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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야곱의 우물(9월 11일)-->>♣연중 제24주일(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11 조회수632 추천수6 반대(0) 신고




      ♣연중 제24주일(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 베드로가 다가와 여쭈었다. “주님, 교우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일곱 번까지 할까요?”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나는 말하거니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 이라도 용서하시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어떤 왕이 종들과 셈을 밝히려는 것과 같습니다. 셈을 밝히기 시작하자 만 달란트 빚진 종이 끌려왔는데 그가 도무지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너 자신과 아내와 자녀와 네 소유를 모두 처분하여 갚아라’ 하고 명했습니다.

      종이 엎드려 절하며 ‘사정을 봐주십시오. 모두 갚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주인은 그를 측은히 여겨 풀어주고 빚을 삭쳐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멱살을 잡고 조르며 ‘빚진 것을 갚아라’ 하였습니다. 그 동료가 엎드려 간청하며 ‘사정을 봐주게. 모두 갚겠네’ 하였으나 그는 사정 봐줄 생각을 하기는커녕, 빚을 갚을 때까지 동료 종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들이 벌어진 일을 알고 하도 민망하여 주인에게 죄다 일러바쳤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들여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나는 네 빚을 모두 삭쳐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겨야 할 줄 몰랐더냐?’ 주인은 크게 화를 내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주었습니다. 그대들이 교우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께서도 그대들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
      (마태 18,21­-35) 『야곱의 우물』《매일성서묵상》
      이야기는 21­-22절에서 서로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지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답이 있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23절에서 34절까지 설명하신다. 다시 35절에는 우리 서로의 용서를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와 연결시킴으로써 완성하신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용기를 내어 제의한 일곱 번이라는 수에 대하여 답하신 것이다. 7은 상징적 숫자로서 한계가 없는 용서를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답은 35절 ‘그대들이 교우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이라는 역의 조건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에게 그와 같이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으로 그 비중을 더욱 굳히신다.

      이제 이를 좀더 심도있게 설명하는 비유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어떤 왕이 종들과 셈을 밝히려는 것과 같습니다.”(23절) 지금 예수께서는 용서에 대한 말씀 도중에 하늘나라는 왕이 밝히는 셈과 같다고 이야기를 시작하신다.먼저 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끌려왔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에 비견되는 액수이니 6000날 동안 노동한 일당을 모두 모은 액수다. 다시 계산을 해보면 6000÷365일. 16년 동안의 임금에 해당하는 액수가 된다. 종이 주인에게 진 빚은 16년 동안 꼬박 일한 임금을 모아야 갚을 수 있는 돈이다.

      그 종이 주인에게 끌려왔고 측은히 여긴 주인에 의해 빚을 삭쳐 받고 나가다가 100데나리온(100일 동안 임금)의 빚을 진 동료에게 빚독촉을 하며 그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제 31­35절은 이 일을 본 다른 종들이 주인에게 이 곤혹스런 사정을 알림으로써 그는 주인에게 다시 불려가 형리에게 넘겨 지게 된다.빚을 갚으라는 주인의 명에 종이 하는 말, 종이 엎드려 절하며 “사정을 봐주십시오. 모두 갚겠습니다”(26절)와 동료의 말, 그 동료가 엎드려 간청하며 “사정을 봐주게. 모두 갚겠네”(29절)는 같은 말로 표현 되어 있다.

      그러나 동료 종의 간청은 자신이 16년 동안 꼬박 모아야 갚을 수 있는 액수 에는 비견할 수 없는 겨우 100일 동안의 임금으로서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많은 실현 가능한 청원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빚을 갚기가 거의 불가능 한 종의 청에도 주인은 그를 측은히 여겨 풀어주고 빚을 삭쳐주었건만 은혜 를 입고 나온 바로 그 종이 동료에게 보이는 반응은 참으로 다르다. 왕의 자비는 그 종의 간청(기한을 연기해 달라는)을 훨씬 뛰어넘는 은혜로 주어 졌지만 그는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용서 체험에 의해서도 변화되지 않았다. 주지 않고 받기만 한다면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대들이 교우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35절)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종의 이해 방식이 도전받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존재의 놀라운 새 가능성을 내면화해야만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기억한다면 엄청난 빚을 용서받은 우리이기에 훨훨 넘어설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내게 베푸신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느끼고 깊이 바라볼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알려주셨듯이 하느님은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를 용서’하신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용서받았음을 체험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큰 사랑의 체험에 의해서 하늘스런 사랑으로 열리게 될 것이며 그 사랑을 지니고 다른 이에게 향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조건을 따지지 않고 무한히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나 없이 약한 인간 조건을 지녔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데 늘 있기 마련인 용서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존재의 절차이고 질서임을 보여준다. 마태 25,31-­46 최후심판 장면에서 말하고 있듯이 서로의 마음을 열고 용서 하기를 거부한다면 고립되고 이기심 때문에 찌부러들 뿐이다.

      하느님께 엄청나게 큰 친절을 받았던 사람은 그의 이웃에게 그 친절을 개인적 으로 되돌려 주도록 내심으로 재촉받게 마련이다. 그는 정의와 공평, 친절 은혜로움과 자비를 실천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친절과 용서는 우리 개인과 하느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해당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불충실에도 끊임없는 사랑으로 용서하셨다. “야훼께서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들보다 수효가 많아서 거기에 마음이 끌리셨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너희는 어느 민족보다도 작은 민족이다.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를 지키시려고 야훼께서는 당신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신 것이다. 그리하여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건져내셨다.”(신명 7,7-­8)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 논리, 사랑이 우리 삶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이뤄지는 행동들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그 외 다른 그 무엇도 자리잡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법만이 우리 존재의 이유이고 그 자리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용서 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이는 우리 안에 깊숙이 숨겨진 보복하고 싶은 욕구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화를 불러일으키고 복수할 기회를 노리게 한다. 그리고 이것을 허용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크게 자라게 된다. “화가 화를 불러온다.” 그리하여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불러오고 자신의 영혼에 더한 상처를 입힌다. 저주하는 사람이 저주받는 사람보다 더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참 용서의 좋은 예를 창세기 45,4-­5 요셉의 태도에서 볼 수 있다. “형님들이 나를 이집트로 팔아 넘겼지요.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리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 20장 23절에서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스승을 배반하였던 제자들의 회한에 평화를 빌어주신다. “누구의 죄든지 그대들이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구체적인 삶에서 용서해야 하고 용서받아야 할 곳을 읽어내고 행하는 것, 이것이 삶을 렉시오하는 것이리라.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신앙과 사랑의 눈으로 사건과 삶을 조망하는 것이다. 용서는 의무가 아니라 인간됨의 존재 양식이다. 우리가 아는 그것을 실재하게 하는 데는 모험이 필요하다. 생은 순수한 선물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빚진 자에게 선물을 나누는 우리의 자발적 응답이기도 한 것이다.

      주님, 한여름의 무더위가 지나고 이제 결실의 계절로 들어서듯이 제 삶에도 한걸음 나아가는 성숙을 기대합니다. 제가 성숙하기를 바라는 저의 기대보다 당신께서 더더욱 크게 기대하고 계심을 알고 있사오니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옵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항상 용서하여 주시려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당신께 감사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용서로 참 자유를 맛보게 하시고 참 생명을 살게 하시니, 이제는 저 또한 당신을 살아감으로써 참 삶을 살게 하소서. 용서함으로써 용서를 얻게 되며, 자유하게 함으로써 자유하게 됨을 알게 하소서. 당신께서 제게 베푸시는 자비로 제 마음을 열고 그 빛을 반사하게 하소서.
      *이 본문에 나오는 성서구절은 200주년 기념 성서를 인용했음. 이 안나마리 수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

      (소스입니다) <br> <UL> <img src=http://www.cdmb.co.kr/pds/004/10/j064.GIF><br> <br> </UL></br> <UL></UL><PRE><UL><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음체 color=#005e77> <B>♣연중 제24주일(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B>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green></B> <B> </B><FONT style="FONT-SIZE: 10pt" color=red> <P> <BR> 그때 베드로가 다가와 여쭈었다. “주님, 교우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일곱 번까지 할까요?” 예수께서 말씀 하셨다. “나는 말하거니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 이라도 용서하시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어떤 왕이 종들과 셈을 밝히려는 것과 같습니다. 셈을 밝히기 시작하자 만 달란트 빚진 종이 끌려왔는데 그가 도무지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너 자신과 아내와 자녀와 네 소유를 모두 처분하여 갚아라’ 하고 명했습니다. </BR> <BR>종이 엎드려 절하며 ‘사정을 봐주십시오. 모두 갚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주인은 그를 측은히 여겨 풀어주고 빚을 삭쳐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멱살을 잡고 조르며 ‘빚진 것을 갚아라’ 하였습니다. 그 동료가 엎드려 간청하며 ‘사정을 봐주게. 모두 갚겠네’ 하였으나 그는 사정 봐줄 생각을 하기는커녕, 빚을 갚을 때까지 동료 종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BR> <BR>그런데 다른 종들이 벌어진 일을 알고 하도 민망하여 주인에게 죄다 일러바쳤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들여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나는 네 빚을 모두 삭쳐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겨야 할 줄 몰랐더냐?’ 주인은 크게 화를 내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주었습니다. 그대들이 교우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께서도 그대들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BR> (마태 18,21­-35)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green ace="돋음체"> 『야곱의 우물』《매일성서묵상》 <FONT style="FONT-SIZE: 11pt" color=darkviolet ace="돋음체"> <BR>이야기는 21­-22절에서 서로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지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하여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답이 있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23절에서 34절까지 설명하신다. 다시 35절에는 우리 서로의 용서를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와 연결시킴으로써 완성하신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용기를 내어 제의한 일곱 번이라는 수에 대하여 답하신 것이다. 7은 상징적 숫자로서 한계가 없는 용서를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답은 35절 ‘그대들이 교우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이라는 역의 조건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에게 그와 같이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는 말씀으로 그 비중을 더욱 굳히신다.</BR> <BR>이제 이를 좀더 심도있게 설명하는 비유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어떤 왕이 종들과 셈을 밝히려는 것과 같습니다.”(23절) 지금 예수께서는 용서에 대한 말씀 도중에 하늘나라는 왕이 밝히는 셈과 같다고 이야기를 시작하신다.먼저 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끌려왔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고, 1데나리온은 하루 일당에 비견되는 액수이니 6000날 동안 노동한 일당을 모두 모은 액수다. 다시 계산을 해보면 6000÷365일. 16년 동안의 임금에 해당하는 액수가 된다. 종이 주인에게 진 빚은 16년 동안 꼬박 일한 임금을 모아야 갚을 수 있는 돈이다.</BR> <BR>그 종이 주인에게 끌려왔고 측은히 여긴 주인에 의해 빚을 삭쳐 받고 나가다가 100데나리온(100일 동안 임금)의 빚을 진 동료에게 빚독촉을 하며 그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제 31­35절은 이 일을 본 다른 종들이 주인에게 이 곤혹스런 사정을 알림으로써 그는 주인에게 다시 불려가 형리에게 넘겨 지게 된다.빚을 갚으라는 주인의 명에 종이 하는 말, 종이 엎드려 절하며 “사정을 봐주십시오. 모두 갚겠습니다”(26절)와 동료의 말, 그 동료가 엎드려 간청하며 “사정을 봐주게. 모두 갚겠네”(29절)는 같은 말로 표현 되어 있다. </BR> <BR>그러나 동료 종의 간청은 자신이 16년 동안 꼬박 모아야 갚을 수 있는 액수 에는 비견할 수 없는 겨우 100일 동안의 임금으로서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많은 실현 가능한 청원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빚을 갚기가 거의 불가능 한 종의 청에도 주인은 그를 측은히 여겨 풀어주고 빚을 삭쳐주었건만 은혜 를 입고 나온 바로 그 종이 동료에게 보이는 반응은 참으로 다르다. 왕의 자비는 그 종의 간청(기한을 연기해 달라는)을 훨씬 뛰어넘는 은혜로 주어 졌지만 그는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었던 것이다.</BR> <BR>그는 자신의 용서 체험에 의해서도 변화되지 않았다. 주지 않고 받기만 한다면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대들이 교우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그대들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35절)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종의 이해 방식이 도전받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존재의 놀라운 새 가능성을 내면화해야만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기억한다면 엄청난 빚을 용서받은 우리이기에 훨훨 넘어설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내게 베푸신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느끼고 깊이 바라볼 것이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알려주셨듯이 하느님은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를 용서’하신다.</BR> <BR>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용서받았음을 체험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적 한계를 넘어서는 큰 사랑의 체험에 의해서 하늘스런 사랑으로 열리게 될 것이며 그 사랑을 지니고 다른 이에게 향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조건을 따지지 않고 무한히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나 없이 약한 인간 조건을 지녔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데 늘 있기 마련인 용서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존재의 절차이고 질서임을 보여준다. 마태 25,31-­46 최후심판 장면에서 말하고 있듯이 서로의 마음을 열고 용서 하기를 거부한다면 고립되고 이기심 때문에 찌부러들 뿐이다.</BR> <BR>하느님께 엄청나게 큰 친절을 받았던 사람은 그의 이웃에게 그 친절을 개인적 으로 되돌려 주도록 내심으로 재촉받게 마련이다. 그는 정의와 공평, 친절 은혜로움과 자비를 실천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친절과 용서는 우리 개인과 하느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해당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불충실에도 끊임없는 사랑으로 용서하셨다. “야훼께서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들보다 수효가 많아서 거기에 마음이 끌리셨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너희는 어느 민족보다도 작은 민족이다. 다만 너희를 사랑하시고 너희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그 맹세를 지키시려고 야훼께서는 당신의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신 것이다. 그리하여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건져내셨다.”(신명 7,7-­8) </BR> <BR>그리스도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 논리, 사랑이 우리 삶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이뤄지는 행동들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그 외 다른 그 무엇도 자리잡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법만이 우리 존재의 이유이고 그 자리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에서 흔히 일어나는 용서 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이는 우리 안에 깊숙이 숨겨진 보복하고 싶은 욕구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화를 불러일으키고 복수할 기회를 노리게 한다. 그리고 이것을 허용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크게 자라게 된다. “화가 화를 불러온다.” 그리하여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불러오고 자신의 영혼에 더한 상처를 입힌다. 저주하는 사람이 저주받는 사람보다 더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BR> <BR>참 용서의 좋은 예를 창세기 45,4-­5 요셉의 태도에서 볼 수 있다. “형님들이 나를 이집트로 팔아 넘겼지요.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리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 20장 23절에서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스승을 배반하였던 제자들의 회한에 평화를 빌어주신다. “누구의 죄든지 그대들이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구체적인 삶에서 용서해야 하고 용서받아야 할 곳을 읽어내고 행하는 것, 이것이 삶을 렉시오하는 것이리라.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신앙과 사랑의 눈으로 사건과 삶을 조망하는 것이다. 용서는 의무가 아니라 인간됨의 존재 양식이다. 우리가 아는 그것을 실재하게 하는 데는 모험이 필요하다. 생은 순수한 선물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빚진 자에게 선물을 나누는 우리의 자발적 응답이기도 한 것이다.</BR> <BR>주님, 한여름의 무더위가 지나고 이제 결실의 계절로 들어서듯이 제 삶에도 한걸음 나아가는 성숙을 기대합니다. 제가 성숙하기를 바라는 저의 기대보다 당신께서 더더욱 크게 기대하고 계심을 알고 있사오니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옵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항상 용서하여 주시려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당신께 감사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용서로 참 자유를 맛보게 하시고 참 생명을 살게 하시니, 이제는 저 또한 당신을 살아감으로써 참 삶을 살게 하소서. 용서함으로써 용서를 얻게 되며, 자유하게 함으로써 자유하게 됨을 알게 하소서. 당신께서 제게 베푸시는 자비로 제 마음을 열고 그 빛을 반사하게 하소서. </BR> *이 본문에 나오는 성서구절은 200주년 기념 성서를 인용했음. 이 안나마리 수녀(올리베따노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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