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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88) 언제나 그러했듯이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20 조회수785 추천수7 반대(0) 신고

2005년9월20일 화요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ㅡ지혜서3,1-9;로마서8,31ㄴ-39;루가9,23-26ㅡ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순의

 

 

명절을 지내면서 골목을 분주히 드낙거리고 있었다. 장도 보아야 하고, 빠진 것들도 채워서 사야하고, 해야 할 일들에 재촉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의 담장 아래에 한 입 베었다가 버린 땡감 하나가 뒹굴고 있다. 그 알 굵은 튼실함이 아까워서  주워 들었다. 담장 안의 감나무에 열려있는 감과 동일한 생김이다. 손만 뻗으면 얼마든지 딸 수 있는 지척에 감이 주렁주렁한데 아직은 덜 익은 초록이 짙다. 누구였을까? 알 굵은 감에 맛이 들었는지 따 보고 싶었던 유혹은 누구의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한 입 베어 문 고약한 떫음에 혼줄이 났을 게다. 그래서 내동댕이 친!

 

오다가다 발길에 채인 버려진 땡감 한 알!

 

봄 여름 내내 감나무도 바빴었다. 옅은 노랑의 단맛이 솔솔 나는 꽃잎들이 담장 아래 시멘트 길 위에 고운 무늬로 누워 길손의 마음을 수줍게 하더니, 어린 감도 감이라고 무성한 가지에 달려 비릿한 풋냄새로 귀여운 재롱을 부렸더라. 뜨거운 여름은 힘들고, 축축한 장마는 고단하였어도 뿌리 튼실한 한 그루의 나무는 생명을 일구느라고 꿋꿋하였다. 여력이 부족하여 명운이 모자란 열매는 일찍 순리에 순응하여 따라야 했다. 좀 더 이른 여름 부터 떨어져 으깨져버린 풋냄새 짙은 아기 열매도 있었고, 여름 장마비에 후두둑 쏟아져 때굴 굴러 발길에 채이던 제법 아까운 열매도 있었다. 그러고 나면 길가 담장 아래는 한 동안 좀 한가해 졌다. 

 

떨구어서 버릴 것은 다 버려버린 나무도 달려서 남은 강한 열매에게 보식을 나누느라고 오시는 가을이 분주할 것이다. 그런데 성급한 사심은 모성 강한 나무의 열정을 탐하고 말았다. 조금만 참았으면 달고 연한 살결의 홍색 고운 감을 따게 될텐데 그걸 못 참아서..... 아직도 더 나무의 몸에서 덜어내야 할 열매가 남아 있었을까? 그래서 사람의 손은 담장을 넘어 저리도 아까운 열매를 잘라 내었을까? 그리고 한 입 베어 물었다가 고약한 반항에 동댕이 치고 싶었을까? 사람의 마음이 나빴을까? 아니면 버려진 땡감의 명운이 저만큼 만 살다가 저렇게 죽으라는 팔자였을까? 명절에 이 사람 저 사람의 발길에 채이며 천덕 꾸러기가 되어버린 땡감을 보며, 차라리 비린내 폴폴 나던 어린 감이었을 때 명운을 달리했더라면 덜 고통스러웠을 것 같은 안스러움이 컸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나는 내 뜻을 청하지 않았다. 살아 보면서 내 뜻을 청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며 또한 무모한 발상인지를 너무나 열심히 답습에 복습까지 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인도 하시라고 청하였다. 선행 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악행 까지도 주관하시는 인도하심에 따라서 일상을 살기로 하였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의지가 이끄는 대로! 영감이 인도하는 대로! 그 동안의 세월에도 어데 내 뜻이 있었던가?! 행하라 하시니 행하여 살았고, 견디라 하시니 견디어 살지 않았는가?! 그런데 자신이 없었다.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할지 정말로 자신이 없었다. 분명하지는 않아도,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전에처럼 무작정 열고 계시지는 않으셨던 것이다. 거부하시고, 차단하시고....

 

평상시 대로 명절 준비를 하느라고 경황이 없었다. 그러나 그 음식들을 평상시 대로 시어머니께 보내서 나누게 될지 말지에 대하여 나는 자신하지 못했다. 그냥 기도만 하였다. 열심히 기도하며 일을 하였다. <때로는 나의 고통이 누군가의 보속이 될 수 있듯이, 때로는 나의 선행이 누군가의 악행을 다스릴 수 있고, 때로는 나의 슬픔이 누군가의 위로가 되어 눈물로 흐르고..... 주님! 저는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결정은 주님께서 다스려 주소서. 보내서 나눔도 아버지의 뜻이게 하시고, 보내지 않아서 나누지 않음도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이유이게 하소서.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저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모릅니다. 한 순간도, 한 판단도, 한 행함도, 모두모두 주님의 마음이게 하소서.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만한 섭리가 있으실 거라고 믿게 하소서.>

 

그리고 정갈하게 그릇 그릇에 채워 제수 준비를 마쳤다. 보자기에 싸서 짝궁의 손에 들려주기만 하면 된다. 얼마나 바쁘고 분주한 손길로 정성되이 마련한 음식이던가?! 그런데 짝궁은 가져가지 않았다. 꺽인 내 마음도 내 마음이지만 짝궁의 마음도 꺽여있기 때문이었다. 명절을 지내러 온 짝궁과 나의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못했다. 물론 모든 탓은 나에게 있을 것이다. 떠돌이 장사꾼인 짝궁이 집으로 돌아오면 어떠한 경우라도 내색 없이 푸짐한 대접을 해왔던 나의 탓일 게다. 너무 오랜 지난 세월 동안 집에 머문 잠깐의 시간들이 너무나 잠깐이다 보니 나의 생각과 짝궁의 생각은 다르다 못해 이해의 폭조차 형성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오로지 나의 신앙심 하나에 의지해 지탱해 왔으니.... 결국 나는 이유 없이 싸 갔던 제수용 음식들을 올 해는 격식을 갖추어 물어야만 했다.

 

<만들어 놓은 음식은 가져 갈 거예요?>

 

짝궁은 거절하고 빈 손으로 혼자만 갔다. 그리고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무엇이 지금 잘못되고 있는 것일까? 짝궁과 나 사이에 좁혀질 수 없는 간격은 무엇일까? 우리는 결혼 20년에 스무 번째 추석을 맞았다. 결혼을 하고 한 달만에 첫 명절이 추석이었다. 그 해에도 올 해 처럼 철이 일렀다. 친정집 명절과 비교도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새댁이니까 영등포 단칸의 시어머니 집으로 찾아 들었다. 좁은 골방은 어두웠고 음침했다. 시집 온지 달 포도 되지 않은 새 며느리를 맞으신 시어머니는 명절이라고 해서 새 식구에게 보여줄 것도 가르쳐 줄 것도 없었다. 그래서 시어른도 계시지 않은 텅 빈 방에서 새댁 나름대로 음식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실수 하나를 하고 말았다. 다른 것은 다 맞게 했는데 송편은 맵쌀로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친정집에서는 부엌데기들이 반죽하여 들여 놓아 주면 나는 송편만 빚으면 되었다. 그 쌀이 맵쌀인지 찹쌀인지 확실하게 알아두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찹쌀을 사다가 담궈 방아를 찧고 반죽하여 새댁의 첫 송편을 빚었던 것이다. 잘 익은 송편은 죽이 되어 줄줄 흐르고..... 그 험한 모양의 송편은 일생을 두고 잊혀지지가 않는다. 지금 생각하면 시댁의 수준이 그뿐이었는데 새댁이라서 시댁 식구들에게 흉허물이 될까봐 그 형태를 유지해 보려고 진땀을 흘렸던 생각을 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시어머니께서 전수해 주신 20년 제수 준비가 아니라 친정집에서 보고 배웠거나 나중에 새언니로 부터 부족한 부분을 학습하여 얻어서 확실해진 솜씨가 되었다. 그런데 짝궁은 빈 손으로 갔다. 올 해 명절 준비를 시작 할 때 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였던 탓인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솔직히 내 마음이 굽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나는 나의 마음을 내 의지로 감당하지 못한다. 주님께서 당신 고통의 공로로 또 내 마음을 풀어주셔야 한다. 지금이 선이라면 주님께서 나에게 선으로 인도 하셨을 것이고, 지금이 악이라면 나는 분명히 그렇게 믿어왔다. 주님의 뜻이 지금 이 순간은 이러고 싶으셨나 보다고! 언제나 그러했듯이 나는 주님을 그렇게 믿는다. 지금 무조건적인 선이 필요하다면 주님께서는 늘 그러하셨듯이 또 내 마음을 무조건 적으로 열어 놓았을 것이다. 내 손으로 명절 음식을 준비하면서 어찌 내 마음을 다스려 보려고 스스로 달래 보지 않았겠는가?! 담긴 한을 삭혀 보려고 어찌 스스로 타협해 보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결국은 나의 의지나 바람대로 되지 못하고 말았다. 짝궁과의 대화도 원만하지 못했다. 명절은 지나갔고, 짝궁은 산으로 갔다. 또 남아있는 나는 아프다.

 

열매가 나무에서 익을 때까지 기다려 주지 못한 사람은 결국 제 욕심도 채우지 못했다. 제 손 탓은 하지 않고 떫은 맛 탓만 하여 던져 버린! 그 땡감은 골목의 발길질에 너무도 아파했다. 나는 상처 심한 그 감을 주워 담장 위에 올려 놓았다. 햇살에라도 익어 보시라고..... 나 어렸을 적에 땡감 떨어진 걸 주워 모아서 소금물에 삭혔다가 건져 두면 햇살에 익어 이른 가을을 맛 보게 해 주시던 친정엄마 생각에.... 

 

 

 

ㅡ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루가9,25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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