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제 당번입니다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25 조회수423 추천수4 반대(0) 신고

장 베르뇌 주교 일행은 1856년 1월 17일에 중국인 배를 타고 조선으로 항해를 시작하였다.

일행은 중국 강남과 산동 사이에 있는 마을에서 배를 멈추고 외교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배 안에 만들어진 작은 창고 방에 두어달 가량 숨어 지내야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햇빛을 보지 못하고 굴 속 같은 창고 방에서 갇혀 살아야 했으며,

추위와 갈증, 공포등 이루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드디어 1856년 3월 26일에 조선에 도착했다.

 

당시 임금 철종의 천주교에 대한 호의와 위정자들의 무관심으로

이때는 커다란 곤란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주교와 신부들의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 프랑스 함대가 해안에 출현하였기 때문에

이에 위협을 느낀 정부에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장 베르뇌 주교는 조선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교황청에 청원하여 승계권을 가진 부주교를 미리 정하여 승품시킬 권한을 받은 바 있었다.

 

그런 청원을 한 배경은 조선 교회 상황이 늘 박해의 위험 중에 있었고,

언제라도 박해가 다시 시작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장 주교는 자신의 자리가 공석이 될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래서 1857년 3월 25일, 이미 11년 동안이나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안 다불뤼 신부를

부주교로 선정하고 승품시키게 되어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주교 승품식이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그무렵 입국하신 권 페롱 신부까지 포함하여, 조선교회는

주교 한분, 부주교 한분, 서양 신부 네 분, 방인 신부 한 분으로 조선 교회 창립 이후

처음으로성직자가 여럿인 비교적 안정된 교회체제를 갖게 되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대원군이 충청도에 있는 명나라 신종 황제 사당인 만동묘를 없애고

경복궁을 재건하는데에 많은 재정 부담을 지고 있었다.

즉 백성들에게는 원납전을 바치게 하고, 많은 부역을 시킴으로해서 원성을 사고 있었다.

이러한 실정을 규탄하는 천 여명의 유생들이 연명으로 상소하며 대궐 앞에서 농성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유생들은 천주교를 반대하던 사람들이었고,

실권자인 대원군의 여러 실정(失政)을 정면으로 규탄하지는 못하고

어떻게든 대원군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마침, 러시아 침략에 대비하여 대원군이 천주교와 접촉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더욱 더 연명상소와 대궐 앞의 농성을 계획하였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대원군으로서는 유생들의 의견을 어느 정도 들어주어

자신의 실정(失政)을 감추려 하였다.

더구나 천주교 주교 측과의 접촉이 이루어지기 전에 러시아가 자진 철수하였고,

중국에서 때마침 들려온 소문, 즉 서양인들이 중국인들 손에 의해 몰살되었다는 소문으로

서양인들을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천주교를 박해하여 몰수한 재산으로 경복궁 재건 비용으로 충당한다면

여러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천주교 박해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그래서 1866년 2월 10일 조정에서는 천주교 박해를 결정하고

'위정척사'라는 미명 하에 박해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 박해는 6년 간이나 전국적으로 계속되었고, 그 규모나 방법 면에서도 대박해라 할 수 있다.

 

또한 박해를 더욱 불붙인 사건은 프랑스 함대와 미국함대의 내침,

그리고 독일인 오페르트의 묘 도굴 사건들이 일어나,

그때마다 박해의 강도가 심해졌다.

 

병인박해는 일정한 재판형식이나 보고 절차를 무시하고

천주교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처형할 수 있도록 허가하여 줌으로써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병인 박해 때의 순교자만도 8,000-20,000 여명으로 추정된다.

 

 

 

위의 성인들은 103위 성인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에서 제 기도 담당으로 정해진 분들입니다.

 

프랑스 외방 전교회에서 선교사들을 보낼 때,

그분들은 죽음을 예상하고 떠나온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배에 오를 때,

자신의 조국 땅을 다시는 밟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땅에 엎드려 입을 맞추고 배에 올랐다 합니다.

이 분들을 보내는 가족과 친척들도 이분들의 발에 입을 맞추며 보냈다 합니다.

 

死地로 보내는 자신의 소중한 아들, 친구를 다시는 못볼 것이라는 비감한 마음으로 보내면서도

애써 눈물을 감췄을 그들과, 온갖 위험과 죽음을 무릅쓰고 타지로 떠나셨던

신부님들의 마음과 그들의 열절한 신앙을 생각해봅니다.

 

오늘은 겟세마니로 향하시던 예수님의 발걸음과 그분들의 발걸음을 떠올리면서

한발 한발 그 길을 따라가는 저의 발길에도 힘을 주어 봅니다.

그동안 비틀비틀 갈之자로 주춤주춤 따라가던 이 발에.

 

 

성 베르뇌 시메온,브르뜨니애르 유스또,도리 헨리꼬,볼리외 루도비꼬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위의 글은 양지 골배마을. 은이 성지에서 판매되고 있는 '순교자 성월', 요한사,에서 출판된 책에서 발췌, 편집하였습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