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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제16주일 말씀 미리 묵상해봅니다.--김정수대건안드레아신부님--
작성자유용승 쪽지 캡슐 작성일2005-07-16 조회수719 추천수2 반대(0) 신고

연중 제16주일                                                         05. 7. 17 주례성당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인류 역사 속에 죄와 회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반복과 인생사가 달라지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것을 바꾸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해방자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분으로서 내재된 어떤 도식을 깨신 하느님이십니다. “너희가 나를 잘못 알아도 그렇게 잘못 알고 있구나.” 하고 그분은 답답해 하실 것입니다.


오늘 연중 16주일의 독서인 지혜서, 로마서, 마태오 복음 말씀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핵심은 하나, 즉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드러나는 하느님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우리 삶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제1독서인 지혜서에서 우리는 지혜가 무엇이며 우리에게 지혜가 무엇을 주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혜는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지혜가 생명 창조에 접근하는 방법이 됩니다. 지혜는 세상사의 규범이나 법칙이 아니라 생명 윤리나 창조에 관한 세상 법에 대한 새로운 틀, 즉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말합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단순한 삶에서부터 어려운 인생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인생 문제를 만날 때 지혜라는 띠를 가지고 접근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고 배워서 현실적으로 이용하게 하는가 하는 실리적인 측면을 지닌 것이 지혜입니다. 따라서 계시된 진리의 빛과는 관계없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지혜는 하느님의 관용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아는 하느님이 아니라 철저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다만 사람들이 당신의 권능을 믿지 않을 때에만 당신의 힘을 드러내시고, 권능을 알고도 주님과 감히 맞서려는 자들을 응징하신다.”(지혜 12, 17)고 하십니다.

어떤 때 그 힘이 힘차게 작용하겠습니까? 각자의 종말에 심판을 받습니다. 인간이  살아 있을 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지혜를 주고 많은 것을 가르치셨는데 인간이 살아서 제대로 살지 못했다면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암암리에 들어가 있는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의 근본이 자비심과 관용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를 요구할 때 자비심과 관용으로 해야 하고, 우리가 베풀 때도 자비심과 관용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치시는 것이 지혜입니다.


제2독서의 로마서 말씀은 성령님이 중심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이며 기도 방법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어떻게 들어가야 하냐고 할 때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게 하려면 기도함으로써 기도를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이 가르쳐 주신 하느님의 기도이며 동시에 우리 인간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성령님의 움직임이 강하게 작용하신다는 것을 표현한 기도입니다. 그냥 주님의 기도가 아니라 성령님의 움직이심을 느낄 수 있는 기도문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님을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영의 존재에 대해서, 영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영의 존재의 필요성을 우리가 절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에 영을 부릅니다. 그 절실성은 인간의 부족함입니다. 필설로도 무엇으로도 부족한 이 인간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영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구체적인 기능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대신 간구하시는 것이 그분의 기능입니다.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삼위일체 도리는 이것이 바탕이 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이 보내시고 ‘파라클레토스’라고 하십니다(요한 14, 16). 진리의 영이며 협조자, 보호자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영은 어떤 보호, 협조를 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친절하게도 별난 것을 다 염두에 두시고 주셨습니다. 영적이란 것이 반드시 인간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려 주신 것이고 우리 인간 전체를 보고 판단하신 결과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설 수 있는 자 되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역할이 분명해졌습니다.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라지, 겨자씨, 누룩 비유의 특징은 그 당시 농민들의 자연스런 소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연 소재를 택해서 쉽게 한 가지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즉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단지 하나 예수님은 선인, 의인하시고 인간이나 교회는 죄인을 가려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려내지 않으시고 가려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종말에 칼을 드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 자유의지를 주셔서 인간을 내놓으실 때 그런 가름성을 주시지 않았는데 그것은 율법과 신약의 차이입니다. 율법에서 본 하느님과 예수님이 신약에서 가르치신 하느님과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그렇게 힐난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관념을 뒤짚어 엎어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판단하고 평가하는 권한을 자기들이 받은 것처럼 행사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권한의 수행자인 것처럼 사용하였습니다. 가려낼 권한은 인간에게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종합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비유 내용은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의 놀라움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능력을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비유 말씀에서 알기 쉽게 표현하셨습니다. 겨자씨가 작고 작지만 엄청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모습이지만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과 힘이 들어있으므로 우리는 그런 모습을 바르게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친절하게도 별난 것을 다 염두에 두시고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인간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설 수 있는 자 되게 하셨습니다. 또 하느님이 주신 지혜를 사용함으로써 자비하심과 관용의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하느님을 새롭게 우리가 이해하고 믿고 사랑하는 산다면 그분이 부르시는 날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가서 그분을 뵙는 은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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