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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벽을 열며 / 빠다킹신부님의 묵상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08-29 조회수847 추천수3 반대(0) 신고

 

 

               2005년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제1독서 예레미야 1,17-19

 

그 무렵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나의 백성에게 일러 주어라. 내가 시키는 말을 모두 전

 

하여라. 이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다가 그들 앞에서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리

 

라.

 

유다의 임금이나 고관들, 사제들이나 지방 유지들과 함께 온 나라가 달려들어도, 내

 

가 오늘 너를 단단히 방비된 성처럼, 쇠기둥, 놋담처럼 세우리니, 아무리 덤벼도 너

 

를 당하지 못하리라. 내가 네 옆에 있어 도와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복음 마르코 6,17-29

 

그때에 헤로데는 일찍이 사람을 시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그것은 헤로데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요한이 헤로데

 

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누차 간하였기 때문이

 

었다.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

 

지 못하였다.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여 보호해 주

 

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간할 때마다 속으로는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 왕이 생일을 맞아 고관들과 무

 

관들과 갈릴래아의 요인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나와서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매우 기쁘게 해 주었다.

 

그러자 왕은 그 소녀에게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 주마.” 하고

 

는“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 하고 맹세

 

하였던 것이다.

 

소녀가 나가서 제 어미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고 의논하자 그 어미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여라.” 하고 시켰다.

 

그러자 소녀는 급히 왕에게 돌아와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그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곧 경비병 하나를 보내며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감옥으로 가서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다가 소

 

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다시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 뒤 소식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장사를 지냈다.

 

 





며칠 전, 성지 내에서 울고 있는 한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특이하게도 엄마를 마구 때리면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엄마를 저렇게 때려? 이런 고얀 놈을 봤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아이 앞으로 다가가 물었습니다.

“누가 성지에서 울고 있는거야? 왜 울고 있니? 그리고 엄마는 왜 때리니? 그러면 엄

 

마가 아프잖아?”

 

그런데 그 아이는 자신에게 전혀 잘못이 없다는 듯이,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가 약속을 안 지키잖아. 왜 약속을 안 지켜? 잉잉~~”

알고 보니 엄마가 성지에 가서 음료수를 사주겠다고 말을 했나 봅니다. 그런데 마침

 

성지의 자판기가 고장이 났었고요. 따라서 엄마는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던 것이지

 

요. 하지만 그 꼬마는 엄마가 약속을 안 지킨 것이라면서 마구 화를 내고, 엄마를 때

 

리면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엄마. 엄마가 정말로 잘못한 것일까요? 물론 약속을 지키는 것

 

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사랑과 신의가 없다면, 약속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즉, 약속을 실천하는 사람이나 약속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사

 

람이 모두 똑같이 사랑과 신의를 간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약속을 실천하는 사람만 그런 사랑과 신의를 간직하면 그만이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하면서, 화

 

를 내고 때로는 폭력적으로 돌변하기까지 한다는 것이지요. 마치 앞선 이야기의 그

 

꼬마처럼, 무조건 그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한 것이라고 다그

 

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는지요? 이처럼 자기만을 위한 결과를

 

바라는 약속, 그래서 이기심이 가득 찬 약속. 그러한 약속 가운데에는 아마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안에는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과

 

신의’가 없으니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헤로데가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

 

렇게 약속을 잘 지킨 헤로데가 과연 훌륭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그의 약속 실천

 

안에는 사랑과 신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체면만을 위한 마음, 그러면서 자신

 

을 합리화하는 데만 급급합니다.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라면서……. 그리고 약속을

 

받아들이는 헤로디아 역시 사랑과 신의가 없는 약속의 실천을 강요합니다. 즉, 헤로

 

디아 모녀는 자신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세례자 요한을 제거할 목적으로 헤로데

 

에게 약속의 실천을 강요합니다.

이러한 약속과 그 약속의 실천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역시 헤로디

 

아 모녀처럼 그리고 헤로데처럼 사랑과 신의가 없는 약속을 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

 

다. 특히 주님과 약속을 할 때 그렇지요.

 

"주님, 제가 당신께 이런 약속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단서가 붙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꼭 들어 주셔야 해요."

 

이런 우리들의 모습과 헤로데, 헤로디아 모녀 모습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요?

 


주님께 하는 약속을 실천할 때는 어떤 사심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그 안에

 

사랑과 신의를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헤로데,

 

헤로디아 모녀와 같이 더 큰 죄를 범하게 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강요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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