 나는 늘 내 짝궁의 위치에서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 이상은 나에게 큰 가치도 별다른 의미도 없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 짝궁과 다른 선택의 정성을 부렸을지라도 나는 늘 짝궁에게 내 본질을 돌려놓고야 만다.

 

그렇다고 한들 내가 짝궁의 어린 유년의 궁핍함을 어찌 알아볼 것이며, 못 배운 한이 얼마나 답답한지를 몇 푼이나 실감할 것이며, 가뜩이나 부족한 밥그릇을 놓고 서로 할퀴는 가족사를 얼마나 아프게 느껴 볼 수 있겠는가?! 다만 동반의 여행을 하는 부부로서 그냥 빈 마음으로라도 함께 걸어가 주는 것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러다가도 문득 옆에서 걷는 그의 짐들을 바라보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함께 걷기만 할 뿐, 들어줄 수 없는 짐들 뿐이라서...... 들어주어 보았더니 금새 알아보고 더 무거운 짐들이 그의 어깨에 올라타고. 

 

내가 알아낸 것은 내가 짐을 들어 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짐들을 내려 놓으려고 할 때까지는 그냥 곁에서 함께 걸어만 주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함께 걸으면서도 그는 무거운 짐에 짓이겨져서 숨을 몰아쉬고, 나는 그런 짝궁을 바라보며 가슴이 짓이겨져서 숨을 몰아 쉰다. 그래도 출발은 했으니 가야만 한다. 그 끝이 보이지 않아도 가야만 한다. 그 짐들을 내려놓을 수 없는 짝궁과 동행하지 않겠다는 말을 절대로 할 수도 없지만 해서도 안된다. 그러니 그 동행길의 내 자신이 얼마나 얼마나 몸살 뿐만 아니라 마음살에 가슴살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내 새언니의 제안에 답을 하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짝궁의 능력이 아닌 여행길은 분에 넘치는 너무나 큰 사치이기 때문이다. 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방편들조차도 때로는 가책이 되어 눈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짝궁의 위치에서 큰오빠랑 새언니를 보면 하늘과 땅 차이 같지만 그래도 막내 동생은 하늘의 능력을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는 땅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않을 것이다. 아들이 대학을 가고나면 나는 짝궁을 따라서 산으로 갈 것이다. 그래서 단순하고 힘 좋은 시골여인이 되려고 한다.

 

그런데 새언니가 아팠으면 내가 새언니께 성의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퇴원길의 차 안에서 새언니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일련 번호가 쫘~악 일정한 지폐를 담아 주시느라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다 잘 사니까 그러지 말으시라고, 말으시라고, 해도..... 차라리 영수증이라도 써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불우 이웃 돕기! 자선! 뭐 이런 영수증이라도 써 드릴 수 있다면 세금이라도 좀 덜어드릴 수 있을텐데.... 나는 불우이웃도 아니고, 불쌍한 사람은 더욱 아니다. 가족들의 가슴에 허전하고 아픈 막내동생일 뿐!

 

그래서 돌아오는 길의 내 가슴은 앓고야 말았다. 찾아오신 손님들이 두고 가신 선물들을 똑 같이 반으로 나누어서 싸 주신 먹거리들 때문에도 가슴살을 앓아야 했고, 새언니의 배려에 미어지는 가슴살을 감당하지 못하느라고 앓아야 했고, 이렇듯이 내 친가의 가족들에게 아픈 가슴으로 밖에 못 살아내는 짝궁이 불쌍해서 또 가슴살이 심하게 아픈! 한편으로는 하늘의 뜻이 유년의 행복을 고스란히 나에게 연결지어 주셨다면 지금 나의 묵상글이 이런 모습으로 써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면서.

 

그동안 새언니랑 큰오빠가 건강하셔서 친정이라는 울타리를 송두리째 외면하고 나만 살아온 날들이었다. 그런데 새언니가 아프시니 그동안의 모질고 독한 나의 심성들이 후회이고, 부질없음을 어찌할 것인가? 그래도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 아무런 능력도 없다. 아무런 대책도 없다. 내가 갚아서 해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샤워하실 때 비누칠이라도 해 드리고 싶었는데 그놈의 발달된 의술 덕택에 혼자서 다 해버리시니 막내 시누이가 그것 마저도 갚을 길이 없어서..... 그렇다고 계속 가슴살만 앓을 것인가?

 

수술하신 새언니는 회복을 잘 하실 걱정이나 하시지 않고!

"고모. 가서 몸살 나지 말어."

"새언니. 나 몸살은 안났는데 가슴살이 나서 너무 아퍼!"

 

 

ㅡ내 멍애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오11,30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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