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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03위 한국 순교 성인에 관하여 ~! ▣ (#1 - #50)
작성자조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5-08-25 조회수1,005 추천수10 반대(0) 신고
 
 
한국교회의 첫 번째 신부로서 거룩하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1821년 충청도 솔뫼, 구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김 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 나(모방) 신부는 마침내 그를 다른 소년 두 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때는 1836년, 그의 나이 15세일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최 양업 (崔良業, 토마스), 최 방제 (崔方濟, 프란치스코: 수학 중 병사) 등 두 소년과 함께 6년간이나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현지에서 발생한 민란 때문에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어쨌든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어 우선 요동 지방에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했다.그리하여 그는 1743년 음력 11월, 변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때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꼬를 만나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듣는다.
그의 말인즉 국내에는 아직 박해 위험이 남아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도 마련 되어 있지 않은 만큼 그들의 입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으로 라도 입국할 것을 결심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했다.
김 대건은 의주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요동으로 되돌아왔으며 한편 북경으로 갔던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에서 그 이듬해 김 대건과 다시 만나고 주교의 입국 시기를 음력 11월로 잡고 헤어 졌다.
그러는 동안 김 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약속 시기에 마중 나온 김프란치스꼬 일행과 같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고 주교는 동반치 않았다.
김 부제는 서울에 들어오자 수 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 준비를 갖추는 데 진력했고 마침내는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품을 받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후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고 주교와 안(다블뤼) 신부를 배로 모시고 황해를 건너 조선 땅인 강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약 2개월 간 휴식 후 곧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김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위대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친과도 상봉하여 얼마간 같이 머무를 수 있었으나 1846년 음력 4월이 되자 주효의 명에 따라 황해도지방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구라파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 황해도 지방에의 항해길이 마지막 그의 순교길이 되고 말았다.그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 에서 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때마침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김 신부의 "양반 배를 어찌 징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 며 문초 끝에 교회 일이 드러나자 마침내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중국 배에서 압수된 주교 편지가 "네 글씨와 다른데, 누구의 것이냐" 라는 문초에 "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이며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는 기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의 넓은 견식과 당당한 태도는 대관들로 하여금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는 말들을 하게끔 했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 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김 신부의 처형은 9월 16일 새날터에서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에따라 진행되었다.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이 때 피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41은 부친)
정하상은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훌륭한 순교자의 한 분인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신명을 바쳐 일했고 유명한 「상재상서」 (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의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했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또 덕행과 지혜와 능력이 뛰어나 범 (앵베르) 주교에 의해 이 신규(李身逵) 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했으나 박해로 인해서 신품을 받지는 못하였다.
정 하상은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申酉迫害)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 와 이복형인 정철상(丁哲祥, 가롤로)이 순교하자 가산을 몰수당한 채 나머지 가족 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몸붙일 곳이 없게 된 하상은 하는 수 없이 고향인 양근 땅 마재로 내려가 숙부인 정 약용(丁若鏞)의 집에 의지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13년 홀로 상경하여 조증이(趙曾伊,바르바라)의 집에서 기거하며 교리를 배우고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고 그후 더욱깊게 교리를 배우기 위해 함경도 무산(茂山)에 유배 중인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교리와 한문을 배우고 다시 상경,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1816년역관의 하인으로 들어가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갔으며 그곳에서 북경 주교에게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후에도 조신철(趙信喆,가롤로), 유진길(劉進吉,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모방) 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39년 7월 모친 유소사(柳召史,체칠리야), 동생 정정혜 (丁情惠,엘리사벳)와 함께 체포된 정 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 일뿐더러 그후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정하상은 포청에서의 6차례 신문과 형벌을 받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또 3차의 형문을 당한 후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9월 22일 그는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49의 아들이며 54의 오빠,49,54,57과 함께 체포됨)
이 호영은 경기도 이천(利川) 출신으로 신유 박해 후 어머니와 과부가 된 누나 이 소사(아가타)와 함께 입교했다.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이사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으며 이 때문에 유방제 (柳方濟)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l815년 2월 (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누나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 에서 매우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나 비명 한마디 지르지 않고 참아내어 결국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 결안(結案)의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는 문구에 대해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정도(正道)이며 거룩하고 참된 도(道)라 수결(手決)할 수가 없다고 버티자 포졸들이 강제로 수결시켰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4년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누나 이 소사와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1838년 11월 25일 (음력 10월 8일) 긴 옥살이 끝에 얻은 병과 옥고로 옥사(獄死)했다. 그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7은 누나)
정 국보는 원래 개성(開城)의 유명한 양반 가문에서 출생했으나 벼슬을 하던 조부가 죄를 짓자 부친과 함께 상민으로 신분을 감추고 상경하여 선공감 (繕工監)에서 일하며 미천하게 살았다.
천성이 선량하고 겸허했으므로 30세경 천주교를 알게되자 곧 입교하여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고, 그후로는 홍살문 근처에서 아내와 함께 성사를 받으러 상경하는 시골 교우들을 돌보았는데 자녀 14명을 가난과 병으로 잃어 버렸고. 자신 또한 가난과 병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 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인내와 극기의 신앙자세를 잃지 않아 모든 교우들 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4월 (음력 3월) 밀고되어 아내 와 함에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형벌과 고문은 참아냈으나 형조에서는 참아내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러나 석방되자마자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형조에 들어가 배교를 취소하며 다시 체포해 달라고 간청했고, 그것이 거절당하자 5월 12일 (음력 3월 그믐) 고문의 여독과 염병으로 들것에 실린 채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형조판서에게 직접 자신을 체포해 줄 것을 요구, 그날로 체포되어 5월20일(음력 4월7일) 포청에서 곤장 25도를 맞고 이튿날 새벽에 순교했다. 그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김 아가타는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전혀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친정언니의 열심한 권면으로 늦게 천주교를 알게 되어 교리를 배웠는데 기억력이 나빠 12단(十二端)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지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였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교리를 배우던 중 1836년 10월 김 아가타는 김업이 막달레나,한 아기 바르바라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교리에 대한 질문에 김 아가타는 "나는 오직 예수, 마리아밖에 모릅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했고,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 갇혀 있던 교우들은 예수, 마리아밖에 모르는 김 아기가 왔다고 그녀를 반겨 맞아 주었다.그후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 아기는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 한 끝에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니 그때 나이 53세였다. (8, 10과 함께 체포됨)
강원도 강촌(江村) 출신의 박 안나는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했다.
18세 때 비교적 부유한 교우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또 정성껏 그들을 교육시켰다.기해 박해 초인 1839년 4월 박 안나는 남편,큰아들 응천(應天)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고문으로 남편과 큰아들은 배교 하고 석방되었으나 박 안나만은 배교를 거부하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언제나 평온하였고 때때로 위문오는 가족들에게도 권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되어 서도 형관이 배교하고 석방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가라고 유혹하며 혹은 위협하 고 고문하였으나 박 아기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 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57세였다.
이 아가타는 경기도 이천(利川) 출신으로 17세 때 결혼했으나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 동생 이 호영과 함께 입교하였다. 아버지가 대세 (代洗)를 받고 사망하자 동생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였다.
1835년 2월 (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동생 이 호영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여인으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형벌과 고문을 참아냈고 형조로 이송되어 동생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옥살이를 더 해야 했다.
고통스러운 옥중 생활 속에서도 동생과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위로 하고 격려하며 인내와 극기로써 생활하였다. 동생을 먼저 순교의 영광을 입게 하고 자신은 동생이 옥사한지 7개월 후인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5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3은 동생)
김업이 막달레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본래 수정(守貞)을 원했었는데, 혼기에 이르러 어머니의 권유로 교우 청년과 결혼했다.중년이 되어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노모와 함께 애고개 (지금의 아현동)에서 망건을 만들어 팔며 살았다.
항상 노모에게 순종하는 좋은 표양과 밝은 교리지식으로 외교인들에게 전교 하며 순교할 결심으로 수계하던 김 업이 막달레나는 1836년 10월 김 아기 아가타,한 아기 바르바라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김업이 막달레나는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참아내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이 유예되어 3년을 옥살이한 끝에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자신의 소원대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66세였다. (5, 10과 함께 체포됨)
일명 '치문'으로도 불리는 이 광헌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여러 순교자를 낸 광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30세 경 입교한 후로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여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거듭되는 박해로 이 광헌은 가산을 전부 잃고 순교할 때까지 10여 년을 궁핍 하게 살면서 회장직에 충실하고 또 냉담자를 권면하고 병약자를 위로하며 외교인에게 전교했다. 그리고 범(앵베르)주교와 신부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 들여 교우들을 미사에 참여케 하고 강론을 듣게 했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어떤 예비 교우가 체포된 자기의 아내를 석방시키는 조건 으로 이 광헌을 포함한 53명의 교우 명단을 포졸에게 건네주었다. 이로인해 이 광헌은 4월 7일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형문을 마친 후 4월 18일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로 이송된 이 광헌은 배교하면 가족들과 함께 석방시켜 주겠다는 형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 다리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 온 몸이 피범벅이 되었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냈다.
형조에서의 혹독한 3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5월 24일 남명혁(다미 아노)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26은 처, 58은 딸, 21은 동생, 20, 21, 26. 58과함께 체포됨)
한 바르바라는 어려서 교우인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세속의 일에 마음이 빠져 어머니의 모범과 권면을 무시하고 외교인과 결혼했다.그러나 우연히 친정에서 만난 김업이(막달레나)로부터 교리를 다시 배우게 되었고, 30세에 남편과 세 자녀를 모두 여의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1836년 10월 김아기(아가타), 김업이(막달레나)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형관에게 천주십계를 강론하고 의연히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한 후 1839년 5월 24일 7명의 교우와 할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그때 나이 48세였다.(5. 8과 할께 체포됨)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박희순 루치아는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인해 어려서 궁녀로 뽑혀 궁궐에 들어갔다.15세경 어린 순조(純祖)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었다.
30세경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한후 궁녀의 신분으로는 천주교 봉행이 어렵게 되자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와 조카의 집에 살면서 언니 박 큰아기와 조카의 식구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다.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3월말 박 희순은 조카의 가족들과 함께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자 전경협(아가타)의 집으로 피신 했다.
그러나 4월 15일 전경협의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포청과 형조 에서 혹형과 고문으로 함께 체포된 많은 사람들은 배교했으나 박 희순만은 언니, 전 경협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또한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열정적인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낸 박희순은 '드디어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 했다. (25는 언니, 25. 39와 함께 체포됨)
'문화'로도 불리는 남명혁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매우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30세 경 입교한 후로 모든 세속의 나쁜 일과 손을 끊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유방제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는 열심을 더해 이광헌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되어 예비자를 모아 가르치고 병약자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또 '성의회' (聖衣會)라는 신심단체에 가입하여 신부를 도와 열심히 교회 일을 했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초 한 예비 교우의 밀고로 4월 7일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때 그의 집에서 제의류(祭衣類), 경본(經本), 주교관(主敎冠) 등이 발견되어 서양 신부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된 포청과 형조의 관원들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남명혁은 모든 고통을 참아냈고, 함께 체포된 아내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니 주를 위하여 죽어서 광명한 곳에서 영원 히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격려의 편지를 써 보낸 뒤 5월 24일 이 광헌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평소 '성의회의 치명자 남 다미아노'로 불려지길 원했던 성의회원 남명혁은 자신의 원대로 한창 나이인 38세로 순교하였다. (29는 처)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권득인 베드로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여윈 후 결혼했다. 얼마 동안은 약장사를 하는 형과 함께 살다가 분가하여 성패(聖牌)와 성물을 만들어 팔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항상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촛불을 켜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 하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깊은 신앙으로 인해 권 득인은 1839년 1월 16일 처남,아내,어린 자녀 등 4명와 가족 그리고 김로사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흑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가족들이 배교하고 석방되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권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후 권득인은 5개월 동안 옥중에서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내고 드디어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35세였다. (17과 함께 체포됨) 서울에서 태어나 한강변 서강(西江)에서 살았던 장성집은 30세경에 교리를 배우고 열심한 예비 교우로 생활했다. 그러나 점차 교리에 대해 회의를 품어 신앙생활을 중지하고 세속 향락과 재산 모으는 일에 몰두했다.
교우 친구들의 권면과 가르침으로 회개한 이후로는 자신의 죄를 보속하고 세속의 유혹을 피하기 위해 방에 틀어박혀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고 기도와 성서연구에만 몰두했다.
이러한 태도에 집안 어른들이 "예전처럼 자유롭게 드나들며 생활하는 것이 너의 신앙생활에 무엇이 그렇게 방해되느냐?"고 만류하자 장성집은 "제가 전에 지은 죄는 모두 넉넉한 의식(衣食)을 얻어보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 입니다.
다시 그런 죄를 짓는 것보다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뜻이 변할 수 없음을 밝혔고 마침내 1838년 4월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렇게 굳은 결심으로 신앙에 귀의한 장 성집은 l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할 목적으로 자수를 결심했다가 대부의 만류로 자수하지 않았지만 몇일 후인 4월 7일 체포되었다.
중병이 들어 포졸들이 가마에 태우려 했으나 장성집은 포청까지 걸어서 갔다. 포청에서도 신문하는 형관에게 맑은 정신으로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혹형 과 고문을 참아냈다. 그후 장성집은 5월 26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25도를 맞고 옥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 바르바라는 13세 경 상경하여 부유한 교우인 황 마리아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 그때부터 교리를 배워 열심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원래 수정(守貞)을 결심했으나 혼기에 이르러 부모의 강요로 외교인과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결혼한 지 15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딸 하나만을 데리고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3월 김 바르바라는 몸 붙여 살던 집에서 집주인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가 거기서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다.3개월간의 옥살이 끝에 5월 27일 굶주림, 기갈, 염병 등으로 옥사함으로써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35세였다.
이 바르바라는 독실한 구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서울의 청파동에서 자랐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후로는 서울의 이 영희, 이 정희 두 이모에게 의탁하고 살았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4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체포되어 포청 에서 신문을 받은 후 형조고 이송되었다 형조에서 어린 것이 요물이라 하여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자 다시 포청으로 송환되었다.
포청에서 이 바르바라는 전보다 훨씬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꿋꿋이 참고 인내하며 함께 갇혀있는 어린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5월 27일 기갈과 염병 그리고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함으로써 15세의 어린 나이 로 순교했다.(22,27의 조카)
과부가 된 후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로 친정식구들을 입교시킨 김 로사는 1839년 1월 16일 권득인(베드로)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신문 중 "하느님은 신인만물(神人萬物)의 큰 주인이시라 배반할 수 없읍니다" 하고 자신의 뜻을 밝히고,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1839년 7월 20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이때 나이는 56세였다.(1,7과 함께 체포됨)
인천 부평에서 태어난 김 성임은 결혼에 한번 실패한 후 상경하여 장님 점장이 와 재혼했다. 이때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죽은 후 신앙생활을 위해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였다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했다.
1839년 4월 11일 김 성임은 자신이 몸붙이고 있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허계임,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한 후 이미 체포된 남명혁(南明赫)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7,22,23,28,36과 함께 자수)
외교인 시절에 결혼한 이 매임은 20세에 과부가 되어 경기도 봉천의 친정으로 돌아와서 한 동네에 사는 여교우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입교 후 이 매임은 조카 이정희(李貞喜)와 영희(英喜)를 신앙으로 인도했다. 이어 조카 이영희가 수정(守貞)할 결심으로 외교인과의 결혼을 뿌리치고 서울로 피신하자 함께 따라가 살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839년 4월초 이 매임은 허계임, 이정희, 이영희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던 김성임,김 루치아 등과 함께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동하여 이들 5명의 여교우와 함께 순교 할 것을 결심하고,
마침내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천주교인 임을 밝히면서 자헌하였다. 이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 52세였다. (36은 올케, 22, 28은 조카, 18, 22. 23, 28, 36과 함께 자수)
서울에서 태중 교우고 태어난 김장금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중년에 이르러 과부가 되자 노모와 함께 이광렬 (李光烈)과 이웃하여 살았다.
두 집은 사이가 좋고 화목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장금은 1839년 4월 이광렬, 이광헌 일가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고 마침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51세의 나이로 순교 했다. (9, 21, 26. 58과 함께 체포됨)
'경삼'으로도 불렸던 이광렬은 명문 양반인 광주 이씨의 후예로 태어났다. 22세경 형 이광헌과 함께 입교한 후 헌신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였으며, 정하상, 조신철, 유진길 등과 함께 북경(北京)을 왕래하며 나(모방) 신부, 정(샤스땅)신부 등을 맞아들였다.
북경에서 성세성사를 받고 귀국한 후로는 육식을 끊고, 극기와 인내로 세상의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동정을 지키며 수계하였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이광렬은 4월 7일 형의 가족들 그리고 김장금과 함께 체포되어 회장인 형 이광헌과 똑같은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냈다.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4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9, 20, 26, 58과 함께 체포됨)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이 영희 막달레나는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태어났다.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李梅任)의 권면으로 어려서 어머니 허계임(許季任). 언니 이정희(李貞喜)와 함께 입교했다.
성장하면서 수정(守貞)할 것을 결심하여 혼기에 이르자 혼담을 피해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꾸미고 상경하여, 고모 이 매임의 집에 기거하면 수계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체포된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교우들로부터 전해 듣고 감동하여 당시 고모에게 의탁하고 있던 김성임, 김루치아 그리고 어머니, 언니 이정희와 함께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들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헌했다.
그후 포청과 형조에서 7차의 형문을 받고 드디어 사형을 선고받아 7월 20일 고모 이 매임을 포함한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호 순교했다 . 그때 나이 31세였다.(36은 모친,28은 언니, 19는 고모, 16은 조카. 18, 19, 23, 28, 36과 함께 자수)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김 루치아는 강원도 강촌(江村)에서 태어나 9세 때 어머니로부터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다. 14세 때 수정(守貞)을 결심했고, 부모를 여읜 후로는 자신을 받아주는 교우들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서울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이정희와 영희 자매,김 성임 등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때 남 명혁과 이 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고문과 혹형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함께 살고 있는 여인들과 함께 순교를 결심하고 4원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헌했다.
포청과 형조에서 김 루치아는 천진한 태도와 한결같은 신앙으로 모든 형벌과 고문과 유혹을 참아냈고, 교리에 대한 심문 중에도 기막힌 비유와 논리정연한 대답으로 형관을 감동시켰다. 드디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8, 19, 22, 28, 36과 함께 자수)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원귀임은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龍頭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다가 9세 때 서울의 친척집에 들어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때 수정(守貞)을 결심하고는 항상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39년 3월 29일 원귀임이 있던 친척집이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자 원귀임은 재빨리 피신했으나 길거리에서 원귀임을 아는 사람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당황했던 원귀임은 정신을 가다듬고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하는 형리에게 "내 영혼을 이미 하느님께 맡긴 지 오래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오직 죽을 뿐입니다"하고 배교를 거부하니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 으나 원귀임은 굴하지 않았고 드디어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 22세였다.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박 큰아기는 궁녀인 동생 박희순의 권면으로 입교했다. 1839년 4월 17일 동생과 함께, 피신해 있던 전경협의 집에서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 냈다. 동생 박희순이 순교한 지 100여 일 후인 9월 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74세였다. (11은 동생, 11, 39와 함께 체포됨)
이광헌의 부인이며 이 아가타의 어머니인 권희 바르바라는 1817년경 남편과 함께 입교하였다. 박해 때문에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회장의 직무를 맡은 남편을 도와 주교와 신부들을 맞아들였고 또 교우들로 하여금 미사에 참여 하게 하고 강론을 듣게 하였다.
1839년 4월 7일 권희는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수차의 형벌과 고문을 당했다. 특히 열두 살밖에 안된 어린 아들이 고문당하는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끝내 모정을 억제하고 온갖 유혹과 형벌을 견디어냈다.
이러한 처참한 5개월 동안의 옥살이 끝에 9월 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4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9는 남편, 58은 딸, 9, 20, 21, 58과 함께 체포됨)
일명 ‘명관’으로도 불리던 박후재 요한은 경기도 용인지방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를 여읜 후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성장하면서 물장사를 하는 노모를 도와 짚신과 미투리를 팔아 생활했고, 36세 때 교우 처녀와 결혼했다.
1839년 5월 아내를 피신시키고 혼자 체포된 박후재는 포청에서 치도곤 40도를 맞는 가혹한 형벌을 당했다. 살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 피가 낭자하게 흘렀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을 뿐더러 함께 갇힌 교우들을 권면하고 또 흉악한 죄수들에게는 천주교의 바른 도리를 강론했다.
이어 형조로 이송되어 4개월간의 옥살이를 한 박후재는 1839년 9월 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41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경기도 봉천에서 태어난 이정희 바르바라는 과부가 되어 돌아온 고모 이 매임 (데레사)의 권면으로 어려서 어머니 허계임, 동생 영희와 함께 입교했다. 입교 이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며 수정할 것을 결심했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 청년과의 결혼을 강요하자 병을 핑계삼아 3년을 버턴 후 교우 청년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한지 2년만에 남편을 잃은 후 잠시 친정에 있다가 신앙생활을 위해 집을 떠나 서울의 고모 이 매임의 집에 와서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시초에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고 감동하여 당시 이 매임의 집에 머물고 있던 김성임, 김 루치아 그리고 어머니, 동생, 고모 등과 함께 순교를 결심한 후 4월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에게 자헌하였다.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41세였다. (36은 모친, 22는 동생, 19는 고모, 16은 조카, 18,19, 22, 23. 36과 함께 자수)
이연희는 남명혁의 부인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사리에 밝았다. 회장인 남편을 도와 공소(公所)를 세워 주교와 신부를 맞아들이고 또 교우들을 가르쳐 성사 를 준비시키며 항상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12살 된 어린 아들의 고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는 주님의 영광입니다"고 하며 모정을 억누르고 자신도 혹형과 고문을 감수하였다.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3차의 형문을 받았으나 역시 굴하지 않았다. 드디어 사형을 선고 받아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 형을 받고 3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2는 남편)
언니 김효임과 같이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김효주는 서울 근교 밤섬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그후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로 이사해 살았다. 아버지를 여읜 후 온 가족과 함께 입교하여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언니 김효임, 동생 김 글라라와 함께 수정(守貞)을 결심하고는 아름다운 덕행과 극기로써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5월 3일 김효주는 언니 김효임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잔인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형조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언니보다 20여 일 먼저 즉 1839년 9월 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44는 언니 )
‘영눌’ 또는 ‘치운’으로도 불리던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 (洪州)지방 다랫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의 창설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온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 다니다가 가족들을 설득하는데 성공,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 했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城),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했다.
1836년 아들 최양업(崔良業)을 나(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했다. 그는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교우촌 교우와 가족 도합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해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도 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순교했다. 그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한국명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 2대 교구장. 주교로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같이 선교에 종사하던 나(모방),정(샤스탕) 두 신부와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한강변 새남터에서 목을 잘려 순교하였다.
그는 조정에 의해 대박해가 일어나 더 이상 전교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은 물론 나중에는 두 동료 신부들에게까지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라는 말로 자헌을 권유하였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브뤼기에르)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교황청에 의해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그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만에,그리고 교회 창설 53년만에 비로소 전교 체제를 갖추 었으며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파에 힘쓴 결과 신자수는 1839년 초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말미암아 성공하지 는 못하였다.
범 주교는 1797년 4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빠리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다음해 3월 파리를 떠나 조선에 입국하기까지 중국 사천(四川)교구에서 10여 년간 사목활동에 종사하였다.
1839년 대 박해가 일어났을 때 지방을 돌아보고 있던 범 주교는 조정에 의해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 사실이 알려져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고 교우들에 대한 박해가 가열되자 하는 수 없이 수원에서 가까운 바닷가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기었다.
여기서 그는 나, 정 양신부를 불러 두 사람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않아 단념하고,몸조심을 당부하며 두 사람을 각기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그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그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나아가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으며 나 신부와 정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군문효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한국명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 그는 1836년 1월 입국하여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까지 3년 9개월 간 헌신적인 포교활동을 폈으며 특히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된 김 대건과 최 양업, 최 방제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에 유학시킨 것으로노 유명하다.
프랑스 베시에서 태어난 나(모방) 신부는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어 그 이듬해 동양에 진출, 중국을 거쳐 1836년 1월 의주의 변문을 통해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그는 서울에서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순회, 전교하였다.또한 그는 이 땅에 들어오자 곧 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 양업을, 3월 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이들 세 소년에게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장차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던 중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신부 유방제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시켰다.
그후 나 신부는 이들 세 소년을 전송한 교우들과 만나 1837년 1월 무사히 서울에 들어온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손을 나눠 각 도의 흩어진 교우촌을 찾아 밤낮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가며 전교에 힘쓴 결과 입국 당시 불과 4천 명이었던 신자수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한 1837년 말에는 갑절이 넘는 9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39년 기해 대박해가 일어나고 서양인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점차 소문으로 퍼져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마침내 순교의 날이 닥쳐온다.
범 주교는 박해가 일어나 신변이 위험하게 되자 처음에는 자신만이 자수하고 두 신부(나 신부, 정 신부)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고했으나 형편이 그렇게 못되었고 결국은 범 주교에 이어 두 신부도 자진하여 포졸에게 몸을 맡겨 관가에 자수하였다.
그는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범 주교, 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한국명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이 땅에 두 번째로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로 1839년 기해박해 때 범 주교,나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정 (샤스탕) 신부는 1803년 10월, 프랑스 태생으로 1827년 1월 빠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었으며 같은 해 4월 동양 포교지의 하나인 페낭 섬으로 떠났다. 그는 그곳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마침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게 되자 함께 동행하기를 자원,1833년 5월 그곳을 떠났다.
그후 3년간을 중국 대륙과 몽고,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조선 입국의 기회를 기다렸으나 쉽게 뜻을 이를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소 주교는 입국도 못한 채 만주 땅에서 병을 얻어 목숨을 잃었으며 1836년 1월 조선 입국에 성공한 동료 나 신부로부터의 기별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1836년 12월 나신부의 기별을 받고 의주 변문으로 간 정신부는 마카오로 유학가는 김대건 등 세 소년 신학생을 전송하던 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무사히 국경을 넘어 이듬해인 1월 서울에 도착했다.
정 신부는 서울에 도착하자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손을 나누어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집행했다. 정 신부 등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도 여의치 않아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공복을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를 듣고 미사를 드린 다음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안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정 신부는 한때 중병을 앓게 된 나 신부를 서울까지 올라와 간호해야 하는 어려운 일도 겪었으나 다행히 무사했으며 1837년 12월에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에 성공하여 전교활동은 차츰 본격화되어갔다.
그러나 1839년 몰아닥친 기해 대 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의 피로 물들였고, 정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해 9월 21일 새남터에서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정 신부의 나이는 35세요,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남짓이었다.
‘용심’으로도 불렸고 또 순교 당시 정3품 당상역관(堂上譯官)의 높은 벼슬에 있었던 유진길 아우구스티노는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특히 철학과 종교 문제에 관심을 갖고 세상만물의 기원과 종말에 대해 명확히 알고자 10년 동안 불교와 도교를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만 권의 책과 동서고금의 학문이 가슴에 가득한 사람’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칭찬과는 달리 유진길은 오히려 진리를 찾지 못해 방황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23년 우연히 「천주실의」의 일부분을 구해 읽고는 사방에 수소문한 끝에 한 교우를 만나 천주교 진리를 터득하고 곧 입교했다.
1824년 동지사(冬至使)의 수석 역관으로 북경에 가서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 후 유 진길은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담당하며 전후 8차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면서 정하상 바오로, 조신철 가롤로와 함께 성직자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는 교황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전달 했고 그 결과 유방제 신부, 나(모방) 신부,정(샤스땅) 신부, 범(앵베르) 주교 등이 입국하게 되었다. 유진길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7일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는 관헌으로부터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의금부에서 그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마침내 유진길은 9월 22일 정하상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4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 했다. (48은 아들)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태어난 허계임 막달레나는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 온 시누이 이매임 데레사로부터 천주교를 알게 되자 이정희와 영희 두 딸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다. 1839년 3월, 허계임은 성사를 받으러 당시 시흥지방 봉천(奉天)에서 상경하여 시누이와 두 딸이 살고 있는 집에 머물게 되었다.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누이와 두 딸 그리고 김성임,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하고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헌했다.
포청과 형조에서 허계임은 배교를 강요하는 수차의 형문을 당했으나 다 이겨내고,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니 그의 나이 67세였다. (19는 시누이, 22, 28은 딸, 18, 19, 22, 23, 28과 함께 자수)
서울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남이관은 18세 때 교우인 조증이 바르바라와 결혼했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다.
아버지 남필용(南必容)은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귀양가 그곳에서 죽었고, 남 이관은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귀양갔다가 30년만인 1832년 풀려 나와 처가인 이천(利川)에서 살았다. 그후 상경하여 처가가 정하상 바오로와 인척인 관계로 그의 신부영입운동을 도와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맞아들이게 했고,
그에게서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은 후 회장으로 임명되어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이관은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처가인 이천으로 내려가 숨었다. 그러나 9원 16일에 체포되어 서울 포청으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간단한 신문을 받은 후 김제준과 함께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의금 부로 이송되어 여기에서 유진길, 정하상과 함께 신문을 받고, 다시 형조로 이송되어 거기서 사형을 선고받았다.9월 26일 남이관은 8명의 교우와 함께 6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했다. (51은 아내)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 김 율리에타는 시골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했다. 17세 때 혼담이 있었으나 수정할 결심을 하고 스스로 머리칼을 다 뽑아 버렸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인해 부모는 냉담하여 낙향했다.
하지만 김 율리에타는 혼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히게 되었다. 그후 10년 동안 궁녀 생활을 했는데 궁에서는 천주교를 믿을 수가 없어서 결국 궁에서 나와 교우들의 집에서 일해주며 살았다.
품삯을 모아 집 한 칸을 마련하고 거기서 혼자 살면서 열심히 수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또 늘 언행에 조심하였으며 그래서 교우들로부터 '절대로 나쁜 짓 하지 않을 여인'이라고 불렸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점점 치열해 지자 김 율리에타는 7월에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끝에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5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 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 전경협은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대궐로 들어가 궁녀가 되었다. 그후 평소 친교가 있던 궁녀 박희순(루치아)을 따라 입교했다. 박희순이 자유스럽게 천주교를 실천하고자 궁을 나오게 되자 박희순을 따라 그녀도 궁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머물면서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1839넌 4월 15일 전경협은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자기 집에 숨어 있던 박희순, 박큰아기(마리아)와 함께 체포되었다. 궁녀였다는 이유로 건 경협은 포청과 형조에서 더욱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참아냈다. 이때 조그만 관직을 잃을까 두려워한 오빠는 관리를 매수하여 누이를 독살시키려했으나 전경협은 독이 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렇게 힘든 옥살이를 5개월 동안 참아낸 후 9월 26일 전경협은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51세였다 (11, 25와 함께 체포됨)
‘덕철(德喆)’로도 불리던 조신철 가롤로는 천민 출신으로 강원도 회양(淮陽) 의 상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또 아버지가 얼마 안되는 재산을 탕진하자 한때 중이 되었다. 23세 때 동지사(冬至使)의 마부가 되었다.
30세 쯤에 유진길, 정하상 등과 알게되어 입교했고, 북경에서 성세․견진․ 고백․성체성사를 받고 계속 동지사의 마부로 일하면서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취하며 성직자영입을 도와 나(모방) 신부, 정(샤스땅) 신부, 범(앵베르) 주교 등을 입국시켰다.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조신철은 처가로 피신했다.
그러나 6월 어느날 외출했다가 처가로 돌아가던 중 처가를 습격한 포졸들이 어린 젖먹이까지 잡아가는 것을 보고,포청까지 따라가 자헌했다.포청에서의 신문 중 그가 처가집에 숨긴 성물과 성서 때문에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해야 했고,
곧이어 체포된 유진길, 정하상과 함께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고 형리 들에게 더욱 가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어떠한 형벌과 고문에도 굴 하지 않았고 마침내 9월 26일 45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했다. (70은 아내, 50은 장인, 64는 장모)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시명'으로도 불리는 김제준은 충청도 면천 땅 솔뫼 에서 태어났다. 1814년 순교한 할아버지 김진후(金震厚)와 큰아버지의 권면 으로 입교한 후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용인(龍仁)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 무렵 나(모방) 신부를 찾아가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고 용인으로 돌아와 회장으로 활약했다. 1836년 15세 된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맡겨 마카오의 신학교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 해 8월 김제준은 사위 곽씨를 앞세운 밀고자 김순성 (金順性, 일명 여상) 일당에 의해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제준은 아들을 외국으로 보낸 국사범으로 간주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고 한때 배교하는 허약을 보였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된 후 배교를 취소하고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이때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1은 아들)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난 박봉손은 15세쯤에 시골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남편과 시부모를 차례로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계모 김 체칠리아의 권고와 가르침으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친정은 원래 계모의 오빠인 김사문의 집이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가난한 여러 가구의 교우들이 모여 살고 있어 늘 번잡했으나 박 봉손은 그런 가운데도 솔선 하여 궂은 일과 천한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함께 살던 교우들은 모두 피신하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고 있던 중 7월초 마침 집에 들렸던 외삼촌과 함께 체포 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박봉손은 매우 흑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켜냈다.
그는 형관에게 "여기까지 온 것은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 위해 온 것이니 국법대로 죽여 주십시오"하고 말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니 그의 나이 44세였다.
홍금주 페르페투아는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났다. 약 10세 때 입교하였고, 15세 때 외교인과 결혼한 후 냉담했다. 그러나 남편을 잃은 후 교우들의 권면으로 신앙을 다시 찾았을 뿐더러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얹혀 살면서 가장 천한 일을 맡아하고 또 병약자들을 돌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홍금주는 최 필립보라는 교우의 집에 있다가 이해 4월 최 필립보의 제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고문과 형벌을 받았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형조 옥에서 홍금주는 서너 차례 염병에 걸려 고생했으나 조금이라도 낫기만 하면 다른 교우들의 상처를 닦아주고 처매주며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었고 이로인해 함께 갇힌 교우들은 홍금주를 친누이처럼 생각했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사랑과 봉사로써 일관하던 홍금주는 옥살이 6개월 만인 9월 26일 36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 김효임 골룸바는 서울 근교 밤섬이란 곳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후 전가족이 다 함께 입교하고 유방제 신부 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두 여동생 김 효주(아녜스), 김 글라라와 함께 수정을 결심하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다.
매주 두 차례의 재(齋)를 지키고, 가난한 이들을 도우니 그 덕행과 아름다운 모범에 감탄하지 않는 교우들이 없었다. 그러던 중 1839년 4월 김효임은 그간 이사한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에서 동생 김효주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효임은 남동생 김 안토니오의 피신처와 교회서적을 감춘 곳을 대라는 관헌에 의해 동생과 함께 매우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두 자매는 소위 학춤이라는 혹형 외에도 달군 쇠붙이로 몸의 열세 군데나 지져대는 혹형을 받았고, 또 옷을 벗긴 채 남자 죄수의 방에 넣어졌다. 그러나 갑자기 두 자매의 몸에 신비스런 힘이 생겨 흉악한 죄수들이 두 자매를 범할 수 없었다.
이렇게 포청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김효임은 형조로 이송되어 형조 판서의 신문에 영리하고 겸손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켰다. 신문이 끝나자 효임은 포청에서 겪은 법외의 고문과 능욕에 항의했다. 이 때문에 포청에서 능욕을 가한 포졸들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후 5개월 동안 옥에서 병과 고통과 싸우며 지내던 김효임은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자신보다 20여 일 먼저 순교한 동생의 뒤를 따라갔다.(30은 동생)
김 루치아는 서울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불구 였다.그래서 '꼽추 루치아'로 불렸다.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나 남편과 가족들이 모두 외교인이라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다.
결국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얹혀 살면서 병자들을 돌보며 어떠한 천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71세의 고령이라 형벌은 받지 않았으나 온갖 교활한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김 루치아는 한결같이 배교를 거부하고, 마침내 7월 어느날 포청에서 기력이 쇠하여 숨을 거둠으로써 옥사, 순교하였다.
시골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와 함께 입교한 이 가타리나는 교리에 밝지 못한 부모 때문에 14세 때 조(趙)씨란 성을 가진 외교인과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가타리나의 권고로 남편은 대세를 받고 사망하였다. 1838년 말 고향에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가타리나는 가산을 버리고 자녀들과 함께 상경하여 조 바르바라 의 집에서 같이 살았다. 1839년 6월 주인집 세 모녀, 큰딸 조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딸과 함께 문초를 받고 한 차례의 주뢰질을 당한 후 옥에 갇혔으나 옥이 워낙 비좁고 불결하여 체포된 지 3개월 후인 9월 어느 날 57세의 나이로 염병을 얻어 옥사. 순교했다. (47은 딸, 47, 56, 66과 함께 체포됨)
어려서 어머니 이 가타리나에게 천주교를 배워 입교한 조 막달레나는 외교인 친척들의 반대로 7, 8세경부터 교우 집안인 외가에 가서 살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8세 때 혼담이 오가자 수정을 결심하고는 혼담을 피해 서울로 와 5, 6년 을 지냈다.
그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외교인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등 열심히 교회일을 도왔다. 그러던 중 1838년 말 고향에서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가산 을 버리고 서울의 조 바르바라의 집으로 피신했다.
1839년 6월 주인집 세 모녀, 어머니 이 카타리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한 차례의 신문과 주뢰질을 당한 후 옥으로 끌려간 조 막달레나는 3개월 동안 비좁고 불결한 옥살이 끝에 33세의 동정녀로 염병을 얻어 옥사, 순교했다. (46은 모친, 46, 56. 66과 함께 체포됨)
유진길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난 유대철은 어려서 아버지의 모범을 따라 입교한 후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천주교를 미워하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으나 그때마다 항상 어머니와 누나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감동적인 순교를 하자 유대철은 순교를 결심하고 자헌했다. 포청에서 13세의 어린 나이로는 견디기 힘든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허벅지의 살을 뜯어내며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하고 으름장을 놓는 형리 에게 "믿고 말고요.그렇게 한다고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 하고 대답 하자 화가 난 형리는 다시 시뻘겋게 단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하니 "자요"하고 입을 크게 벌려 형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포청에서 총 14회의 신문을 받고 100여 대의 매와 40여 대의 치도곤을 맞아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유대철은 항상 만족스럽고 평화롭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형리들은 유대철을 배교시킬 수 없게 되자 10월 31일 포청옥에서 몰래 목을 졸라 죽였다. 그는 103위 성인 중 가장 어린 순교자이다.(35는 부친)
명도회장 정약종(丁若鍾)의 부인이며 정하상 바오로의 어머니인 유 체칠리아는 시골에서 태어나 2O세 때 상처한 정약종과 결혼했다.남편의 권면으로 결혼한 지 3년만에 입교했고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0년 살고 있던 경기도 양근(楊根) 지방에 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사했으나 이듬해 신유박해로 가족이 모두 체포되었다. 남편과 전실 아들 정철상 (丁哲祥)의 순교 후 재산을 몰수당하고 석방되어 마재의 시동생 정약용(요한)의 집에서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몹시 궁핍하게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유 체칠리아는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조카의 피신 권유에 "나는 항상 순교를 원했으니 내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하고 싶네" 하고 거절하고 7월 11일, 아들 정하상(바오로), 딸 정정혜(엘리사벳)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유 체칠리아는 72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태장 230대를 맞는 혹형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냈다. 노인을 사형시키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어 있어서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3일 고문과 형벌의 여독으로 옥사, 순교했다. 그녀는 103위 가운데 최고령의 순교자이다. (2, 54의 어머니)
일명 '여칠'. 최창흡은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교리를 배워 1801년 신유박해로 형 최창현(崔昌顯)이 순교한 후로는 외교인과 다름없는 냉담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30세경 교우인 손소벽(막달레나)과 결혼한 후로는 새로 교리를 배우고 또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아내와 함께 대세를 받았고 이때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창흡은 순교를 결심했다. 이해 6월 친정으로 피신해 온 딸 최영이(바르바라)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사위 조신철(가롤로)이 맡겨둔 교회서적과 성물 때문에 7차례의 신문, 주뢰질, 주장 외에도 태장 150도를 맞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형조에서도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결국 자신의 소원대로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64는 아내, 70은 딸, 40은 사위 )
[앗↑나]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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