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그 아까운 포도주를...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01 조회수783 추천수6 반대(0) 신고





연중 제 22주간 금요일 말씀(골로 1, 15-20; 루가 5, 33-39)

하늘이 청명하고 높아졌다.
들판의 곡식들과 가로수들이 가을이 왔다고 속삭여준다.
저녁이면 풀벌레 소리로 요란하다.

수줍어 머리 숙이고 있던 뒷동산의 할미꽃들이
이젠 모두 백발을 풀어헤치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려니까 풀섶에서 방아깨비들이 폴짝 폴짝 뛰어 나온다.
그러고 보니 풀 속에는 온갖 곤충들과 벌레들이 꾸물거리고 있어
함부로 밟기도 겁이난다.
풀 숲은 생명의 산실이라는걸 새삼 깨닫고 물러난다.

생명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던 몇년 전이다.
아파트 철난간에 쌓인 흙먼지 위에 풀씨 하나가 날아와 싹을 틔웠다.
벼랑끝같은 내 목숨이 연상되어 눈물을 흘렸다.
.
.
.
치유의 은총을 체험한 후,
여린 민들레 꽃 한 포기에도.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소리에도.
흐르는 구름 한 송이에도.

생물에도 무생물에도....
그 순간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왈칵 왈칵 눈물이 나왔었다.

건강할 때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그 생명의 잔치에 나를 초대하신 분에 대한,
감사와 찬미가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을 벅차게 했던 것이다.

'신랑과 함께 있는 잔치!'
그렇다.
주님과 함께 하는 세상,
그것이 잔치 자리임을 그때만큼 실감한 적이 있었을까?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주님 안에서
그분과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보시니, 참 좋았다."
그렇다.
분명히 그랬었다.
.
.
.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눈이 열려
세상 만물들을 조화로운 창조 세계의 동반자로 느낄 수 있다면.....
내 곁의 모든 동료들을 나의 거들짝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또다시 세상이 "참 좋다!" 는 최초의 감탄사로 둘러싸인 잔치 자리가 될 수 있을텐데...

그러나 나는 헌 가죽부대인지....
주님이 어렵게 만들어주신 그 아까운 포도주를 자꾸자꾸 흘려버리곤 한다.
어머니가 어렵게 청을 넣어 만들어주신 그 질좋은 포도주를 말이다.

 

이 가을,

무엇보다도,

더도덜도 말고,

그때만큼의 감사와 그때만큼의 찬미와 그때만큼의 겸손으로 마름질한

새 가죽부대를 마련해야겠다.

그 좋은 포도주를 다 흘려버리기 전에. 




Try To Remember / Giovanni Marra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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