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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73) 납량 특집 - 누구였을까?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7-22 조회수898 추천수7 반대(0) 신고

2005년7월22일 금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ㅡ아가3,1-4ㄱ;요한20,1-2.11-18ㅡ

 

     납량 특집 - 누구였을까?

                                    이순의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날도 내 곁에는 어린 아들만 있었다. 어두 컴컴한 반 지하실 단칸 셋방에서 밤에 시장에 가고 없는 짝궁을 잊고 어린 아들을 돌보느라고 그 마음과 사랑이 홀랑 빠져 있었다. 낮에 잠을자는 짝궁에 대한 배려로 아이를 대리고 종일 밖으로 돌아다니고 나면 저녁에는 중노동에 시달린 사람처럼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땀으로 끈적거리는 아들녀석을 씼기고, 저녁을 먹고, 짝궁은 나가고, 아이는 잠을 재우고, 그때서야 내 차례가 되어 샤워를 했다.

 

반지하의 밤은 공기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다. 습한 여름이면 낮에 상승기류를 탓던 오염물질들이 아래로 내려와 그 느낌 그대로 불쾌한 밤을 보낸다. 더구나 남편도 없이 겨우 자박자박 걸음을 걷는 아가를 데로고 젊은 여인이 청상의 과부처럼 매일 혼자 잠드는 방안을 내려다 볼까봐 유리창을 꼭꼭 잠그고 잠을 잤다. 그때는 정신이 없이 살아버린 것 같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육신의 통증은 그때도 아들을 키우는데 벅차게 느끼며 살아내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나는 여름이면 그 농도가 세서 너무나 아파한다. 그날도 종일의 고단함을 눕히고 쉽게 잠들지 못했었다. 불꺼진 컴컴한 반지하의 단 칸 셋방에 누워 잠이 들어보려고 얼마나 얼마나 힘들어 하고 있었다. 유리창이라도 좀 열었으면 좋으련만 내 옆에는 건장한 사내를 대신하여 어리디 어린 꽃잎 같은 아들만이 엄마를 믿고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위험한 선풍기는 돌리지도 못하고, 가끔 부채를 들고 자는 아들녀석의 땀을 식혀주느라고 뒤척거렸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하여 잠이 들었을까?

 

<아악!> 퍼퍽!

평생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는 엄청나게 큰! 단 한마디의 괴성에 심장이 멈추느라고 눈이 번쩍 떠졌다. 온 몸이 식은 땀으로 정지를 했다. 바로 우리 방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유리창 옆 통로에서 발생한 소리였다. 어른인 내가 신경이 멈추고 꼼짝을 못하는데.... 옆에서 세상 모르고 잠을 자던 어린 아들의 공포감도 동일했었나 보다. 숨을 못 쉬고 목구멍에서 뭐가 깔딱깔딱하는 느낌이 어둠 속의 여명으로 느껴졌다. 유리창에 분명히 사람의 변사체라도 있을 것 같은데..... 몸이 뻣뻣하게 식고 굳어서 일어나 앉지도 못하겠는데 그래도 에미니까 손을 뻗어 아들녀석을 만져보았다.

 

아들녀석도 나랑 똑같은 공포감에 어쩌지도 못하고 있었는지 엄마의 손이 뻗어 오자 울지도 못하고 그대로 굴러서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가슴에 얼굴을 묻고 숨만 깔딱거렸다. 그러니 그날 밤의? 아니 새벽의? 유리창 밖 사건은 상상만으로도 붉은 피가 흘러서 내 방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우선은 손가락 하나도 꼼짝을 못할 형편인데다 무서워서 도저히 전등을 켜겠다고 일어나 서기도 싫었다. 꽉 잠긴 유리창과 방문! 습한 지하실의 냄새! 아들녀석의 불덩어리 같은 체온과 가쁜 호흡! 길지도 않은 여름밤의 한 중간! 칠흙같은 어두움! 그리고 서릿발처럼 차게 느껴지는 네모 유리창!

 

당시는 휴대전화기도 없었고, 우리가 전화를 개인 소유한지도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렇다고 전화기의 단추를 눌러 연락할 곳도 생각이 나지 않았고, 그럴만한 여력을 동원할 힘도 없었다. 누구일까? 저 변사체의 주인은 누구이며, 누가 이렇게 고요하고 야심한 밤에 내 방의 유리창 앞에서 사람을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아니 왜 죽어야만 했을까? 앞방의 새댁도 나 처럼 잠이 깻을까? 저쪽방의 아가씨들은 유리창이 다른쪽으로 나서 못 들었을까? 아니 건너 옆집에 내 방이랑 마주하고 사는 성당형님은 이 소리를 못 들었을까? 들었다면 어른들이시니까 기척이 있을텐데....

 

울지도 못할 만큼 무서웠던 어린 아들녀석은 그래도 내 품에서 금방 잠이 들었다. 짝궁이 없는 그 무서운 공포의 밤은 품에 안긴 어린 아들이 의지였었다. 습하고 끈적거리는 땀이 엉겨서 그토록 기분 나쁜 밤이었지만 부채질도 하지 않고 동이 트는 걸 보았다. 붉은 피가 흥건하게 쏟아져 내 방 유리창으로 넘쳐 들어오는 흔적을 확인하게 될까 봐 눈을 돌려서 창을 바라보지는 못했어도 햇살은 깊은 반지하 방까지 어스름 하게 파고 들었다. 낮에도 어두운 방안이 그날처럼 환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여름의 아침은 참으로 길었다.

 

분명히 밖은 밝아진 것 같은데 아직도 사람들은 밤중이었다. 농촌이 아닌 도시의 아침은 태양을 따라서 기상하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서 기상을 한다. 첫번째로 유리창 밖 통로를 걸어서 출근할 사람은 내 방과 대각선으로 세들어 사는 정훈이 아빠였다. 그 사실이 크게 안심이 되었다. 정훈이 아빠는 남자이고, 혹시 변사체를 보게 되더라도 침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납량특집의 공포일기를.... 따르릉~~~ <아이구 깜짝이야. 큰언니 전화벨 소리에 글을 쓰다가 놀랬습니다. 후유~! 그 새벽도 아닌데 지금도 무섭네요. 히~!>

 

납량특집의 공포일기를 구상하느라고 새벽을 송두리째 소비한 탓이었는지 그만 깜박 잠이 들어버렸다. 정훈이 아빠의 출근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해가 중천에 떳을 시간에도 반지하의 단칸방은 어두 컴컴했다. 한 숨 자는 것으로 간밤의 공포를 잊어버린 아들녀석이 먼저 일어나 제 작은 변기에 앉는다. 아무일이 없었던 듯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하루의 일과를 열어 볼 심산이다. 유리창 밖은 조용했다. 다행히 내 방의 유리창 틈으로 붉은 변사체의 핏국은 덤쳐 흐르지 않은 게 확인 되었다. 어린 아이의 동작은 먹을 것을 달라고 아침이 분주해졌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축일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첫번째로 만나는 사람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를 택하신 것이다. 여러 논쟁들 중에 아들 예수의 부활에 왜 성모 마리아가 첫 사람이 되지 않았는가? 라고 묻는 경우가 있다. 아버지 하느님의 순직한 여종께서 일생을 아들 예수와 함께 하셨고, 성시를 거두어 묻기까지 항상 아들 예수님 곁에서 그림자 처럼 머물러 계시던 성모 마리아는 어디로 갔는가? 구원사업의 동반자 격인, 친히 부활하셔서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께서는 당연히 부활의 첫 모습을 어머니 마리아에게 확인시켜 드렸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선택하셨는가?

 

더구나 마리아가 행하였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의 표현들은 당시 남성 중심의 사고력으로 수용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아버지 하느님의 모상대로 닮은 모든 피조물에게 항상 평등하셨다. 장애자이건 세리이건, 창녀이건 베로니카이건, 죽은 나자로에서 부터 어린 아이들까지도,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유독 마리아 막달레나만이 늘 항상 언제나 성모 마리아의 곁에 머물렀고, 비싼 향유를 머리카락에 묻혀 주님의 발에 발라드리고,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고....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려는 빌미가 되는 여인이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심지어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이신 예수님의 아내였을 것이라는 주장들이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모순들 앞에서 그리스도교회는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의 흠없는 신성을 사수해야만 한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막달레나를 성인으로 추대하고 공경하며 성대한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오늘의 강론은 전한다. 신분의 격차가 심하고, 죄와 벌이 뚜렸하며, 남녀 차별이 구분지어진 시대에 은혜를 받은 미천한 신분의 한 여인이 주님께 받은 성은에 보답할 줄 알았다면.... 지금 나도 그 여인처럼 주님을 사랑하며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인가?!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으면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희생과 모략을 감수하면서 성서의 역사에 등장하고 있을 것인가? 우리가 만약 막달레나의 사랑만큼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큰 사랑의 실천이 될 것인가? 그러므로 언제나 누구에게나 똑 같은 사랑으로 풍성한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하루를 사랑으로 드릴때 큰 체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나와의 사랑의 관계가 어떤 것이며 나는 막달레나 처럼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덤안에 계셔야 할 주님께서 사라졌다고 줄행랑을 치며 달아날 것인지? "라뽀니!"라고 주님을 부를 수 있을 때 까지 무덤 곁에서 울고 있을 것인지? 그 사랑의 결과만이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실 것이다.

ㅡ예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께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뽀니!"하고 불렀다. (이 말은 '선생님' 이라는 뜻이다.)ㅡ

 

무서운 소름에 여름 아침의 더위조차 서늘하게 느껴지는데.... 유리창 밖은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예상대로 라면 누군가 죽어 있어야 하고, 사람들은 웅성거려야 한다. 아니면 잠이 든 사이에 이미 사건 수습이 끝났던가?! 아이의 조반을 먹이려고 주방에 서는데 앞방 새댁의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옆방 아가씨들의 소리도 섞여있었다. 문을 열었더니 새댁이 핀잔을 놓았다.

"그러고도 잠이 오세요? 무서워서 한 잠도 못자고 아침만 기다렸구먼! 늦잠까지 주무시고... 사람이 둔하신 거예요? 잠을 잘 자시는거예요?"

 

결론은 그러했다.

옆방 아가씨들의 오빠가 근처에서 사는데 조카녀석이 고모한테 간다고 졸랐었나 보다. 밤이 늦어서 말렸지만 여름밤의 열대야를 이기지 못하고 용감한 자객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과 달리 그 시절에는 골목에 나무도 많았고 어두웠다. 그래도 골목을 돌아서 우리집 까지 오기는 왔나보다. 어린 소년이 막상 어두운 반지하의 좁은 통로를 들어서려니까 유령의 성에 홀로 찾아든 듯이 공포가 엄습한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고양이였는지 모르지만 불구슬 두개가 굴러가는 바람에 안쪽에 기거하는 제 고모들 방에까지는 가 보지도 못하고, 내 방의 유리창 앞에서 마치 살인 사건의 주인공처럼 겁에 질려 소리를 질러 버렸고, 그 괴성이 얼마나 크고 단음절이었으며 소름이 끼치는 순간이었는지 모두들 심장을 붙들고 아침을 기다렸던 것이다.

 

히~! 납량특집이었습니다. 막달레나도 빈 무덤 앞에서 예수님만 생각하느라고 꼭 무섭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묘지! 계속 지키고 있었던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이 없어진 묘지! 아이구 무시라....! 나는 죽었다 깨나도 거기서 못 있을 것이여! 그런 저는 막달레나 보다 주님을 확실허게 덜 사랑허나요??? 그럼 워찌께든지 그 무덤앞에 있어야 허는디..... 우짜노? 아이고 무시라!  

 

ㅡ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요한20,1-2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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