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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와 함께~(성 김대건 안드레아)
작성자조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01 조회수1,239 추천수8 반대(0) 신고
    ◈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교회의 첫 번째 신부로서 거룩하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1821년 충청도 솔뫼, 구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김 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 나(모방) 신부는 마침내 그를 다른 소년 두 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때는 1836년, 그의 나이 15세일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최 양업 (崔良業, 토마스), 최 방제 (崔方濟, 프란치스코: 수학 중 병사) 등 두 소년과 함께 6년간이나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현지에서 발생한 민란 때문에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어쨌든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어 우선 요동 지방에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했다.그리하여 그는 1743년 음력 11월, 변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때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꼬를 만나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듣는다.
그의 말인즉 국내에는 아직 박해 위험이 남아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도 마련 되어 있지 않은 만큼 그들의 입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으로 라도 입국할 것을 결심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했다.
김 대건은 의주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요동으로 되돌아왔으며 한편 북경으로 갔던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에서 그 이듬해 김 대건과 다시 만나고 주교의 입국 시기를 음력 11월로 잡고 헤어 졌다.
그러는 동안 김 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약속 시기에 마중 나온 김프란치스꼬 일행과 같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고 주교는 동반치 않았다.
김 부제는 서울에 들어오자 수 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 준비를 갖추는 데 진력했고 마침내는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품을 받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후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고 주교와 안(다블뤼) 신부를 배로 모시고 황해를 건너 조선 땅인 강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약 2개월 간 휴식 후 곧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김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위대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친과도 상봉하여 얼마간 같이 머무를 수 있었으나 1846년 음력 4월이 되자 주효의 명에 따라 황해도지방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구라파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 황해도 지방에의 항해길이 마지막 그의 순교길이 되고 말았다.그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 에서 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때마침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김 신부의 "양반 배를 어찌 징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 며 문초 끝에 교회 일이 드러나자 마침내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중국 배에서 압수된 주교 편지가 "네 글씨와 다른데, 누구의 것이냐" 라는 문초에 "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이며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는 기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의 넓은 견식과 당당한 태도는 대관들로 하여금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는 말들을 하게끔 했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 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김 신부의 처형은 9월 16일 새날터에서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에따라 진행되었다.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이 때 피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41은 부친)
    ▒ 얼마나 가슴으로 살고 있는가? ▒
    
    내 삶은 타고 남은 초가 아니다.
    인생을 완전히 불태운 사람으로 세상을 떠나고 싶다.
    나는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잘 살았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그 말을 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자.
    지금 이 순간 삶의 한가운데로 
    그 말을 끌어내자.
    
    - 알렌코헨의 <내 것이 아니면 모두 버려라> 중에서 -
    우리는 각자 살아야 할 삶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겪는 모든 모험은 그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배움의 일부분 입니다. "더 열심히 살 것을, 진정 더 멋지게 살수 있었는데...." 훗날 후회되지 않는 삶을 위해서 조용하면서도 강하게, 삶의 현장의 아픔을 잘 다스리며, 꿈과 희망을 가지고, 모든 걸 가슴으로 포용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겠습니다.
    - 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

      함께 기도하고, 함께 연구하고 싶은...[앗↑나]네 집
    
    《소스입니다》
    <PRE><FONT style="FONT-SIZE: 13pt" face=돋움체 color=brown><B><UL>
    ◈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PRE><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움체 color=brown>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BR>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BR>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BR>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BR>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BR>
    ◆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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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BR>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BR>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BR>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BR>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BR>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PRE></UL>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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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김대건 안드레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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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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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첫 번째 신부로서 거룩하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BR>
    1821년 충청도 솔뫼, 구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김 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 나(모방) 신부는 마침내 그를 
    다른 소년 두 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때는 
    1836년, 그의 나이 15세일 때였다. 
    <BR>
    그는 그곳에서 최 양업 (崔良業, 토마스), 최 방제 (崔方濟, 프란치스코: 수학
    중 병사) 등 두 소년과 함께 6년간이나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현지에서 발생한 
    민란 때문에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BR>
    어쨌든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어 우선 요동
    지방에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했다.그리하여 
    그는 1743년 음력 11월, 변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때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꼬를 만나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듣는다. 
    <BR>
    그의 말인즉 국내에는 아직 박해 위험이 남아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도 마련
    되어 있지 않은 만큼 그들의 입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으로
    라도 입국할 것을 결심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했다. 
    <BR>
    김 대건은 의주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요동으로 되돌아왔으며 한편 북경으로 갔던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에서 
    그 이듬해 김 대건과 다시 만나고 주교의 입국 시기를 음력 11월로 잡고 헤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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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는 동안 김 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약속 시기에 마중 나온 김프란치스꼬 
    일행과 같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고 주교는 동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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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부제는 서울에 들어오자 수 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 준비를 갖추는 데 진력했고 마침내는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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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그곳에서 신품을 받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후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고 주교와 안(다블뤼) 신부를 배로 모시고 황해를 건너 조선 
    땅인 강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약 2개월 간 휴식 
    후 곧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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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위대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친과도 상봉하여 얼마간 같이 머무를 수 있었으나 1846년 음력 4월이 
    되자 주효의 명에 따라 황해도지방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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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라파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 황해도 지방에의 항해길이 마지막 그의 
    순교길이 되고 말았다.그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
    에서 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BR>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때마침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김 
    신부의 "양반 배를 어찌 징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
    며 문초 끝에 교회 일이 드러나자 마침내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BR>
    그는 중국 배에서 압수된 주교 편지가 "네 글씨와 다른데, 누구의 것이냐"
    라는 문초에 "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이며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는 기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의 
    넓은 견식과 당당한 태도는 대관들로 하여금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는 말들을 하게끔 했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 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BR>
    김 신부의 처형은 9월 16일 새날터에서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에따라 
    진행되었다.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이 때 피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41은 부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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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마나 가슴으로 살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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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은 타고 남은 초가 아니다.
    인생을 완전히 불태운 사람으로 세상을 떠나고 싶다.
    나는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잘 살았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그 말을 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자.
    지금 이 순간 삶의 한가운데로 
    그 말을 끌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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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렌코헨의 &lt;내 것이 아니면 모두 버려라&gt; 중에서 - 
    <BR>
    우리는 각자 살아야 할 삶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겪는 모든 모험은 그 삶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배움의 일부분 입니다.
    "더 열심히 살 것을, 진정 더 멋지게 살수 있었는데...." 
    훗날 후회되지 않는 삶을 위해서 조용하면서도 
    강하게, 삶의 현장의 아픔을 잘 다스리며, 
    꿈과 희망을 가지고, 모든 걸 가슴으로
    포용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겠습니다. 
    <BR>
                          - 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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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기도하고, 함께 연구하고 싶은...[안나]</B>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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