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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모방 베드로,샤스땅 야고보시여~!
작성자조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11 조회수711 추천수11 반대(0) 신고

†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명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 2대 교구장. 주교로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같이 선교에 종사하던 나(모방),정(샤스탕) 두 신부와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한강변 새남터에서 목을 잘려 순교하였다. 

그는 조정에 의해 대박해가 일어나 더 이상 전교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은 물론 나중에는 두 동료 신부들에게까지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라는 말로 자헌을 권유하였다.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브뤼기에르)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교황청에 의해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그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만에,그리고 교회 창설 53년만에 비로소 전교 체제를 갖추 었으며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파에 힘쓴 결과 신자수는 1839년 초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그는 또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말미암아 성공하지 는 못하였다.
범 주교는 1797년 4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빠리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다음해 3월 파리를 떠나 조선에 입국하기까지 중국 사천(四川)교구에서 10여 년간 사목활동에 종사하였다.
1839년 대 박해가 일어났을 때 지방을 돌아보고 있던 범 주교는 조정에 의해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 사실이 알려져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고 교우들에 대한 박해가 가열되자 하는 수 없이 수원에서 가까운 바닷가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기었다.
여기서 그는 나, 정 양신부를 불러 두 사람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않아 단념하고,몸조심을 당부하며 두 사람을 각기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그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그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나아가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으며 나 신부와 정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군문효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성 모방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명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 그는 1836년 1월 입국하여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까지 3년 9개월 간 헌신적인 포교활동을 폈으며 특히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된 김 대건과 최 양업, 최 방제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에 
유학시킨 것으로노 유명하다. 

프랑스 베시에서 태어난 나(모방) 신부는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어 그 이듬해 동양에 진출, 중국을 거쳐 1836년 1월 의주의 변문을 통해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그는 서울에서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순회, 전교하였다.또한 그는 이 땅에 들어오자 곧 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 양업을, 3월 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이들 세 소년에게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장차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던 중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신부 유방제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시켰다.
그후 나 신부는 이들 세 소년을 전송한 교우들과 만나 1837년 1월 무사히 서울에 들어온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손을 나눠 각 도의 흩어진 교우촌을 찾아 밤낮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가며 전교에 힘쓴 결과 입국 당시 불과 4천 명이었던 신자수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한 1837년 말에는 갑절이 넘는 9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39년 기해 대박해가 일어나고 서양인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점차 소문으로 퍼져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마침내 순교의 날이 닥쳐온다.
범 주교는 박해가 일어나 신변이 위험하게 되자 처음에는 자신만이 자수하고 두 신부(나 신부, 정 신부)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고했으나 형편이 그렇게 못되었고 결국은 범 주교에 이어 두 신부도 자진하여 포졸에게 몸을 맡겨 관가에 자수하였다.
그는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범 주교, 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성 샤스땅 야고보,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명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이 땅에 두 번째로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로 1839년 기해박해 때 범 주교,나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정 (샤스탕) 신부는 1803년 10월, 프랑스 태생으로 1827년 1월 빠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었으며 같은 해 4월 동양 포교지의 하나인 페낭 섬으로 떠났다. 그는 그곳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마침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게 되자 함께 동행하기를 자원,1833년 5월 그곳을 떠났다.
그후 3년간을 중국 대륙과 몽고,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조선 입국의 기회를 기다렸으나 쉽게 뜻을 이를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소 주교는 입국도 못한 채 만주 땅에서 병을 얻어 목숨을 잃었으며 1836년 1월 조선 입국에 성공한 동료 나 신부로부터의 기별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1836년 12월 나신부의 기별을 받고 의주 변문으로 간 정신부는 마카오로 유학가는 김대건 등 세 소년 신학생을 전송하던 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무사히 국경을 넘어 이듬해인 1월 서울에 도착했다.
정 신부는 서울에 도착하자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손을 나누어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집행했다. 정 신부 등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도 여의치 않아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공복을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를 듣고 미사를 드린 다음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안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정 신부는 한때 중병을 앓게 된 나 신부를 서울까지 올라와 간호해야 하는 어려운 일도 겪었으나 다행히 무사했으며 1837년 12월에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에 성공하여 전교활동은 차츰 본격화되어갔다.
그러나 1839년 몰아닥친 기해 대 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의 피로 물들였고, 정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해 9월 21일 새남터에서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정 신부의 나이는 35세요,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남짓이었다.


삼성산 사적지 기념비 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가 1836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묘자리이다.

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곳은 세 분의 순교성인이 묻힘으로써 명실공히 삼성산(三聖山)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성직자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의 천주 교회는 중국 북경교구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된다. 이어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인 모방.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 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이들 세 성직자는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 였다.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중 외국 선교사의 입국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고 가엾은 어린양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목자들은 가슴 깊이 피눈물을 흘린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중 모방,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한 다음 각자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앵베르 주교, 모방신부, 샤스탕신부의 유해가 묻혀 있는 묘소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인해 거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그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데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 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38년 전, 주문모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 끝에 이슬이 되고 만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힌다. 교우들이 유해를 거두고자 애쓴 지 나흘째 되는 날 세 명의 교우가 시체를 훔쳐 내려다 그중 한명이 붙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그 후 스무 날 가량 지난 뒤 7-8명의 교우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유해를 거두는 데 성공한다. 교우들은 유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老姑山)에 임시로 매장했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파수를 피해 유해를 훔쳐 낸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한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순교하게 되니 1868년 3월 절두산에서의 일이다.

사적지로 오르는 오솔길 이 때 가까스로 화를 면한 박순집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이 묘소를 고증해 명동 성당 지하묘소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산 증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순교한 가족들의 시신을 찾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 신부 등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내 용산 왜고개에 이장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4년간 박순집의 가문은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했고, 자신은 1982년 82세를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인천 교회의 창설에 여생을 바쳤다.16세 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들어가 우리 나라 최초의 수녀가 된 박 사베리오(1872-1966년)는 박순집의 막내딸이기도 하다.

한편 박순집 일가를 기념하기 위한 비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정원에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사적지 바로 밑에 있는 약수터, 산길을 오르며 흘린 당을 잠시 식힐 수 있는 
곳이다. 삼성산에 1834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묻혀 있던 세 성직자는 1925년7월 25일 시복되었다. 1970년 5월 김수환 추기경과 고(故) 노기남 대주교,오기선 신부는 이곳에 세 분의 매장지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념하는 소형 비석을 그 자리에 세웠다. 또 1981년 9월에는 신림동 본당 교우 들에 의해 구상 시인의 헌시와 비문이 새겨진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 1989년에 그 유해를 다시 천묘해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에는 신림본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됐다. ☞ 찾아가는 길 ☜ 지하철 2호선의 신림역에서 관악산 쪽으로 4km 거리인데 버스나 택시를 이용해야 된다. 버스 편은 신림 사거리에서 25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종점에서 400m쯤 올라가면 삼성산 성지 안내 푯말이 나온다.


▣ 나란히 함께 간다는 것은... ▣

길은 혼자서 가는게 아니라는 뜻이다.
멀고 험한 길일수록
둘이서 함께 가야 한다는 뜻이다.

철길은 왜 나란히 가는가?
함께 길을 가게 될때에는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늘 유지 해야 한다는 뜻이다. 토닥토닥 다투지 말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말고, 높낮이를 따지지 말고 가라는 뜻이다.
철길은 왜 서로 닿지 못하는 거리를 두면서 가는가.
사랑 한다는 것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알맞은 거리가 필요 하다는 뜻이다. 서로 등을 돌린뒤에 생긴 모난 거리가 아니라 서로 그리워 하는 둥근 거리 말이다.
철길을 따라가 보라.
철길은 절대로 90도 각도로 방향을 꺽지 않는다. 앞과뒤, 왼쪽과 오른쪽을 다 둘러본뒤에 천천히, 둥글게,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커브를 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랑도 그렇게 철길을 닮아가라.
- 안도현의 아침엽서 中에서-
    ♬ 103위 순교 성인 ♬ - 성가 285 순교로 빛을 밝힌 백삼위 성인 오롯이 바친 넋에 새순이 돋아 순례의 교회안에 큰 나무되니 님따른 그 생애가 거룩하여라 영원히 받으소서 희망의 찬미 찬송을 이름 모를 순교자여 새빛되소서.
    이 땅에 빛을 주신 야훼 하느님 태총의 혼돈에서 창조이루듯 한민족 새얼속에 나게 하시니 구원의 기쁜소식 누리 비추네 이백년 이어 받은 신앙의유산 기리며 온세상에 드높이리 성삼의 영광.
    생명의 빛을 받아 새로난 겨례 일치의 성령안에 함께 모여서 복되신 마리아의 삶을 따르니 복음을 살아가는 증인이어라 만백성 찬양하라 사랑의 승리기쁨을 이 땅위에 빛나시는 하느님 이름.
        함께 기도하고,연구하고 싶은...[앗↑나]가요*^^*
    소스입니다. <PRE><FONT style="FONT-SIZE: 14pt" face=돋움체 color=red><B> †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음체 color=#32449c> <B>†성 앵베르 라우렌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32.jpg"> 한국명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 2대 교구장. 주교로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같이 선교에 종사하던 나(모방),정(샤스탕) 두 신부와 함께 1839년 기해박해 때 한강변 새남터에서 목을 잘려 순교하였다. <BR> 그는 조정에 의해 대박해가 일어나 더 이상 전교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은 물론 나중에는 두 동료 신부들에게까지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라는 말로 자헌을 권유하였다. <BR>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브뤼기에르)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교황청에 의해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그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BR> 그의 입국으로 조선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 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만에,그리고 교회 창설 53년만에 비로소 전교 체제를 갖추 었으며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파에 힘쓴 결과 신자수는 1839년 초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BR> 그는 또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을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으나 때마침 불어닥친 박해로 말미암아 성공하지 는 못하였다. <BR> 범 주교는 1797년 4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빠리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다음해 3월 파리를 떠나 조선에 입국하기까지 중국 사천(四川)교구에서 10여 년간 사목활동에 종사하였다. <BR> 1839년 대 박해가 일어났을 때 지방을 돌아보고 있던 범 주교는 조정에 의해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 사실이 알려져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고 교우들에 대한 박해가 가열되자 하는 수 없이 수원에서 가까운 바닷가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기었다. <BR> 여기서 그는 나, 정 양신부를 불러 두 사람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않아 단념하고,몸조심을 당부하며 두 사람을 각기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BR>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그의 거처가 알려지게 되자 그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나아가 포졸들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으며 나 신부와 정 신부에게도 인편으로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다같이 1839년 9월 21일 군문효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는 43세,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음체 color=#32449c> <B>†성 모방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33.jpg"> 한국명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 그는 1836년 1월 입국하여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까지 3년 9개월 간 헌신적인 포교활동을 폈으며 특히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된 김 대건과 최 양업, 최 방제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에 유학시킨 것으로노 유명하다. <BR> 프랑스 베시에서 태어난 나(모방) 신부는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어 그 이듬해 동양에 진출, 중국을 거쳐 1836년 1월 의주의 변문을 통해 조선 입국에 성공했다. <BR> 그는 서울에서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순회, 전교하였다.또한 그는 이 땅에 들어오자 곧 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 양업을, 3월 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이들 세 소년에게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장차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던 중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신부 유방제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시켰다. <BR> 그후 나 신부는 이들 세 소년을 전송한 교우들과 만나 1837년 1월 무사히 서울에 들어온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손을 나눠 각 도의 흩어진 교우촌을 찾아 밤낮으로 모든 고난을 이겨가며 전교에 힘쓴 결과 입국 당시 불과 4천 명이었던 신자수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한 1837년 말에는 갑절이 넘는 9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BR> 그러나 1839년 기해 대박해가 일어나고 서양인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점차 소문으로 퍼져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마침내 순교의 날이 닥쳐온다. <BR> 범 주교는 박해가 일어나 신변이 위험하게 되자 처음에는 자신만이 자수하고 두 신부(나 신부, 정 신부)에게는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고했으나 형편이 그렇게 못되었고 결국은 범 주교에 이어 두 신부도 자진하여 포졸에게 몸을 맡겨 관가에 자수하였다. <BR> 그는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범 주교, 정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음체 color=#32449c> <B>†성 샤스땅 야고보,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34.jpg"> 한국명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이 땅에 두 번째로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로 1839년 기해박해 때 범 주교,나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BR> 정 (샤스탕) 신부는 1803년 10월, 프랑스 태생으로 1827년 1월 빠리 외방전교회 신부가 되었으며 같은 해 4월 동양 포교지의 하나인 페낭 섬으로 떠났다. 그는 그곳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마침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게 되자 함께 동행하기를 자원,1833년 5월 그곳을 떠났다. <BR> 그후 3년간을 중국 대륙과 몽고, 만주 등지를 전전하며 조선 입국의 기회를 기다렸으나 쉽게 뜻을 이를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소 주교는 입국도 못한 채 만주 땅에서 병을 얻어 목숨을 잃었으며 1836년 1월 조선 입국에 성공한 동료 나 신부로부터의 기별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BR> 마침내 1836년 12월 나신부의 기별을 받고 의주 변문으로 간 정신부는 마카오로 유학가는 김대건 등 세 소년 신학생을 전송하던 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무사히 국경을 넘어 이듬해인 1월 서울에 도착했다. <BR> 정 신부는 서울에 도착하자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손을 나누어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집행했다. 정 신부 등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도 여의치 않아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공복을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를 듣고 미사를 드린 다음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안만 했다. <BR>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정 신부는 한때 중병을 앓게 된 나 신부를 서울까지 올라와 간호해야 하는 어려운 일도 겪었으나 다행히 무사했으며 1837년 12월에는 제 2대 교구장 범 주교가 입국에 성공하여 전교활동은 차츰 본격화되어갔다. <BR> 그러나 1839년 몰아닥친 기해 대 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의 피로 물들였고, 정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해 9월 21일 새남터에서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정 신부의 나이는 35세요,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남짓이었다. <PRE><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움체 color=brown> <BR><IMG alt="삼성산 사적지 기념비" src="http://holyplace.catholic.or.kr/images/삼성산001.jpg" width=350 align=right border=0> <FONT color=red size=5>삼</FONT>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가 1836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묘자리이다. <P></P> <P>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곳은 세 분의 순교성인이 묻힘으로써 명실공히 삼성산(三聖山)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P> <P>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성직자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의 천주 교회는 중국 북경교구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된다. 이어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인 모방.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 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P> <P>이들 세 성직자는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 였다.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P> <P>그러던중 외국 선교사의 입국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고 가엾은 어린양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목자들은 가슴 깊이 피눈물을 흘린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중 모방,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한 다음 각자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P> <P><IMG alt="앵베르 주교, 모방신부, 샤스탕신부의 유해가 묻혀 있는 묘소" src="http://holyplace.catholic.or.kr/images/삼성산002.jpg" width=250 align=left border=0>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인해 거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그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데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 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P> <P>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38년 전, 주문모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 끝에 이슬이 되고 만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힌다. 교우들이 유해를 거두고자 애쓴 지 나흘째 되는 날 세 명의 교우가 시체를 훔쳐 내려다 그중 한명이 붙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그 후 스무 날 가량 지난 뒤 7-8명의 교우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유해를 거두는 데 성공한다. 교우들은 유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老姑山)에 임시로 매장했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파수를 피해 유해를 훔쳐 낸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한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순교하게 되니 1868년 3월 절두산에서의 일이다.</P> <P><IMG alt="사적지로 오르는 오솔길" src="http://holyplace.catholic.or.kr/images/삼성산003.jpg" width=200 align=right border=0> 이 때 가까스로 화를 면한 박순집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이 묘소를 고증해 명동 성당 지하묘소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산 증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순교한 가족들의 시신을 찾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 신부 등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내 용산 왜고개에 이장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P> <P>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4년간 박순집의 가문은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했고, 자신은 1982년 82세를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인천 교회의 창설에 여생을 바쳤다.16세 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들어가 우리 나라 최초의 수녀가 된 박 사베리오(1872-1966년)는 박순집의 막내딸이기도 하다.</P> <P>한편 박순집 일가를 기념하기 위한 비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정원에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P> <P><IMG alt="사적지 바로 밑에 있는 약수터, 산길을 오르며 흘린 당을 잠시 식힐 수 있는 &#13;&#10;곳이다." src="http://holyplace.catholic.or.kr/images/삼성산004.jpg" width=200 align=left border=0> 삼성산에 1834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묻혀 있던 세 성직자는 1925년7월 25일 시복되었다. 1970년 5월 김수환 추기경과 고(故) 노기남 대주교,오기선 신부는 이곳에 세 분의 매장지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념하는 소형 비석을 그 자리에 세웠다. 또 1981년 9월에는 신림동 본당 교우 들에 의해 구상 시인의 헌시와 비문이 새겨진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P> <P>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 1989년에 그 유해를 다시 천묘해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에는 신림본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됐다. <FONT color=#aa0000> <B>☞ 찾아가는 길 ☜</B><FONT face=돋음체 color=#0000aa> 지하철 2호선의 신림역에서 관악산 쪽으로 4km 거리인데 버스나 택시를 이용해야 된다. 버스 편은 신림 사거리에서 25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종점에서 400m쯤 올라가면 삼성산 성지 안내 푯말이 나온다.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brown><B> ▣ 나란히 함께 간다는 것은... ▣ <PRE><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움체 color=brown> 길은 혼자서 가는게 아니라는 뜻이다. 멀고 험한 길일수록 둘이서 함께 가야 한다는 뜻이다. <BR> 철길은 왜 나란히 가는가? <BR> 함께 길을 가게 될때에는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늘 유지 해야 한다는 뜻이다. 토닥토닥 다투지 말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말고, 높낮이를 따지지 말고 가라는 뜻이다. <BR> 철길은 왜 서로 닿지 못하는 거리를 두면서 가는가. <BR> 사랑 한다는 것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알맞은 거리가 필요 하다는 뜻이다. 서로 등을 돌린뒤에 생긴 모난 거리가 아니라 서로 그리워 하는 둥근 거리 말이다. <BR> 철길을 따라가 보라. <BR> 철길은 절대로 90도 각도로 방향을 꺽지 않는다. 앞과뒤, 왼쪽과 오른쪽을 다 둘러본뒤에 천천히, 둥글게,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커브를 돈다. <BR> 이 세상의 모든 사랑도 그렇게 철길을 닮아가라. <BR> - 안도현의 아침엽서 中에서- </B> <PRE><UL><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움체 color=#32449c> ♬ 103위 순교 성인 ♬ - 성가 285 순교로 빛을 밝힌 백삼위 성인 오롯이 바친 넋에 새순이 돋아 순례의 교회안에 큰 나무되니 님따른 그 생애가 거룩하여라 영원히 받으소서 희망의 찬미 찬송을 이름 모를 순교자여 새빛되소서. <br> 이 땅에 빛을 주신 야훼 하느님 태총의 혼돈에서 창조이루듯 한민족 새얼속에 나게 하시니 구원의 기쁜소식 누리 비추네 이백년 이어 받은 신앙의유산 기리며 온세상에 드높이리 성삼의 영광. <br> 생명의 빛을 받아 새로난 겨례 일치의 성령안에 함께 모여서 복되신 마리아의 삶을 따르니 복음을 살아가는 증인이어라 만백성 찬양하라 사랑의 승리기쁨을 이 땅위에 빛나시는 하느님 이름. <PRE><UL> <B><FONT style="FONT-SIZE: 9pt" face=돋음체 color=green> <UL><UL><A href="http://cafe.daum.net/EnglishAnna" target=blank> <IMG src="http://www.imagestation.com/picture/sraid53/p1267c37ffdbfe50aca62ebc9cb2ddfb0/fc8b9715.gif" ? grpid='LOiA&amp;fldid=AqlR&amp;dataid=203&amp;grpcode=asoul&amp;realfile=thumb_h16%255B1%"'></A></UL> 함께 기도하고,연구하고 싶은...[앗↑나]</B>가요*^^* <EMBED src=http://music.catholic.or.kr/sungga/asf/1998070285.asf hidden=true type=video/x-ms-asf loop="-1" autostart??true? volume="0"></ul></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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