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성 최영이 바르바라,김성우 안토니오,현석문 가롤로,남경문 베드로시여~!
작성자조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22 조회수687 추천수8 반대(0) 신고

†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서울에서 태어난 최영이 바르바라는 어려서 아버지 최창흡 베드로와 어머니 
손소벽 막달레나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20세 때, 
상처한 조신철(가롤로)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영이는 친정으로 피신해 있다가 6월에 친정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체포될 때 어린 아들을 생각하는 모정으로 인해 배교할까 두려워 아들을 친척에게 맡겼다.
남편이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서적과 성물 때문에 포청에서 두 차례의 주뢰와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형조에서도 3차의 형문을 이겨내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1840년 2월 1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22세의 몸으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40은 남편, 50은 아버지, 64는 어머니, 50, 64와 함께 체포됨)

†성인 김성우 안토니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부유한 외교인 가정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우 
안토니오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차기 전부터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천주교를 알게 되자 즉시 두 동생과 함께 입교하여 열렬한 신앙으로 친척과 이웃에게 전교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도 중년에 이르러 입교하고 세상을 떠나자 김성우는 유방제 신부에게 직접 성세(세례)성사를 받고는 서울로 이사하여 사신의 집에 공소를 만들어 신부들을 도왔다.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김성우는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었으나 미리 피신 했었다. 고향 구산에 남아 있던 두 동생만이 체포되어 큰 동생 김덕심은 2년 후인 1841년 1월 28일 광주 옥에서 옥사했고,작은 동생은 여러 해 동안 옥살이 를 해야 했다.
그러나 피신해 있던 김성우도 1840년 1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성우는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참아냈다. 옥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며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고 그중 2명을 신앙으로 인도했다.
이렇게 옥중에서도 열렬한 신앙으로 무수한 고초를 견뎌낸 김성우는 옥중 생활 15개월 만인 1841년 4월 28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60도를 맞고 그 다음 날 47세를 일기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성인 현석문 가롤로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현석문 가롤로는 서울 중인 계급의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가족이 
모두 순교자가 되었다. 아버지 현계흠은 1801년 신유박해때 순교했고, 1839년 
기해 박해 때에는 그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누나 현경련 베네딕타가 순교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현석문은 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순교할 즈음에 회장으로 임명되어 박해가 끝난 후, 신부 없는 조선교회의 지도자로서 순교 자들의 기록을 정리하여 「기해일기」를 편집했고, 포졸들에게 쫓기면서도 이름을 바꾸어 모면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가 격려했으며
또 중국교회에 밀사를 보내고, 1845년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동행하여 상해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렇게 활동하던 현석문은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신부집에 남아있던 여교우들을 새로 마련한 집에 피신시키고 자신도 그 집에 숨어 있다가 7월 11일 함께 있던 정철염(가타리나), 이간난 (아가타), 김임이(데레사)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현석문은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끝까지 회장의 직분을 다했다.
마침내 9월 19일 50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53은 누님, 77, 78. 79와 함께 체포됨)

†성인 남경문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남경문 베드로는 20세 때 교우 처녀 허 바르 
바라와 결혼했는데 이때 중병이 들어 대세를 받고 그 즉시로 수계하기 시작 
했다. 그후 서양 신부들이 입국하자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된 후로는 냉담하기 시작하여 첩까지 거느리고 8년 동안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게 고해와 성체성사를 받고 과거의 죄를 보속 하기 위해 극기와 인내로 생활하며 교우들에게 순교하고 싶다는 말을자주 하곤했다.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7월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된 임성룡의 밀고 로 남경문도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남경문은 금위영(禁衛營)의 군인의 신분 이었으므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유혹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내고 마침내 9월 20일 6명의 교우와 함께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자신의 소원대로 순교했다.

▒ 자기 빛깔을 가진 사람 ▒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권력도 아니고 돈도 아니다.
각자가 생각해 낸 독자적인 비결만이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남이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비결만이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건 도움이 될 것이다.

- 야베 마사아키의 《유대인의 교섭전략》 중에서 -
하다못해 칼국수 양념에도 독자적 비결이 들어가야 손님을 끌 수 있습니다. 자기 개성, 자기 방식,자기 빛깔을 가진 사람만이 그만큼의 무형의 재산을 가진 사람입니다.
- 오늘 고도원의 아침편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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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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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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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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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BR>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BR>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BR>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BR>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BR>
    ◆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BR>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BR>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BR>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BR>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BR>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BR>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PRE></U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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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녀 최영이 바르바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70.jpg"> 
    서울에서 태어난 최영이 바르바라는 어려서 아버지 최창흡 베드로와 어머니 
    손소벽 막달레나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20세 때, 
    상처한 조신철(가롤로)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BR>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영이는 친정으로 피신해 있다가 6월에 친정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체포될 때 어린 아들을 생각하는 모정으로 
    인해 배교할까 두려워 아들을 친척에게 맡겼다. 
    <BR> 
    남편이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서적과 성물 때문에 포청에서 두 차례의 주뢰와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형조에서도 
    3차의 형문을 이겨내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1840년 2월 1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22세의 몸으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40은 남편, 50은 아버지, 64는 어머니, 50, 64와 함께 체포됨)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32449c><B>
    †성인 김성우 안토니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71.jpg"> 
    경기도 광주 구산에서 부유한 외교인 가정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성우 
    안토니오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차기 전부터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BR> 
    천주교를 알게 되자 즉시 두 동생과 함께 입교하여 열렬한 신앙으로 친척과 
    이웃에게 전교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도 중년에 이르러 입교하고 세상을 떠나자 
    김성우는 유방제 신부에게 직접 성세(세례)성사를 받고는 서울로 이사하여 
    사신의 집에 공소를 만들어 신부들을 도왔다. 
    <BR> 
    1839년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김성우는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었으나 미리 피신 
    했었다. 고향 구산에 남아 있던 두 동생만이 체포되어 큰 동생 김덕심은 2년 
    후인 1841년 1월 28일 광주 옥에서 옥사했고,작은 동생은 여러 해 동안 옥살이 
    를 해야 했다. 
    <BR> 
    그러나 피신해 있던 김성우도 1840년 1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성우는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참아냈다. 옥을 자기 집처럼 생각하며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고 그중 2명을 신앙으로 인도했다. 
    <BR> 
    이렇게 옥중에서도 열렬한 신앙으로 무수한 고초를 견뎌낸 김성우는 옥중 생활 
    15개월 만인 1841년 4월 28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60도를 맞고 그 다음 날 
    47세를 일기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32449c><B>
    †성인 현석문 가롤로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72.jpg"> 
    현석문 가롤로는 서울 중인 계급의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가족이 
    모두 순교자가 되었다. 아버지 현계흠은 1801년 신유박해때 순교했고, 1839년 
    기해 박해 때에는 그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누나 현경련 베네딕타가 순교했다. 
    <BR>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현석문은 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순교할 즈음에 
    회장으로 임명되어 박해가 끝난 후, 신부 없는 조선교회의 지도자로서 순교 
    자들의 기록을 정리하여 「기해일기」를 편집했고, 포졸들에게 쫓기면서도 
    이름을 바꾸어 모면하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가 격려했으며 
    <BR> 
    또 중국교회에 밀사를 보내고, 1845년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동행하여 
    상해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렇게 활동하던 현석문은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신부집에 남아있던 여교우들을 새로 마련한 집에 피신시키고 
    자신도 그 집에 숨어 있다가 7월 11일 함께 있던 정철염(가타리나), 이간난 
    (아가타), 김임이(데레사)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현석문은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끝까지 회장의 직분을 다했다. 
    <BR> 
    마침내 9월 19일 50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53은 누님, 77, 78. 79와 함께 체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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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 남경문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73.jpg">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남경문 베드로는 20세 때 교우 처녀 허 바르 
    바라와 결혼했는데 이때 중병이 들어 대세를 받고 그 즉시로 수계하기 시작 
    했다. 그후 서양 신부들이 입국하자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BR>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된 후로는 냉담하기 
    시작하여 첩까지 거느리고 8년 동안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게 고해와 성체성사를 받고 과거의 죄를 보속 
    하기 위해 극기와 인내로 생활하며 교우들에게 순교하고 싶다는 말을자주 
    하곤했다. 
    <BR>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7월에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된 임성룡의 밀고 
    로 남경문도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남경문은 금위영(禁衛營)의 군인의 신분 
    이었으므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유혹을 받았으나 모두 이겨내고 마침내 9월 
    20일 6명의 교우와 함께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자신의 소원대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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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 빛깔을 가진 사람 ▒
    <PRE><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움체 color=brown>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권력도 아니고 돈도 아니다.
    각자가 생각해 낸 독자적인 비결만이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남이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비결만이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건 도움이 될 것이다.
    <BR>
    - 야베 마사아키의 《유대인의 교섭전략》 중에서 -
    <BR>
    하다못해 칼국수 양념에도 독자적 비결이 들어가야 
    손님을 끌 수 있습니다. 자기 개성, 자기 방식,자기 빛깔을 
    가진 사람만이 그만큼의 무형의 재산을 가진 사람입니다. 
    <BR>
                      - 오늘 고도원의 아침편지입니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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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href="http://cafe.daum.net/Coreansanctus" target=bl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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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연구하고,기도하고 싶습니다.↖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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