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 이정희 바르바라,이연희 마리아,김효주 아네스,최경환 프란치스코시여~!
작성자조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10 조회수707 추천수9 반대(0) 신고
    
    ◈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이정희 바르바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경기도 봉천에서 태어난 이정희 바르바라는 과부가 되어 돌아온 고모 이 매임 
(데레사)의 권면으로 어려서 어머니 허계임, 동생 영희와 함께 입교했다. 
입교 이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며 수정할 것을 결심했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 청년과의 결혼을 강요하자 병을 핑계삼아 3년을 버턴 후 
교우 청년과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한지 2년만에 남편을 잃은 후 잠시 친정에 있다가 신앙생활을 위해 집을 떠나 서울의 고모 이 매임의 집에 와서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 시초에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고 감동하여 당시 이 매임의 집에 머물고 있던 김성임, 김 루치아 그리고 어머니, 동생, 고모 등과 함께 순교를 결심한 후 4월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에게 자헌하였다.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41세였다. (36은 모친, 22는 동생, 19는 고모, 16은 조카, 18,19, 22, 23. 36과 함께 자수)
 
†성녀 이연희 마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이연희는 남명혁의 부인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사리에 밝았다. 회장인 남편을 
도와 공소(公所)를 세워 주교와 신부를 맞아들이고 또 교우들을 가르쳐 성사 
를 준비시키며 항상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12살 된 어린 아들의 고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는 주님의 영광입니다"고 하며 모정을 억누르고 자신도 혹형과 고문을 감수하였다.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3차의 형문을 받았으나 역시 굴하지 않았다. 드디어 사형을 선고 받아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 형을 받고 3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2는 남편)
 
†성녀 김효주 아네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언니 김효임과 같이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김효주는 서울 근교 밤섬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그후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로 이사해 살았다. 
아버지를 여읜 후 온 가족과 함께 입교하여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언니 김효임, 동생 김 글라라와 함께 수정(守貞)을 결심하고는 아름다운 덕행과 극기로써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5월 3일 김효주는 언니 김효임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잔인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형조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언니보다 20여 일 먼저 즉 1839년 9월 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44는 언니 )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영눌’ 또는 ‘치운’으로도 불리던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 
(洪州)지방 다랫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의 창설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온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 다니다가 가족들을 설득하는데 성공,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 했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城),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했다.
1836년 아들 최양업(崔良業)을 나(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했다. 그는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교우촌 교우와 가족 도합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해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도 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순교했다. 그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 이런 사람 하나 있었으면... ▣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 <다시 피는 꽃> 중에서-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습니다. 친구속에 섞여 있는데 친구가 없습니다. 사랑은 흔한데 사랑이 없습니다. 마음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와닿지 않으면 손을 잡아도, 가슴을 안아도, 몸을 섞어도 따뜻해지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 하나 있으면 사는 것이 행복합니다.
- 고도원의 아침편지입니다 -
        함께 기도하고,연구하고 싶은...[앗↑나]가요*^^*
    소스입니다.*^^* <PRE><FONT style="FONT-SIZE: 13pt" face=돋움체 color=brown><B><UL> ◈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PRE><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움체 color=brown>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BR>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BR>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BR>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BR>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BR> ◆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BR>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BR>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BR>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BR>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BR>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BR>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PRE></UL></B>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음체 color=#32449c> <B>†성녀 이정희 바르바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28.jpg"> 경기도 봉천에서 태어난 이정희 바르바라는 과부가 되어 돌아온 고모 이 매임 (데레사)의 권면으로 어려서 어머니 허계임, 동생 영희와 함께 입교했다. 입교 이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며 수정할 것을 결심했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 청년과의 결혼을 강요하자 병을 핑계삼아 3년을 버턴 후 교우 청년과 결혼했다. <BR> 그러나 결혼한지 2년만에 남편을 잃은 후 잠시 친정에 있다가 신앙생활을 위해 집을 떠나 서울의 고모 이 매임의 집에 와서 살았다. <BR> 1839년 기해박해 시초에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고 감동하여 당시 이 매임의 집에 머물고 있던 김성임, 김 루치아 그리고 어머니, 동생, 고모 등과 함께 순교를 결심한 후 4월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에게 자헌하였다.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41세였다. (36은 모친, 22는 동생, 19는 고모, 16은 조카, 18,19, 22, 23. 36과 함께 자수)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음체 color=#32449c> <B>†성녀 이연희 마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29.jpg"> 이연희는 남명혁의 부인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사리에 밝았다. 회장인 남편을 도와 공소(公所)를 세워 주교와 신부를 맞아들이고 또 교우들을 가르쳐 성사 를 준비시키며 항상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BR>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12살 된 어린 아들의 고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는 주님의 영광입니다"고 하며 모정을 억누르고 자신도 혹형과 고문을 감수하였다. <BR>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3차의 형문을 받았으나 역시 굴하지 않았다. 드디어 사형을 선고 받아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 형을 받고 3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12는 남편)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음체 color=#32449c> <B>†성녀 김효주 아네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30.jpg"> 언니 김효임과 같이 동정녀인 동시에 순교자인 김효주는 서울 근교 밤섬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그후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로 이사해 살았다. 아버지를 여읜 후 온 가족과 함께 입교하여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BR> 언니 김효임, 동생 김 글라라와 함께 수정(守貞)을 결심하고는 아름다운 덕행과 극기로써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5월 3일 김효주는 언니 김효임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잔인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형조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BR> 언니보다 20여 일 먼저 즉 1839년 9월 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44는 언니 )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음체 color=#32449c> <B>†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31.jpg"> ‘영눌’ 또는 ‘치운’으로도 불리던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홍주 (洪州)지방 다랫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의 창설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온 집안이었다. <BR>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 다니다가 가족들을 설득하는데 성공,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 했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城),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했다. <BR> 1836년 아들 최양업(崔良業)을 나(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했다. 그는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교우촌 교우와 가족 도합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BR>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해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도 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순교했다. 그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brown><B> ▣ 이런 사람 하나 있었으면... ▣ <PRE><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움체 color=brown>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BR>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BR>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BR> - 도종환 <다시 피는 꽃> 중에서- <BR>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습니다. 친구속에 섞여 있는데 친구가 없습니다. 사랑은 흔한데 사랑이 없습니다. 마음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와닿지 않으면 손을 잡아도, 가슴을 안아도, 몸을 섞어도 따뜻해지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 하나 있으면 사는 것이 행복합니다. <BR> - 고도원의 아침편지입니다 - </B> <PRE><UL><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움체 color=#32449c> <PRE><UL> <B><FONT style="FONT-SIZE: 9pt" face=돋음체 color=green> <UL><UL><A href="http://cafe.daum.net/EnglishAnna" target=blank> <IMG src="http://www.imagestation.com/picture/sraid53/p1267c37ffdbfe50aca62ebc9cb2ddfb0/fc8b9715.gif" ? grpid='LOiA&amp;fldid=AqlR&amp;dataid=203&amp;grpcode=asoul&amp;realfile=thumb_h16%255B1%"'></A></UL> 함께 기도하고,연구하고 싶은...[앗↑나]</B>가요*^^* <EMBED style="WIDTH: 302px; HEIGHT: 66px" src=http://www.positive.co.kr/community/data/Cecilia- The_prayer-6.wma width=300 height=45 type=audio/x-ms-wma SHOWSTATUSBAR="1" enablecontextmenu="false" SHOWCONTROLS="1" LOOP="true" volume="0" AUTOSTART="1" AllowScriptAccess="never" autostart="true" hidden="tru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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