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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77) 참으로 긴 여름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8-19 조회수1,004 추천수10 반대(0) 신고

2005년8월19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성 요한 에우데스 사제 기념 ㅡ룻기1,1.3-6.14ㄴ-16.22;마태오22,34-40ㅡ

 

        참으로 긴 여름

                             이순의

 

 

유난히도 더운 여름을 잠재우시는 장대비가 간밤에 쏟아졌습니다. 이 비로 인하여 더위는 한 풀 꺽일 것이고, 지친 만물의 육신은 좀 곧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고 보면 더운 나라에서만 사는 사람들이나 추운 나라에서만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의구심에 사시사철을 다 갖고 살아가는 축복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또 하느님의 자비하신 창조는 그분들도 전혀 덥기만 해서 불편하다거나 춥기만 해서 싫은 삶을 부여하지 않고, 그대로 행복하라고 마련하셨습니다.

 

차를 잘 가져가지 않는데 오늘 미사 참례에 차를 가져갔다가 미사가 끝나고 꼼작없이 주차장에 갖히고 말았습니다. 혼자서 특별히 집에 할 일도 없고 하여 내 앞에 주차하신 분께서 나오실 때 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청력이 나빠서 듣기를 힘들어하는 제가 정말로 오랜만에, 새언니 차가 내 차가 된 뒤로 처음으로 라디오를 켰습니다. 그리고 체널을 평화방송으로 맞추고...... '하느님의 목적은 지지고 볶여서 인생을 살으라고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만백성 모두가 행복하라고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어느 신부님의 말씀이 첫 소식으로 흘러 나왔습니다.

 

사실 저는 어제 오늘 상당히 불행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극단적인 해결책을 생각하는 대죄를 범하느라고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을 삭혀 내느라고 제 자신을 달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차장에 세워진 내 차 안에서 신부님은 은밀한 말씀으로 저를 달래고 계십니다. 제가 행복하라고 저를 지으셨다는....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행복한가를! 그런데요. 분명히 행복이 있기는 있었는데요.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많은 불행을 격어왔고, 격고있고, 격어야 하는거드라구요.

 

그 결과로 행복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물론 신부님의 속삭임처럼 내가 행복해지는 것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배려이지만, 사람은 그 행복을 지켜가기 위해서 많은 불행 또한 격어야 하는 거드라구요. 저는 어제 오늘, 질긴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제가 그렇게 어리섞게 인정되드라구요. 이러고도 사람이 살아야 하는가? 사람이 어느만큼 악해지고, 사람이 어느만큼 어리섞어야하며, 사람이 어느만큼 인내를 해야하는가? 사람이 왜 사는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다고 하늘이 가려지는가? 제 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서 하늘은 자기를 보지 못한다고 외치는 치졸함을 어떻게 용서하고 무슨 방법으로 깨우쳐 줄 것인가? 

 

살아도 살아도 대책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육신의 세상을 끝으로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어질 것 같은! 올해 여름은 잔인했습니다. 그래도 나 아직 살아있다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짝궁은 올해 여름에도 저를 배신했습니다. 저를 속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 아나봅니다. 또 부부는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아서 철석 같이 믿고 사는 게 또 아녀자의 삶이지요. 봄에 짝궁이 산에 가면서 흘리고 간 말이 있습니다. "올해 소출은 재수가 없을지도 몰라." 얼마나 소름끼치는 예감인지 모릅니다. 짝궁이 하는 농사 일은 하느님과 동업을 합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저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저의 노력과 정성과 다르게 또 어머니와 동생들의 만행 앞에서 사단이 났고, 먼 길을 떠나는 짝궁은 불길한 예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적중을 했고! 그래도 사람이 죽을 수는 없어서 참고 기다려 줘야 하는게 배우자의 본분이며 도리지요. 먼데서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해서도 의심하거나 심기를 어지럽힐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당부에 당부를 거듭거듭 했지요. 자식들이 장성하므로 이제는 더 이상 유야무야 하면 안된다고, 우리 자식들이 커서 불상사가 발생하면 안된다고, 정말로 다짐에 다짐을 받고 또 받고.....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시조카가 큰엄마에게 그여자라고 했을 때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내 자식은 엄마를 따라다니면서 삼촌들의 그 많은 만행들을 목격을 하더라도 단 한 번도 대꾸를 하거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불쾌한 감정을 섞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시동생들과 얽혀 사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한다고 알렸습니다. 동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꿈을 꾸었습니다. 너무도 생생한 짝궁과 시동생의 합작된 모습을 꿈으로 보았습니다. 결코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밤에 시장에를 가 보았습니다. 상식이 통해야 말을 하고...... 두 달째 나를 속여 왔기 때문에 꿈은 생시처럼 분명한 현상을 보여준 것입니다. 저는 그 꿈의 현실이 마귀의 장난인지 아니면 성령의 노여움인지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모든 순간을 관장하시는 섭리에 의존하여 행하기로 결심을 하고.

 

그런데 문제는 짝궁도 시동생도 다 알고 묻는 사실에 대하여 끝까지 손바닥을 내밀어 하늘을 가리듯이 제 눈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서는 이렇고 후는 이렇고! 양해를 구하거나 사실대로 밝히고 명명백백히 드러내면 될 것을! 무엇을 꼼쳐먹자는 의미인지? 아니면 무엇이 구린게 있는지? 계속 숨기기에 급급한! 나는 다시 악종이 됩니다. 세상의 더러운 욕설과 독성을 동원하기에 이르는! 다른 때는 술처먹고 전화도 잘하는 인간인 시동생도 형과 공모하여 숨길 것이 있을 때는 술도 안처먹고 전화도 안합니다. 봄에 서울을 떠나던 날에 짝궁의 예견이 맞아서 너무나 힘든 여름을 보냈듯이, 제가 예견한 자식들의 개입이 있기 전에 냉정해야 한다고 짝궁에게 일러준 말도 올해 여름에 맞아버렸습니다.

 

저는 제 아들이 잘 참고, 잘 삭히고, 잘 바라볼 줄 아는 아이라서, 유치원도 안간 시동생의 아이들이 돈을 보며 "큰아빠네 돈 주지 말아요." 했다는 말과 큰엄마를 그여자라고 표현해 버린 엄청난 경험이 두려워서 짝궁에게 분명한 선을 요구했었습니다. 제 자식에 비하면 참으로 어린 나이에 그 아이들은 밝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속고 속이는 짝궁과 시동생에게 설전의 혈투를 벌이는 엄마의 전화기를 뺏어서 어른들의 싸움에 끼어든 것은 다 자란 제 아들이었습니다. 19년동안 그렇게 험한 꼴들을 목격하고도 단 한 번도 나서지 않았던 내 자식이 작은아빠에게 욕설을 퍼 부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참으로 비극입니다.

 

저는 꿈에도 제 아들에게서 이런 불미스러운 비극이 발생할 줄을 몰랐습니다. 너무도 어린나이에 너무도 밝아진 그 아이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자식이란 사실의 정황과 달리 제 부모의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영업에서 거래한 돈은 아빠것도 큰 아빠 것도 아닌 농민의 것이라는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의 시각은 맨날맨날 모든 돈은 큰아빠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이 싫었던 것이지요. 그런저런 정황으로 보아 제 자식보다는 이른 나이에 참으로 아이들이 밝아있었고, 그 아이들이 크면 무엇을 더 험한 꼴을 보아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짝궁에게 이제는 각자인생을 살자고 제발 각자 인생을 살자고 목을 맸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짝궁은 그 약속을 어겼고, 제 자식은 그 지겨운 목격들에 대한 분노를 토하고야 말았습니다. 기운센 열아홉 사내아이의 격분은 어떻게 다스려지는 것이 아닌 순간의 것이고.... 남자들은 그렇습니다. 사건을 저질러놓고 할말이 없으면 모든 통신 수단과 통로를 차단해 버리는! 대화자체를 하지 않고 잘라버리는! 그래서 상대로 하여금 더욱 분노하게 하고, 더 악질적으로 유도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악심을 품어본 제 자식은 제 풀에 쓰러져 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개학 날인데 학교도 자퇴하고 싶으고, 만사를 뿌리치고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하는 말이....

 

"엄마. 악을 낸다는 것은 사람의 진을 다 뽑아서 짜 비트는 건데 그 많은 해를 어떻게 살았어요? 차라리 나를 유산을 시키고 훠이 날아서 가시지 뭐하러 저에게 아비를 만들어 주고, 목숨을 주셨어요? 차라리 태아일 때 죽었으면 저는 천국이 직행이었을 것이고, 엄마는 살아내느라고 이렇게 모진 모습들을 저에게 보이고 가르치는 죄는 면했을 것 아니예요?"

 

그리고 자식이 오늘 개학을 해서 학교에 갔습니다. 이렇게 큰 대죄를 짓고도 아비라고 어미라고 살아있습니다. 그 자식 때문에라도 살아야 한다고 핑계에 핑계를 삼고 목숨부지하며 또 악날하고 혹독한 싸움을 걸며 살고있습니다. 오늘 성당의 주차장에서 차 안에 누워 듣는 신부님의 말씀은 하느님은 저에게 무조건적인 행복을 보장하셨다고 하십니다. 저는 여름이 불행했습니다. 짝궁의 일이 잘 되지 않아서 불행했고, 쓸돈이 부족해서 또 불행했고, 아들이 치르고 있는 마의 고3 여름방학이 힘들어서 불행했고, 인정에 둔한 제 형을 앞세워 형수의 눈을 가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시동생 때문에 불행했고, 맹세에 맹세를 거듭한 짝궁이 나를 배신해서 불행했는데.... 급기야 자식의 가슴에 독기를 담아버리는 여름이 되고 말았으니 살기가 싫습니다.

 

제가 악녀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는 심장 속의 작은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찾으려고 앉아 성찰하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 집의 주인께서 폐지를 쌓아놓는 어머니 때문에 입주자들의 항의가 이어진다는! 마치 산불이 난 현장에서 마을 주민들이 양동이로 물을 나르며 겨우 불씨를 잡으려는 순간에 물을 뿌리려고 온 줄 알았던 헬리콥터가 날아와 휘발유를 하~ㄱ 뿌리고 달아나 버리는! 정말로 돌아버리겠습니다.

 

저는 지금 제 아까운 자식의 하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내 자식의 가슴에 독은 어제 갑자기 박힌 독이 아닐 것입니다. 그 독이 쌓이는 통증을 감당해 온 세월의 흔적이 열 아홉 소년이 되어 두서도 없는 기운만 앞섰을 것입니다. 정말로 짝궁은 언제쯤이나 제 말을 들어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속 마음을 저와 상의하지도 않습니다. 여자의 직감으로 듣고 싶다고, 들어주마고, 듣겠노라고, 아무리 애걸하여도 오늘도 짝궁은 제 손바닥으로 제 가슴의 눈만 가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놓아야 해방의 날이 올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살아도 결코 인생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체험하고 배우고 있습니다. 두 번 다시 제 자식의 가슴에서 독이 쏟아지는 일이 벌어진다면 저는 제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을 배반하고 혼인 성사의 은총을 깰 것입니다.

 

저는 다짐했습니다. 제 자식에게 독심을 남겨주는 어미가 되려고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짝궁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자식 인생의 각복함에서 짊어지는 운명이야 제 몫이라지만 짝궁의 우유부단한 운명으로 인하여 자식이 독심을 품어야하는 일이라면 저는 이제 제 자신의 날개를 찾아 날아갈 것이며, 자식도 제 운명대로 살게 나가라 할 것입니다. 열아홉 살까지 이렇게 각복한 현실을 참으며 키워주었으므로 어미인 제 능력은 다한 것 같습니다. 제 능력은 여기까지 뿐이겠지요. 자식은 자식대로 자식의 운명을 살아 가야지요. 제가 살아보았더니 부자집의 병약한 귀염둥이 막내였던 제 운명도 이것 뿐인 것은 하늘이 주신 몫이 이것뿐이었을 것입니다. 제 자식에게도 제 몫이 있을 것이고......

 

유난히도 더운 여름을 잠재우시는 장대비가 간밤에 쏟아졌습니다. 이 비로 인하여 더위는 한 풀 꺽일 것이고, 지친 만물의 육신은 좀 곧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고 보면 더운 나라에서만 사는 사람들이나 추운 나라에서만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의구심에 사시사철을 다 갖고 살아가는 축복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또 하느님의 자비하신 창조는 그분들도 전혀 덥기만 해서 불편하다거나 춥기만 해서 싫은 삶을 부여하지 않고, 또 그대로 행복하라고 마련하셨더랍니다.

 

ㅡ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마태오22,37ㄴ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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