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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람의 아들'과 '하느님의 아들'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5-08-06 조회수879 추천수9 반대(0) 신고
    독서: 다니 7,9-10.13-14 <또는 2베드 1,16-19> 복음: 마태 17,1-9 오늘 독서에서는 "사람 모습을 한 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바로 이 대목에서 "사람의 아들"(人子)이라는 예수님의 호칭이 유래되었다. '사람의 아들'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어떤 뜻인가? 지난 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는 시간이었다. 인간 예수가 어떻게 하느님이시라고 설명을 할 것인가? 교탁에 서 있을 때까지도 뭐라 해야좋을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분명히 지난 번에도, 지지난 번에도, 잘 설명을 했었는데... 그리고 교안에 뭔가 써있긴 한데... 그것이 다 남이 써놓은 것인양 눈에 들어오지 않고 생경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성령의 도우심을 청해야 한다. 먼저 인간 예수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납득시킬 자신이 없다고 솔직히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세계 4대 종교의 창시자들의 인간적 모습만 간략히 비교하여 보자고 하였다. 석가모니, 깨달음을 통해 부처(覺者)가 되었다. 그분은 자신이 깨달은 바를 수십년동안 가르치다가 수(壽)를 다해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신 분이다. 인생은 고해라는 불교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모습은 평온, 그 자체이다. 온갖 고통이 마음에서 비롯되나, 그분은 이미 그것을 초탈한 분이시기에 그런 평정한 모습으로 항상 그려진다. 공자님. 그분은 현실의 도덕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세상에 진출하려했으나 아무도 그분을 써주지 않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그분은 시골로 내려가 조용히 제자들을 기르며 인간의 도리와 이상적인 사회를 가르치다가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셨다. 마호멧. 평범한 청년이던 그는 돈 많은 과부를 만나, 일생을 편안하게 살다가 어느 날, 신의 계시를 받고 인생이 바뀌었다. 일생 열번의 계시를 받았다는데 그 주된 내용은 평화였다고 한다.
    그자신도 열명이 넘는 부인들과 평화롭게 살다가 명이 다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예수님을 위대한 예언자로 여기므로. 이들까지 합쳐 세계 종교인의 반 이상이 예수를 위대한 인간으로 여기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떠한가? 그분은 불과 3년 남짓, 사람들을 가르치다가 젊은 나이에 험악한 꼴로 돌아가셨다. 그분의 처형 장소엔 제자들마저 다 도망가고 없었다. 그분은 항상 십자가에 매달린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저 분이 어떻게 하느님인가? 인간적인 면모로는 다른 분들과 비교가 안될만큼 초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역사의 검증을 거치고도 아직까지. 세계 인구의 반이상이 이분의 영향력 밑에 놓여있다. 단순히 위대한 성인의 한 분이 아니라, 그 오랜 세월, 그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며, "하느님", "주님"으로 고백하며 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사람의 아들'이 어째서 '하느님의 아들'이 되셨을까? 언제부터 이런 믿음이 생겨났을까? 예수가 처참하게 처형당하던 그 때에는, 아무도, 제자들마저도 그런 줄 몰랐다. 부활하신 그분을 만난 체험이 있고서야 조금씩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한 두 번의 발현이 아니라, 한 두 사람에게의 발현이 아니라, 40일('충분할 정도로, 많이'란 뜻)을 발현해주셨어야 제자들은 확신이 들었다. 즉 제자들이 한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을 가질 때까지 '충분히' 나타나주셨다는 말이다. 그 확신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때, 그분은 본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셨다. 그분의 본래 자리는 하늘(하느님)이었기에 그것을 '승천'이라 한다. 로켓이 발사되듯, 구름 위로 쑤융~ 올라간 것을 '승천'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육안으로 보이는 존재양식으로 지상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그리고 당신이 올라가심으로써 협조자 성령을 보내신다는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서, 참 하느님의 자리로 올라가셨다는 의미에서의 '승천'이다. (이런 의미에서 '승천'은 '부활'의 또다른 이름이다) 확고한 신념이 생겼는데도 제자들은 세상에 나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마음은 굴뚝 같은데, 인간적으론 예수를 처형했던 그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랬다. 오직 함께 모여 기도만 하고 있던 어느 날(열흘 후), 약속대로 성령이 오셔서야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예수님과 살았던 3년 동안이 무슨 의미였는지 확실하게 깨닫고 나서, 그리고 사나이 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진리가 ,
    인생을 구하고, 세상을 구할 구세주의 도리가, 그분의 가르침 속에 있었다는 것을 확고하게 알고 나서야,
    드디어 그분이 "그리스도"요, "주님"이요, "하느님"이심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사람의 아들인 예수,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하느님이라는 神性의 표현)이라고 고백하게 된 경위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에서 창조된 신화가 아니라 바로 부활의 체험을 통하여 깨닫게 된 신앙고백이다. (여기까지 차차 풀어나가는 동안, 점점 열기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어쩌다가 인간이 되셨는가? 또 왜 하필 하느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셔야 했는가? 이상하게도 샤마니즘이든, 고등종교든, 모든 종교는 고대로부터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식(祭式)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돼지 머리, 염소나 양새끼, 소나 말, 어떤 동물을 바치든... 최상품으로 바친다. 곡식도 최고로 좋은 것을 바치는데 이것은 자기 소유의 최고의 것을 희생한다는 의미다. 하다못해, 젯상에 올리는 과일도 위 아래를 깎아 바친다. 한마디로 제 살을 깎듯, 무언가를 희생해야 최고의 흠숭 행위가 된다는 말이다. 언제부터, 왜 인간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인간의 이런 보편적인 심성을 그대로 받아들이신 하느님이. 인간에게 거꾸로 당신의 최고의 사랑을 표현해보이신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사람에게 있어 최고의 희생은 바로 자기 자식의 희생. 하느님도 당신의 외아들을 인간에게 바치셨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시려고. 당신의 외아들을 인간에게 제물로 바치셨다.
    인간이 하느님께 하던 최고의 행위를, 하느님이 인간에게 하셨다는 것. 그렇게 당신 자신을 바쳐 사랑한 인간이 바로 여러분이라는 것. 믿어지시는가? 여태까지는 어떤 식으로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인식하고 살아왔는지 모르나,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는, 여러분이 바로 그런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잠시도 잊지말고 살아가라고 그분은 오늘도 십자가에 매어달려 계시는 것이다.
          .......
          우리 기존의 신앙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이젠 진부하기까지한 이 교리를, 숨죽이며 듣고 있는 예비자들. 눈시울이 붉어지는 분들도 계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된 경위. 사람의 아들이 실은 하느님의 아들인 경위를 들려주면서, 성령께서 함께 계시며 이끌어주고 계심을 절절히 느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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