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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 김 데레사,이 아가다,민극가 스테파노,정화경 안드레아시여~!
작성자조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18 조회수966 추천수8 반대(0) 신고

†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김 데레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김 데레사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金宗漢)의 딸로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으며 김대건의 당고모가 된다. 17세 때 교우인 손연욱(요셉)과 결혼했 
으나, 1824년 남편이 해미(海美)에서 순교하자 혼자 살면서 가난한 생활에서 
오는 고통 중에서도 매주 두 차례의 대재를 지키는 등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유방제 신부와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살림을 돌보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김 데레사는 7월 11일 범 주교의 집에서 정하상 바오로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주교의 은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김 데레사는 순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꿋꿋이 참아내고, 포청옥에서 만난 이 광헌(아우구스티노)의 딸 이 아가타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굳게 지켰다.
6개월 동안 6차례의 신문을 받고, 태장 280도를 맞은 김 데레사는 드디어 1840년 1월 9일 포청에서 이 아가타와 함께 44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1의 당고모, 2, 49, 54와 함께 체포됨)

†성녀 이 아가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교한 동정녀 이 아가타는 이광헌(아우구스티노)과 
권희(바르바라)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거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결심으로 수계범절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으나, 형조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포청으로 환송하였다.
포청에서는 다시 혹형과 고문을 했고 또 부모가 배교한 것처럼 속여 배교를 강요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옥에서 만난 김 데레사와 함께 서로 위로 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나갔다. 9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곤장 300도, 대곤 90도를 맞고 드디어 1840년 1월 9일 김 데레사와 함께 포청 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9,26의 딸, 9, 20, 21, 26과 함께 체포됨)

†성인 민극가 스테파노,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민극가 스테파노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모두 외교인 
이었으나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버지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온 가족과 
함께 입교했다. 

20세 때 아내를 잃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6, 7년 후 재혼한 아내와 딸마저 잃게 되자 집을 나와 서울, 인천, 부평, 수원 등지를 전전하며 교리서적을 팔아 생활해 나갔다.
또 어디서나 냉담자를 권면하고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고 또 자선사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그 결과 회장에 임명되었다.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민 극가는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열심히 이행하던 중 그해 12월 서울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온갖 수단으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민극가는 모든 위협과 유혹 을 물리쳤다. 또 옥에서 배교했거나 마음이 약한 교우들을 권면함으로써 배교자 중 여럿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옥중 생활에서도 회장의 본분을 다하던 민극가는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밭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성인 정화경 안드레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충청도 정산(定山)의 부유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정화경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을 뿐더러 장성해서는 더욱 자유스러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수원 근처로 이사해 살았다. 

거기서 회장 일을 맡아보며 자기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또 서울을 왕래 하며 힘 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화경은 매일같이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시켰고, 박해를 피해 내려온 범 라우렌시오 주교를 위해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주교를 찾고 있던 밀고자 김순성 (일명 여상)에게 속아 주교의 은신처를 알려주었다. 서양 신부를 잡으려던 김순성 일당은 정화경을 이용하여 신부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챈 정화경은 도망하여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 를 보았다.
그러나 9월 체포된 정화경은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1840년 1월 23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 복(福)을 받는 사람  ▣

사람들이 
가까이 앉도록 배려해라. 
저녁 식사할 사람은 네 사람인데, 
열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큰 식탁을 사용하지 말라. 
현재 식탁이 그거 하나 뿐이라면, 
그것은 뷔페용 식탁으로 사용하고 
음식은 거실에서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고 
먹는 것이 더 좋다. 사람이 듬성듬성 비어 있는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보다 더 어색한 것은 없다. 

- 래리 킹의 《대화의 법칙》중에서 -
가까이 앉아 음식을 함께 먹는 사람이 가족입니다. 그래서 식구(食口)입니다. 이때 먹는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닙니다. 정성을 먹고, 사랑과 화목을 나누는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앉아 맵니 짜니 투덜대는 것은, 음식을 마음으로 먹지 않고 혀끝으로만 먹는 까닭입니다. 복(福)은 음식먹는 자리에 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함께 기도하고,연구하고 싶은...[앗↑나]가요*^^*
     
    소스입니다
    <PRE><FONT style="FONT-SIZE: 14pt" face=돋움체 color=red><B>
    †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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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PRE><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움체 color=brown>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BR>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BR>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BR>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BR>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BR>
    ◆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BR>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BR>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BR>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BR>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BR>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BR>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PRE></UL></B>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32449c><B>
    †성녀 김 데레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57.jpg"> 
    김 데레사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金宗漢)의 딸로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으며 김대건의 당고모가 된다. 17세 때 교우인 손연욱(요셉)과 결혼했 
    으나, 1824년 남편이 해미(海美)에서 순교하자 혼자 살면서 가난한 생활에서 
    오는 고통 중에서도 매주 두 차례의 대재를 지키는 등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BR> 
    정정혜 엘리사벳과 함께 유방제 신부와 범 라우렌시오 주교의 살림을 돌보던 
    중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김 데레사는 7월 11일 범 주교의 집에서 
    정하상 바오로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다. 
    <BR> 
    포청에서 주교의 은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김 데레사는 순교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앙을 본받아 꿋꿋이 
    참아내고, 포청옥에서 만난 이 광헌(아우구스티노)의 딸 이 아가타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굳게 지켰다. 
    <BR> 
    6개월 동안 6차례의 신문을 받고, 태장 280도를 맞은 김 데레사는 드디어 
    1840년 1월 9일 포청에서 이 아가타와 함께 44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1의 당고모, 2, 49, 54와 함께 체포됨)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32449c><B>
    †성녀 이 아가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58.jpg">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교한 동정녀 이 아가타는 이광헌(아우구스티노)과 
    권희(바르바라)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거룩한 모범을 따라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고,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결심으로 수계범절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BR>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으나, 형조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포청으로 환송하였다. 
    <BR> 
    포청에서는 다시 혹형과 고문을 했고 또 부모가 배교한 것처럼 속여 배교를 
    강요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옥에서 만난 김 데레사와 함께 서로 위로 
    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지켜나갔다. 9개월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곤장 
    300도, 대곤 90도를 맞고 드디어 1840년 1월 9일 김 데레사와 함께 포청 
    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9,26의 딸, 9, 20, 21, 26과 함께 체포됨)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32449c><B>
    †성인 민극가 스테파노,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59.jpg"> 
    민극가 스테파노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모두 외교인 
    이었으나 어머니가 사망한 후 아버지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온 가족과 
    함께 입교했다. 
    <BR> 
    20세 때 아내를 잃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6, 7년 후 재혼한 아내와 딸마저 잃게 되자 집을 나와 서울, 인천, 부평, 
    수원 등지를 전전하며 교리서적을 팔아 생활해 나갔다. 
    <BR> 
    또 어디서나 냉담자를 권면하고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고 
    또 자선사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그 결과 회장에 임명되었다.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민 극가는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열심히 이행하던 중 그해 12월 
    서울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BR> 
    포청에서 온갖 수단으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민극가는 모든 위협과 유혹 
    을 물리쳤다. 또 옥에서 배교했거나 마음이 약한 교우들을 권면함으로써 
    배교자 중 여럿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옥중 생활에서도 
    회장의 본분을 다하던 민극가는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밭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32449c><B>
    †성인 정화경 안드레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60.jpg"> 
    충청도 정산(定山)의 부유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정화경 안드레아는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을 뿐더러 장성해서는 더욱 자유스러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수원 근처로 이사해 살았다. 
    <BR> 
    거기서 회장 일을 맡아보며 자기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또 서울을 왕래 
    하며 힘 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화경은 매일같이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시켰고, 
    박해를 피해 내려온 범 라우렌시오 주교를 위해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BR> 
    그러나 그해 8월 주교를 찾고 있던 밀고자 김순성 (일명 여상)에게 속아 
    주교의 은신처를 알려주었다. 서양 신부를 잡으려던 김순성 일당은 
    정화경을 이용하여 신부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챈 
    정화경은 도망하여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 
    를 보았다. 
    <BR> 
    그러나 9월 체포된 정화경은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1840년 1월 23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brown><B>
    ▣ 복(福)을 받는 사람  ▣
    <PRE><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움체 color=brown>
    사람들이 
    가까이 앉도록 배려해라. 
    저녁 식사할 사람은 네 사람인데, 
    열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큰 식탁을 사용하지 말라. 
    현재 식탁이 그거 하나 뿐이라면, 
    그것은 뷔페용 식탁으로 사용하고 
    음식은 거실에서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고 
    먹는 것이 더 좋다. 사람이 듬성듬성 비어 있는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보다 더 어색한 것은 없다. 
    <BR>
    - 래리 킹의 《대화의 법칙》중에서 -
    <BR>
    가까이 앉아 음식을 함께 먹는 사람이 가족입니다.
    그래서 식구(食口)입니다. 이때 먹는 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닙니다. 정성을 먹고, 사랑과 화목을 나누는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앉아 맵니 짜니 투덜대는 것은, 음식을 
    마음으로 먹지 않고 혀끝으로만 먹는 까닭입니다.
    복(福)은 음식먹는 자리에 있습니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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