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Noblesse Oblige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5-08-04 조회수972 추천수11 반대(0) 신고

    Noblesse Oblige 연중 제 18주간 목요일 말씀(민수 20,1-13 ; 마태 19,13-23) 그토록 어여삐 여기시던 모세를 꾸중하셨다. 얼마나 노여우셨으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실까. 모세는 뼈빠지게 고생만 하고 죽 쒀서 남 준 꼴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지상 교회의 기초로 인준해주셨던 베드로를 잠시 후에는 '사탄'이라는 최대의 욕을 얻어먹는다. 이들은 얼마나 큰 잘못을 했기에 이런 꼴을 당했나?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실제 이유는, 한 세대가 다 지나가도록(40년) 사막에서 떠돌아야 했을만큼 가나안 진입이 쉽지 않았다는 역사적 상황이 있었다. 그러나 복잡한 시대적 배경이 무엇이든간에 성서 저자들은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가 어째서 약속의 땅을 밟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후대의 백성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백성들은 여느 때처럼 물이 없다고 불평을 하며 덤벼들고 모세와 아론은 주님께 대답을 듣고자 장막 앞으로 나갔다. 주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바위를 치라는 간단한 명령을 내리셨다. (주님의 명령은 늘 이렇게 너무나 간단하고 어이없는 명령이다. 바위를 지팡이로 치라든지.. 지팡이로 바다를 치라든지...^^) 모세와 아론은 밖으로 나가 "반역자들아, 들어라. 이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해주랴?" 하며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쾅쾅 쳤다. 물은 어김없이 콸콸 터져 나오고 백성은 그 물을 마셨다. 그 다음이 문제다. 주님은 갑작스럽게 모세에게 꾸중을 내리신다. 백성에게 화를 냈다고 그러셨을까? 모세가 보통 때보다 조금 과격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화를 낸 적도 있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즐거워하던 백성을 보았을 때는 증거판을 깨뜨리고 금송아지를 가루로 내어서 백성에게 마시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까지 했다. (출애 32장) 거의 정신이 나가고 눈이 뒤집혀버린 것같은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때와 지금..... 가만보면 확연히 차이나는 것이 있다. 그 땐 주님이 먼저 화가 나셨다. 모세는 백성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는 주님을 간신히 진정시켜드리고 내려왔었다. 말하자면, 모세의 분노는 주님의 의노를 대신 전해준 대변인의 모습이었다. 예언자란 주님의 대변인이다. 그때의 모세는 중개자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인간의 생리적인 욕구를 기꺼이 채워주시려고 하신 주님의 의사와 무관하게 모세와 아론은 그동안 쌓인 개인적인 분풀이를 한 꼴이 되었다. 사실 므리바 샘에 대한 이야기는 본디 출애 17,1-7에도 있으나 야훼계+엘로힘계 전승은 광야생활 초기에 배치하고 사제계 전승은 후기에 배치했다. 중복된 전승들 중 하나를 빼도 될텐데 최종편집자는 그러지 않는다.
    모두 거룩한 전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에는 마치 두번, 세번 같은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일이 많다.
            우리는 그냥 그런 걸 따지지 말고, 이런 사건이 모세의 후기에 또 있었다고 보자.
            (이렇게 실제로 여러번 있었다고 보면서, 그것의 의미를 밝히는 연구도 있다) 아무튼 최종 편집자는 세월이 흘러 미리암과 아론도 죽고 모세 역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하느님을 대신하여 백성을 이끌 지도자(왕, 사제, 예언자)는 일반 백성보다 더 많은 책임과 의무를 갖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의도를 그대로 전해야 하며, 제멋대로 하느님께 반(反)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백성들을 위해 언제라도 기도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 비록 그들이 쉽게 변절하고 어리석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하여도. 오늘 복음의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시려는 주님의 의도를 가로막고 나서는 것은 언뜻 보면 인간적인 사랑이 가득한 것 같으나, 주님의 길을 막는 것이 바로 사탄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닌가. 결국 하느님의 종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제자의 길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이 일반 사람들이라면 그런 혹독한 질책과 처벌을 받진 않았을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은 그 지위에 걸맞는 도덕적 의무를 더 많이 짊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들의 권력, 재산, 학식, 위상만 높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부과된 도덕적 기준 또한 일반인보다 높아야 한다는 말이다. 비록 소수의 계층이지만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사회를 건강하게 존속시키는 것은 법이 아니라 도덕이라는 사실과 물적 토대가 아닌 정신적 토대 위에서 사회는 올바로 성장하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민수기의 저자는 이제부터 들어갈 가나안 땅의 초입 카데스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을 대신해서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더 큰 기준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나보다. 교회를 이끌어가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도록 주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며 그분의 뜻에 반하지 않도록 매사 조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인가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정치, 사회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실현되어야 할 가치인가 보다.
                        사진: 프랑스 동부의 아름다운 롱샹 성당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