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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79) 선녀는 아이가 셋이나 되었어도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8-24 조회수919 추천수7 반대(0) 신고

2005년8월24일 수요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ㅡ요한 묵시록21,9ㄴ-14;요한1,45-51ㅡ

 

 

        선녀는 아이가 셋이나 되었어도

                                            이순의

 

 

나뭇꾼과 선녀에서 보면 그 부부도 참으로 기이한 인연임에는 분명하다. 심성 빼고는 쓸것이 없는 나뭇꾼의 신세와 하늘의 천황의 딸인 선녀의 혼인이 어디 될성 싶은 짝이든가? 그래도 짝이 되었다. 나뭇꾼의 이기심 때문에 짝이 된 것이다. 선녀옷을 훔쳐 놓은 이유 하나로 하늘의 공주가 오물통 천지인 이 땅에서 산다는 것은 너무나 큰 형벌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혼인이라고 하였으니 또 자식도 낳고..... 

 

나는 짝궁네 영등포 그 단 칸 쪽방을 다녀와서 친정 엄마한테 분명히 말씀 드렸다. 그 집에로 시집을 가면 내 일생동안 눈물을 흐르게 될 것이라고. 친정 엄마는 아버님께서 남겨주신 유업이 작은 오빠로 인해 기울기 시작하면서 마음을 두지 못했었다. 어머니도 남은 자식인 나 하나로 인해 이승의 고락을 해결짓지 못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장애자에게도 봉사 하던 네가 육신이 멀쩡한 사람에게 봉사한다고 살아라.> 그 한 마디에 어머니께 효도하자고 종업원이 셋에 사장이라고 속인 사기꾼에게 시집을 온 것이다.

 

어쨋든 시집 온 첫날에 시댁에서 받은 밥상에 깍두기에 밥 두 그릇이었다. 다른 반찬이 두 가지 정도 더 있었는데 기억도 나지를 않고, 아마도 콩나물 무침도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짝궁이 <콩나물 500원어치도 못 사것습디어? 잔칫날 쓰고 남은 홍어도 없소?>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그때 시어머니가 늙은 줄 알았다. 늙어서 못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 나이가 마흔의 중반을 넘고, 내 큰언니가 지천명의 나이 쉰의 중반을 홀랑 넘고 보니 어머니 연세 쉰셋은 한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열심히 살면 살아지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시어머님이 자식에게 기본적인 상식의 모성으로라도 해야 할 것을 해 주지 않아서 입은 상처들을 동서들에게 반복시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 했다. 내가 지금 즉사를 해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자부한다. 해 주고 공치사 한다고 할까 봐서 나는 내가 한 은덕에 대하여 친정식구들에게 조차 말하지 않고 살아왔다. 너무나 어렵게 사는 나의 그런 헌신에 대하여 친정식구들의 가슴이 갈기갈기 찟기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내가 열심히 살면 마음이라는 것이 지성이면 감천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둘째 동서를 볼 적에 내 마음이 그렇게 좋았다. 6년동안 외며느리로 살아 오면서 고단하기도하고, 불미스러운 일들이 너무나 많았으므로 동서를 들이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동서들에게는 정말로 조심을 하고 있으며, 그들도 나와 똑같이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셋째 동서는 셋째가 너무나 많은 거짓말을 하므로 자세한 정황을 모르고 셋째 말만 믿고 달려들기 때문에 내가 가만히 두지 않는 것이다. 나는 동서들에게 처음부터 해 준 말이 있다.

 

첫째 내가 성당에를 다니니 혹시 후에라도 종교를 선택하려거든 나를 따라주면 좋을 것 같네.

둘째 우리 서로 남의 집의 귀한 딸들이지만 이 집에 시집을 와서 가족을 일군이상 서로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하고 다독여 주기로 하세.

셋째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어머니께서 백화점에서 청소일을 하셨음) 남의 가래침 닦는 일을 하시는 어머니를 불쌍히 여겨주기 바라네.

 

동서들이 잊어버렸을지는 모르지만 막내가 상다리로 큰형수를 때리는 사단이 벌어졌을 때, 상견례를 했던 그 아가씨에게까지도 나는 똑같은 말을 했다. 나는 이 말에서 어긋나서 살은 적이 없다. 세월의 전부를 다 세워서 나열 할 수는 없고, 대표적인 예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한가지씩만 써 보고자 한다. 나는 지난 세월을 어디에도 털어놓을 곳이 없어서 병이 났었다. 가정사를 드러낸다고하여 의구심을 제기 해 오시는 분들이 간혹 등장을 하신다. 시댁에도 시댁에 입장이 있다는...... 그래서 나 잘한 것만 쓰는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쁨과 그들이 불만스러워 하는 것들을 골라서 고루 써 보겠다.

 

먼저 둘째. 어쨌든지 장가를 들이고 물론 처음으로 해 줘야할 밥은 내가 해 주었다. 그렇다고 어머님이 나에게 돈을 준다든지 그러지도 않는다. 주셔도 받지도 않았겠지만 주시도 않았다. 그리고 처가에 신행을 갈적에 석작으로 다섯 석작에 과일 두 박스까지 사서 일곱 석작의 이바지를 정종 한 병까지 들려 보냈다. 전부 내 손으로 나 혼자 만든 음식이었다. 전에 어려서 친정에서 본 것이 있었다. 큰집, 작은집, 며느리들을 들일 때, 그것이 집안 아녀자들의 화재 거리로 술렁거리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결혼을 한 내 입장에서 동서를 본다는 것은 그렇게 기쁜 일이었고 마음으로 부터 좋았다. 돈을 들여서 사기에는 금전적으로 너무 벅찼고, 전부 나 혼자서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서 다섯 석작의 이바지를 마련하고, 과일 두 박스까지 사서 일곱 석작의 이바지를 해서 처가에 신행을 보냈다. 내 자식도 아닌데 그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국 한 그릇도 끓이지 않고, 남의 자식을 받아들인 어머니의 가슴도 뿌듯한 것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더라도 어머니는 나에게 석작은 커녕 깍두기에 밥을 주셨는데 내가 먼저 모범을 보였으니 저희들도 동생들에게 작게라도 모범을 보이겠지. 라고 생각했다.

 

셋째를 볼적에는 내가 섬에 살고있으면서 오르락 내리락 하느라고, 둘째네 만큼은 못 해 주었다. 그렇다고 둘째네가 받은 만큼의 십분지 일이라도 했다면 다행이지만.... 어머니 수준이 그것밖에 아니시고..... 어쨌든......

 

셋째네에게 내가 잘한 일은 둘째네가 아기를 낳을 적에도 다 해 주었지만 그래도 단 칸 방에서 살고 있느라고 뉘어놓고 편하게 몸조리를 해 주지는 못하고, 매일 오며가며 산후 조리를 해 주었다. 그러나 셋째네는 내가 처음으로 방을 두 개 가져본 뒤로 아기를 낳아서 꼬박 한 달을 눕혀놓고 몸조리를 내 손으로 해 주었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동서들이 아기를 낳으면 이유를 불문하고, 병원비며 산후 조리비용 일체를 내가 감당해 준다. 내가 아기를 낳았을 적에 시댁식구들이 구경꾼에 볼과했던 섭섭함을 동서들에게는 안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무지했다고 해서, 나도 똑같이 무지해 진다면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이 헛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카들 넷은 아무리 사이가 나쁜 뒤에라도 내 손에서 출산비용이 지불되었다. 그런데 셋째네는 첫아이를 내 손으로 내 안방에 눕혀놓고 산후조리를 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달만에 갈 적에는 사골뼈까지 과일까지 다 사서 실어서 보내 주었다. 드낙거리며 몸조리를 해 준 둘째네에 비하면 호강이었지만, 신행의 이바지를 셋째네는 못 해 준 것과 비교하면 공평해 졌다.

 

내가 그들에게 잘 못했던 점은 먼저 둘째네. 이 집 식구들이 전반적으로 무식하면서 잔것에 눈이 어둡다. 배움이 없고, 가짐이 없고, 별다른 길도 없다면, 어떻게든지 어울려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동서들에게는 그렇지 않지만 시동생들에게는 하라는 말이 많아졌다. 그러나 19년 살은 결론은 아직까지도 시동생들이 내가 일관적으로 꾸준히 장부정리를 해 주라는 대로 한 것이 한 가지도 없다. 그렇다면 배워서라도 해야하는데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식이 배짱이다. 때로는 정말로 송곳으로 내 목을 따고 싶을 정도로 답답하다.

 

잘잘못을 떠나서 나는 둘째네 집에 가서 싸우고 칼을 꽂아 놓고 너희 형제들이 이 칼로 차라리 내 목을 따서 죽여라고 한 적이있다. 그 마음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내 자식이 고3이 아니었다면 나는 또 너희 형제들이 내 목을 따서 죽이는 게 더 쉽다고 칼을 꽂았을 것이다. 늙은 어머니의 방세를 갈취하고, 형의 급전을 막아 준다고 거짓말을 하고, 어머니의 돈을 갈취하는 형제들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짝궁이 또 나를 속이고 이런 사단이 났을 때는 정말이지 짝궁의 형제들이 칼을 들고 내 목을 따는 것이 이렇게 내 피를 말리는 것 보다 나에게 덜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째는 칼을 꽂는 수모를 당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올해도 유야무야 형의 등살에 얹혀 살아 보겠다는 심산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처지가 부모로 부터 받은 것이 그것뿐이라서 힘이 들다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저희들의 방세에 절반도 안되는 방에서 살면서, 빚은 억대를 짓고도 이렇게 룰루랄라 사는 형의 가죽을 벅겨 먹으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심한 경쟁의 사회에서 짝궁의 형제들이 몸 붙여 살만한 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래서 내가 빚에 넘어져도 동생들에게 짐을 지우는 일은 단 한 번도, 단 돈 일원도, 해 본적이 없다. 그만큼 나는 내 양심을 걸고 청렴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해 온 형수의 모범을 보아서라도 하란대로만 하면 되는데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 적도 없다. 온갖 이유와 핑계를 동원하여 미꾸라지 처럼 빠져 나가고야 만다. 칼을 꽂아 놓고 <할래? 안할래?> 했어도 안되는 일이었다. 19년을 살고도 안되는 일이었다면 이제 제 갈길을 각자각자 가자고 나는 칼의 방향을 짝궁에게 돌린 것이다. 그런데 짝궁도 제 형제들과 다르지 않아서, 칼을 꽂아 두고도 내 말을 지금도 듣지 않았다. 이제는 핑게도 없다. 2003년, 2004년, 두 해를 꼬박 나에게 와서 결재를 받고, 서류를 배웠음에도, 오늘이 일주일째인데 소식이 없다는 것은 어린 삼척의 동자도 짐작이 가는 심보가 아니겠는가?! 

 

셋째네는 내가 잘 못한 것이 한가지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번에 어머니 방세를 갈취한 일로 전화를 해 보았더니 나도 잘 못이 있다는 것이다. 짝궁이 강원도로 간 첫 해에 실패를 하여 삯의 일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개념과 달라서 정말로 그러했다면 미안하지만, 셋째 동서와 나의 개념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짝궁 뿐만 아니라 시장의 일은 계절을 탄다. 그래서 봄부터 가을까지 일을 하고 김장철이 끝나면 겨울 몇 달은 쉬어야 한다. 그야말로 늦은 겨울이면 배고픈 보리고개를 넘기느라고 어려움들이 많다.

 

이번에 어머니 집세 갈취사건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셋째는 짝궁이나 둘째처럼 동서에게 겨울이면 일이 없다고 밝히지 않고, 어머니를 꼬드기거나 막내동생까지 울궈서 동서에게 정기적인 액수의 소득을 안겨주고 살아온 것이다. 그 세월을 살으면서도 나는 불효하는 것 같아서, 어머니의 월급이 얼마인지? 얼마를 쓰시는지? 얼마가 있으신지? 19년동안 단 한 번도 여쭙거나 양심을 걸고 궁금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셋째는 큰형과 둘째형에게만 매달려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전체 가족을 피해자로 만들어버린 가해자가 된 것이다.

 

아니, 심지어 지난 겨울에는 큰형이 일하는 강원도까지 가서 형의 아름을 이용하여 돈을 빌려다 써 버리는 바람에 우리는 지난 봄에 그 돈을 먼저 갚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시골이라는 인심에 피해를 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셋째는 시장에도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역시 시장에서도 그런 사단을 저질러 놓고 갚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그런 치닥거리를 해 줄 수가 없다. 나는 셋째 때문에 금전은 물론 정신적으로, 심지어 친정쪽의 힘까지 동원해야만 했던, 모진 곤경들을 격어왔으므로 한가닥의 미안함은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안면 몰수에 철면피가 따로있을 것인가?!

 

아무리 여자가 눈치가 없고, 남편의 말을 하늘같이 믿는다고 하여도.... 예를 들어서 셋째네가 나에게 받고 싶었던 돈이 그 해에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셋째의 그렇게 무지막지한 과실에 대하여 단 한 번도 갚으라고 요구해본 적이 없는데..... 늙으신 어머니 방세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셋째네는 강원도로 처음 가서 덜 준 인건비를 갚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마디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방세를 돌려주면 될 것을 그걸 돌려주기 싫어서, 큰아주버님인 짝궁에게 전화를 해서 욕지껄이를 하는..... 성요셉만큼이나 호인인 짝궁은 그러는 재수씨에게 욕 한 자리를 못하고.

 

<재수씨. @@엄마가 동생 때문에 내가 해 주지도 않고, 처가에서 결혼비용 주신걸로 혼자 해서 낀 결혼예물이랑, @@이 돌반지 백일반지까지 다 팔아 준 사람이요. 그래도 재수씨한테 그거 갚으라고 한 적 없잖아요?! 늙은 어머니,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어머니, 이사할 방세를 빼가는 게 사람이요? 그만둡시다. 다 내가 잘 살아서 동생들 욕심대로 주고 살면 조용헌디요. 내 밥그릇이 적은데 그걸 뺏어먹고 살을랑게 생기는 분란 아니것소?!> 얼마나 가슴 미어지는 큰형의 서러움인가?! 그래도 나는 기어이 악착을 부려서 어머니의 방세를 찾아왔다. 혹시라도 내가 그 한 번의 인건비를 걸러 주었다고 해도 나는 셋째네에게 사과할 마음이 추호도 없다.

 

오늘이 사단이 난지 일주일이 되었다. 아직도 동업이라는 명목의 서류가 짝궁의 손에 도착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게 어떻게 동업인가?! 주인없는 가게에서, 주인없는 물건을 판매하고, 주인에게 보여줄 서류가 일주일이 되도록 보여지지 못하고 있다면, 과연 이 묵상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어떤생각이 드는 것일까? 나는 지금도 이 형제들의 수준과 입장을 너무나 잘 알고있다. 내가 마음을 비운 만큼은 아니라도 마음을 비우고,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무엇이 잘못인가를....  억대의 빚을지고, 다행히 좋으신 집주인을 만나서 싸구려 두 칸방에 사는 형의 처지를 바라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너희가 살고 싶으면, 진심으로 너희가 형과 함께 일을 하고 싶으면 무엇을 먼저 해야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정말로 욕심없이 주는 형수가 살아온 모습을 진심에서 우러나는 눈을 뜨고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않는다. 그 이유는 형의 말대로 간장종지인 형에게 언제나 뜯어먹을 것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형제들이 부모로부터 받음이 그것뿐인데..... 그 부족함을 더 부족한 형에게서 채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미련도 욕심도 없다.

 

짝궁의 물건은 남에게 위탁을 시킬 것이고, 검은 마음의 너희는 너희 부모가 준 능력껏 살으라는 말이다. 많이 주지 못하는 큰형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너희의 부모가 준 능력껏 나가서 살으라는 말이다. 남의 점원을 하든, 머슴을 하든, 각자 각자 가라는 말이다. 나는 19년을 살아오면서 그들이 나에게 어떠한 무례를 범하는지 조차 무지한 시어머니께 세세히 말씀 드리지 못했다. 어머니의 자식들 때문에 내가 어떤 곤욕을 격으며 사는지를 가르쳐 드려봐야 알아들으실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어머니의 눈으로 보시고, 시어머니의 입으로 드시고, 시어머니의 마음으로 나눈, 막내의 상견례 자리가 어떤 수고와 정성인지도 모르고...... 살림을 부수고.... <저년에게 영금을 보여줘라.>하신! 이러고도 시어머니 집에를 가고, 보고, 말하고... 생활비를 드리고.... 내 가슴의 이중고로 나는 고통한다. 지금도 시어머니의 아들들이 나에게 어떠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시는 게 시어머니시다. 그런데 짝궁은 아직도 동업이라는 서류에 대하여 소식이 없다. 내 생각에는 가짜로 만들어서 급조를 한다해도 일주일이면 넘치는 시간이 아니던가? 

 

선녀는 넷째 아기를 임신하고도 선녀옷이 발견되자 하늘로 가버렸다. 두 아이는 양쪽 팔에 끼우고, 한 아이는 가랑이에 끼우고, 선녀옷을 입고 하늘로 갔다. 넷째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는 선녀옷이 있는 곳을 알리지 마라고 도사님은 일렀거늘.... 인간의 어리섞음이 칼을 꽂아두고 위협을 하여도 절대로 말을 듣지 않는 법인데, 땡중의 훈계를 아이가 셋이나 되도록 발설하지 않은 나뭇꾼이 오히려 대단하지 않은가?! 역시 나뭇꾼은 선녀를 차지할 인품이 있을리가 만무하다. 그러니 아이 셋을 믿고 선녀옷을 돌려주는..... 그리고 선녀는 하늘로 갔다.

 

그런데 나는 아이가 하나뿐인데도 선녀처럼 이토록 척박한 짝궁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양 겨드랑이와 가랑이에 끼고도 선녀는 이승의 허물을 벗어버렸는데, 나는 내 한 몸과 마음 조차도 짝궁의 지긋지긋한 허물들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다. 어리섞은 인종이 바로 내가 아니고 누구란 말이던가?!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에게 하라는 말씀과, 네가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해 주어라. 하신 말씀들을 다 실천하려고 하는 신앙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그들의 이웃이었는가? 과연 그들은 그들이 바라는 것 중에서 나에게 해 준 것이 단 한 가지라도 있을까?

 

짝궁은 나에게 아직도 선녀의 옷이 있는 장소를 발설하지 못해서 나는 이토록 냄새나는 구렁에서 허우적 대고 있는가?! 오늘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이다. 성 바르톨로메오는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살은 채로 가죽이 벗겨져서 순교를 당했다고 미사중에 신부님은 강론을 삼으셨다. 나는 아직 그들에게 껍질을 벗겨 주지 못해서 선녀의 옷을 돌려 받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는 아이가 하나 뿐이라서 선녀 옷을 돌려 받지 못하는 것일까?

 

ㅡ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1,51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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