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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2) 주교님 저 오늘 여러 잔 했습니다.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12 조회수989 추천수12 반대(0) 신고

 

 

주교님 저 오늘 여러 잔 했습니다.
                                 이순의


주교님
저녁에 공부하는 아들녀석 모르게
가만히 나가서 치킨도 사고 백세주도 한 병 사서 들어왔습니다.

아들녀석에게 한 잔 받으라고 했더니
이 놈이 장난인 줄 아는 것입니다.
저는 진심인데
아들놈은 장난인 줄 압니다.

세상사 마음을 비우고 살면 편하다는데
세상사 잊고 살면 복이라는데
제 한 몸이라면
비우고도 살고, 잊고도 살겠는데
자식이 있으니 그게 그렇게 어려운거드라구요.

주교님
그래서 오늘은 제 일생에서 제일로 많이 마신 날입니다.
그런데요.
아들놈은 딱 석 잔 받드니 술잔을 엎어버리고 땡이랍니다.
그리고 엄마더러 계속 마시라고....
제 놈 스트레스 풀어 줄려고 한 잔 마시자고 했드니
뭐라드라....
가족은 석 잔이요.
내 일은 여섯 잔이요.
나랏 일은 아홉 잔이라나 뭐라나?

주교님
어미가 일생일대의 작심을 하고
자식놈 한테 한 잔 하자고 했는데
이래도 되는겁니까?
그라고 이 에미만 마시게 하드니 제 놈은 골아떨어졌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짱한 정신으로다가 주교님께 연애편지를 쓰는데
자식놈은 잠이나 자고....

주교님. 저도 술 마실 줄 아는데요.
혹시 설운 인생에 주사라도 할까봐서
건강을 핑계삼아 절대로 안마셨습니다.
앞으로도 안 마실 거구요.
그렇지만 오늘은
아들의 하소연이라도 좀 들어 줄려고 마련했는데
일생일대의 어미의 성의를 무시하고
석 잔이루 끝냈습니다요.

주교님
저는 몹시 두렵습니다.
하늘이 준 몫이 버러지 인생인데
남들이 보기에 잘난척 하는 방자한 인간이루 보여져서
훗날에 흉거리가 될까봐서요.
한 치 앞도 못 보는 인생이
무엇이 그렇게 할 말이 많았느냐고 할까봐서
묵상글도 쓰기가 두렵습니다.
저는 그냥
제 사는 그대로를 나열할 뿐인데
읽는 사람들은 그게 아닌가 보드라구요.

질문이 많아요.
그대로만 보아주면 궁금할 것도 이해 못할 것도 없는데
제 각각의 삶에서 수용되는 고정의 관념들을 보태서
이해 시켜 달라고 하시니....
무지랭이 인생을 무지랭이로 쓰는데
왜 그것이 무지랭이로 안보이는지?

주교님
또 언제 이렇게 마실 날이 있을지 몰라서
써 보았습니다.
그런데요. 주교님!
저는 이렇게 주교님께 편지를 쓸 수 있는데
날 밝으면 또 사람들은
이 아무개가 주교님께 주정했다고 할까요?!
그렇지만 저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아들녀석이 겁이나고 걱정이 되었는지
마시기를 중단하는 바람에
백세주 한 병을 다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둘이 나눠 마셨으니
저는 절대루 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목적한 아들의 답답증은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놈은 석 잔 받고 술잔을 엎더니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네 속을 엄마가 좀 알고 싶은데
  죽어도 입은 열지 않을 것 같고...
  너가 할 것은 딱 한가지 뿐이다.>
그랬더니 이놈 왈!
<신부님?>

주교님
이놈이 도대체 뭐가 될거 같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 오면서
절대로 모를 것이 딱 하나가 있는데요.
신부님들 속이거든요.
저는 신부님들 속은 절대로 모르겠드라구요.
교우들은 신부님들 속을 안다는데
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모를 것이
신부님들 속이거든요.

그런데...
오늘 밤에 아들의 속을 좀 알아주려고 했드니
절대루 모르것네요.
주교님께서 제 아들의 속을 좀 알아봐 주실래요?
결국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술만 마신거네요.
주교님 저 오늘 여러 잔 했습니다.
그래도 되지요?!
불혹을 넘고 지천명을 바라보도록 이런일 없었으니 봐 주세요.
예수님도 봐 주실건데...
주교님도 봐 주세요. 히~!

해 보니께 어미 된다는 것이 겁나게 어려운 것이드라구요.

200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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