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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제초제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5-07-24 조회수776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독서: 출애 24,3-8 복음: 마태 13,24-30 똑같은 일상인데 어느 땐, 왠지 마음이 허전하고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다. 사는게 시시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다 시들해질 때가 있다.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보면, 나의 경우는. 반드시 하느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음을 발견한다. 그런데 하느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인간 관계에서의 떳떳지 못한 일로 하느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 때 즉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라는 것인가. 아무튼 특히 잘못된 일인줄 알면서도 그 일을 계속 하고 있을 때. 내 마음 안에는 대립되는 두 마음이 들어 있고, 그것의 싸움을 지켜보는 또하나의 心眼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식한다. 헤겔이 말하는 '포괄적 의식'이 바로 이런 것인지. 그는 인간 누구나 이 세가지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대립되는 마음의 한 쪽이 옳다면 한 쪽은 그르고, 한 쪽이 선하다면 한 쪽은 악하다. 한 쪽이 거룩하면 한 쪽은 속되고, 한 쪽이 아름다우면 한 쪽은 추하다. 우리는 흔히 선하고, 옳고, 아름답고, 거룩한 쪽만 남기고 나머지는 우리 마음 안에서 깡그리 없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으로 추정되는 밀밭의 주인은 밀과 가라지가 그냥 공존하도록 내버려두라고 말씀하신다. 왜일까? 한 쪽을 파내버리면 둘은 함께 죽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한 쪽을 깡그리 파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한 쪽을 지나치게 의식하면서 그것을 없애려 애쓰다가는 한쪽마저도 균형을 잃고 비틀려버리기 때문은 아닐까? 바로 "최고의 정의는 최고의 불의다!" 라는 라틴어 속담 처럼. 그래서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까지 다칠지도 모른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자! 그렇다면, 우리 마음 안에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가라지같은 마음을 어찌하면 좋을까? 추수 때까지, 즉 주님의 심판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가 가라지가 무성한 채로, 주님을 맞이할까? 다시 헤겔로 돌아가서 이 두 마음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는 제3의 의식이 우리에게 있음을 주목한다. 그 의식이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주인의 의식, 하느님의 의식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우리의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하느님의 눈으로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길 잃을 염려가 없다. 자신의 상태가 왜 이리 답답한지, 허전한지. 인간과의 관계에서, 또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찬찬히 점검해보고 되돌아올테니까. 또 자라고 또 자라는 가라지. 일생을 우리 마음 밭에서 밀과 함께 자랄 가라지. 그 출처가 어디인지 알아볼 필요도 없다. 수없는 곡절과 사연을 가졌을 그 원인들을, 복음에서처럼 우리도 "원수"라는 이름으로 제한시켜두자. 그 출처를 따지기보다는 가라지에 뿌릴 제초제를 심심할 때마다 뿌려두어야한다. 그 제초제란, 오늘 독서에서 보여주듯, 하느님과의 계약을 갱신하는 것이다. 피를 뿌리는 예식으로 계약을 체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시로 계약을 갱신하며 마음을 쇄신시켰다. 우리에게도 예수의 피로 맺은 계약이 있다. 느슨해질 때마다, 시들해질 때마다 계약을 갱신해보자. 주님과의 첫사랑, 그 감격의 기억으로 자주 자주 되돌아가는 것. 그것만이 가라지의 독성을 제거할 해독제며 그 뿌리마저도 사라지게 할 제초제인 것이다. 얼마 전에 받은 교육에서 바로 나 자신. 주님과의 계약을 갱신하고 새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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