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9주간 목요일 말씀(여호3,7-10.11.13-17: 마태 18,21-19,1)
오늘 독서에서 요르단 강을 건너가는 이야기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를 연상시킨다.
이집트 군마가 쫓아오던 그 때보다는
긴박감이 덜하고 스케일이 적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홍해에선 허둥지둥 도망치며 건넜던 것에 비해,
요르단 강에서는 사제들이 궤약 궤를 메고,
그 뒤를 따라 백성들이 질서정연하게 건너고 있다는 것에서
일련의 제의식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초를 다투는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모세에게 놀라운 구원 업적을 이루어주셨던 하느님께서
여호수아에게도 변함없는 구원 의지를 보여주신다는 것.
우리 인생에서도 강을 건너야 할 때가 있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강은 인간에게 있어 생명의 젖줄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생의 진로를 방해하는 장벽이 되기도 한다.
내 인생에 있어서도 그랬다.
하느님의 진가를 체험하게 해준 큰 강, 홍해.
그보다 작고 무수했던,요르단강.
커다란 시련의 강을 건넜다고, 작은 강들이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작은 강은 작은 강 나름대로,
여울은 그만큼의 또다른 어려움으로
매번 우리에게 다가온다.
다만 처음처럼 그렇게 놀라 허둥대지 않는다뿐이다.
그렇다.
오늘 여호수아가 계약 궤를 둘러맨 사제들을 앞세우고 천천히 강을 건너듯,
홍해처럼 큰 시련의 바다를 한번 건너본 사람들은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그 뒤를 따라
침착하게 작은 물줄기들을 건널 뿐이다.
산과 강이 많은 곳이 경치가 빼어나듯,
우리 인생의 풍광 역시 다양한 크기와 깊이의 산과 강이 있어야 아름다울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러한 산과 강을 넘어서는 데 가장 필요했던 것은
주님께 대한 신뢰 외에 무엇이 더 절실했던가?
그럼에도 그 당장에는
'왜 내게 이런 일이..’,
'고통과 장벽은 왜 이렇게 많냐’,
'기껏해야 이걸 주려고 이 고생을 시키냐’
....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또 가나안 땅에서 외치던 그 불평 불만들을
나는 그분께, 또 주변 사람에게 외치고 외쳤었다!
무사히 그 많은 산과 강을 건너고 나서도,
한편에선 내 힘으로 살아왔다며 은근히 목에 힘줄을 돋우었다!
뒤돌아보면, 은총이 태산같은데도 그것이 나 혼자 이룬 것인양, 매번 공적을 도둑질했다.
오늘 복음에서 산더미같은 빚을 탕감해준 왕은 말할 것도 없이 그분이시고,
한푼도 갚지 않고 전액을 탕감받은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나다. 복음에서, 그 많은 강을 건네주신 주님이 내게 말하는 골자는 바로 이거다!
"그 많은 빚을 탕감받고서도
동료 인간의 허물 하나를 용서해주지 못한단 말이냐?
일곱번이 많다고 생각하느냐? 일곱 번씩 일흔 일곱번인들,
그것으로 네가 내 빚을 갚을 수 있겠는가?"
"이제라도 내게 갚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네게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용서하고, 그에게 대신 갚으라!"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라는 청원을 겸손되이 드리라!"
Music : 라벨 /물의희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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