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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유대철베드로,유소사체칠리아,최창흡베드로,조증이바르바라시여~!
작성자조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16 조회수782 추천수6 반대(0) 신고

†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인 유대철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유진길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난 유대철은 어려서 아버지의 모범을 따라 입교한 
후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천주교를 미워하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으나 그때마다 항상 어머니와 누나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감동적인 순교를 하자 유대철은 순교를 결심하고 자헌했다. 포청에서 13세의 어린 나이로는 견디기 힘든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허벅지의 살을 뜯어내며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하고 으름장을 놓는 형리 에게 "믿고 말고요.그렇게 한다고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 하고 대답 하자 화가 난 형리는 다시 시뻘겋게 단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하니 "자요"하고 입을 크게 벌려 형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포청에서 총 14회의 신문을 받고 100여 대의 매와 40여 대의 치도곤을 맞아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유대철은 항상 만족스럽고 평화롭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형리들은 유대철을 배교시킬 수 없게 되자 10월 31일 포청옥에서 몰래 목을 졸라 죽였다. 그는 103위 성인 중 가장 어린 순교자이다.(35는 부친)

†성녀 유소사 체칠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명도회장 정약종(丁若鍾)의 부인이며 정하상 바오로의 어머니인 유 체칠리아는 
시골에서 태어나 2O세 때 상처한 정약종과 결혼했다.남편의 권면으로 결혼한 지 
3년만에 입교했고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0년 살고 있던 경기도 양근(楊根) 지방에 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사했으나 이듬해 신유박해로 가족이 모두 체포되었다. 남편과 전실 아들 정철상 (丁哲祥)의 순교 후 재산을 몰수당하고 석방되어 마재의 시동생 정약용(요한)의 집에서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몹시 궁핍하게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유 체칠리아는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조카의 피신 권유에 "나는 항상 순교를 원했으니 내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하고 싶네" 하고 거절하고 7월 11일, 아들 정하상(바오로), 딸 정정혜(엘리사벳)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유 체칠리아는 72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태장 230대를 맞는 혹형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냈다. 노인을 사형시키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어 있어서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3일 고문과 형벌의 여독으로 옥사, 순교했다. 그녀는 103위 가운데 최고령의 순교자이다. (2, 54의 어머니)

†성인 최창흡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일명 '여칠'. 최창흡은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교리를 배워 1801년 신유박해로 형 최창현(崔昌顯)이 순교한 후로는 외교인과 다름없는 냉담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30세경 교우인 손소벽(막달레나)과 결혼한 후로는 새로 교리를 배우고 또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아내와 함께 대세를 받았고 이때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창흡은 순교를 결심했다. 이해 6월 친정으로 피신해 온 딸 최영이(바르바라)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사위 조신철(가롤로)이 맡겨둔 교회서적과 성물 때문에 7차례의 신문, 주뢰질, 주장 외에도 태장 150도를 맞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형조에서도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결국 자신의 소원대로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64는 아내, 70은 딸, 40은 사위 )

†성녀 조증이 바르바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조증이는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가정교육 
을 받고 자라면서 매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6세 때 남이관(세바스티아노) 
과 결혼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 조 프란치스코와 시부모가 순교하게 
되고 남편도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유배되자 이천의 친정으로 내려가 10여년 
을 고생하며 살았다. 

그후 30세 경 다시 상경하여 먼 친척이 되는 정하상을 도우며 선교사 영입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1832년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이듬해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돌보며 공소를 세워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이천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어린 딸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남이관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형리들로부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고,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마침내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그때 나이 58세였다. (37은 남편)

▣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행위는 
타인을 위로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그를 최고의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그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는 사람,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말하자면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다 운좋게 이루어진 것으로서,
미처 기대하지도 못했던 기분좋은 사건이다. 

-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중에서 -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들어주는 사람의 만남을 하나의 사건이라 표현하는 것이 결코 과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인생 길을 걷는 행로 중에 마음이 통하는 사람 하나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진심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만큼 자기 인생의 그릇을 풍요롭게 채워간다는 뜻도 됩니다.
- 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
      함께 기도하고,연구하고 싶은...[앗↑나]가요*^^*

       

 
소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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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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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유대철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48.jpg"> 
유진길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난 유대철은 어려서 아버지의 모범을 따라 입교한 
후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천주교를 미워하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으나 그때마다 항상 어머니와 누나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 
<BR>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감동적인 순교를 하자 유대철은 
순교를 결심하고 자헌했다. 포청에서 13세의 어린 나이로는 견디기 힘든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BR> 
허벅지의 살을 뜯어내며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하고 으름장을 놓는 형리 
에게 "믿고 말고요.그렇게 한다고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 하고 대답 
하자 화가 난 형리는 다시 시뻘겋게 단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하니 "자요"하고 
입을 크게 벌려 형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BR> 
포청에서 총 14회의 신문을 받고 100여 대의 매와 40여 대의 치도곤을 맞아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유대철은 항상 만족스럽고 평화롭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형리들은 유대철을 배교시킬 수 없게 되자 10월 31일 포청옥에서 
몰래 목을 졸라 죽였다. 그는 103위 성인 중 가장 어린 순교자이다.(35는 부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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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유소사 체칠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49.jpg"> 
명도회장 정약종(丁若鍾)의 부인이며 정하상 바오로의 어머니인 유 체칠리아는 
시골에서 태어나 2O세 때 상처한 정약종과 결혼했다.남편의 권면으로 결혼한 지 
3년만에 입교했고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BR> 
1800년 살고 있던 경기도 양근(楊根) 지방에 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사했으나 이듬해 신유박해로 가족이 모두 체포되었다. 남편과 전실 아들 정철상 
(丁哲祥)의 순교 후 재산을 몰수당하고 석방되어 마재의 시동생 정약용(요한)의 
집에서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몹시 궁핍하게 지냈다. 
<BR>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유 체칠리아는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조카의 
피신 권유에 "나는 항상 순교를 원했으니 내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하고 싶네" 
하고 거절하고 7월 11일, 아들 정하상(바오로), 딸 정정혜(엘리사벳)와 함께 
체포되었다. 
<BR> 
포청에서 유 체칠리아는 72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태장 230대를 맞는 혹형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냈다. 노인을 사형시키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어 있어서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3일 고문과 형벌의 여독으로 옥사, 
순교했다. 그녀는 103위 가운데 최고령의 순교자이다. (2, 54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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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최창흡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5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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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여칠'. 최창흡은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교리를 배워 
1801년 신유박해로 형 최창현(崔昌顯)이 순교한 후로는 외교인과 다름없는 
냉담한 생활을 했다. 
<BR> 
그러나 30세경 교우인 손소벽(막달레나)과 결혼한 후로는 새로 교리를 배우고 
또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아내와 함께 대세를 받았고 이때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BR>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창흡은 순교를 결심했다. 이해 6월 친정으로 
피신해 온 딸 최영이(바르바라)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사위 
조신철(가롤로)이 맡겨둔 교회서적과 성물 때문에 7차례의 신문, 주뢰질, 
주장 외에도 태장 150도를 맞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BR> 
형조에서도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결국 자신의 소원대로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64는 아내, 70은 딸, 40은 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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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조증이 바르바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51.jpg"> 
조증이는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가정교육 
을 받고 자라면서 매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16세 때 남이관(세바스티아노) 
과 결혼했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 조 프란치스코와 시부모가 순교하게 
되고 남편도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유배되자 이천의 친정으로 내려가 10여년 
을 고생하며 살았다. 
<BR> 
그후 30세 경 다시 상경하여 먼 친척이 되는 정하상을 도우며 선교사 영입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1832년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이듬해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돌보며 공소를 세워 교회와 교우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했다. 
<BR>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이천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어린 딸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남이관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형리들로부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고, 형조에서도 가혹한 
형벌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마침내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그때 나이 58세였다. (37은 남편)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brown><B>
▣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
<PRE><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움체 color=brown>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행위는 
타인을 위로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타인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그를 최고의 상태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그 말을 진지하게 들으려는 사람,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말하자면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다 운좋게 이루어진 것으로서,
미처 기대하지도 못했던 기분좋은 사건이다. 
<BR> 
-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중에서 -
<BR>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들어주는 사람의 만남을 하나의
사건이라 표현하는 것이 결코 과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인생 길을
걷는 행로 중에 마음이 통하는 사람 하나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진심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이며, 그만큼 자기
인생의 그릇을 풍요롭게 채워간다는 뜻도 됩니다. 
<BR>
                  - 고도원의 아침편지 중에서 -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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