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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남종삼 요한, 전장운 요산, 최형 베드로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작성자조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26 조회수619 추천수7 반대(0) 신고

†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인 남종삼 요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자는 증오(曾五), 본관은 의령(宜寧). 성 남종삼 요한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성인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 
(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 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초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 이유일 등과 의논하여 영․불(英․佛)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시므온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그는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여섯 차례의 국문(鞠問)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성인 전장운 요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일명 ‘승연’으로도 불리는 성 전장운 요한은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출생하여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어려운 생계를 농사와 분상(粉商)으로 꾸려나갔다.1839년 
기해 박해 때 체포되어 구류간에 1개월 동안 갇힌 적이 있었으나 혹형과 고문을 
참지 못해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후 열심한 어머니의 권유로 배교한 것을 뉘우쳤다. 그러나 신부가 없어 고해 성사를 받을 수 없음을 한탄했다. 그러던 중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고해성사를 받고 열심한 신앙생활로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그후 1866년 초 장 주교의 명에 의해 교회서적 출판에 참여하게 되어 최형 베드로, 임치화를 도와 판각(板刻) 장만하는 일을 담당했으나 얼마 후 병인박해가 일어나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서적들이 적발되자 이로 인해 3월 1일 체포 되었다.
포청에서 1회의 신분, 의금부의 국청에서 9회의 신문과 2회의 형문, 그리고 신장 32도를 맞은 후 3월 6일 형조로 이송되어 3월 9일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로 최형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니 나이는 56세였다. (87과 함께 체포됨)

†성인 최 형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는 성 최형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출생하여 14세 때 부모의 권유로 입교했는데 가족이 모두 독실한 신자였다.1836년 마카오 유학길에 오른 3명의 신학생 중 병사한 최방제는 그의 동생이었다.
큰누나는 평생 동정으로 살았으며 형 최수는 병인박해로 절두산에서 참수되었다. 이러한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성장한 최형은 1836년 나 베드로 모방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로는 목수일과 묵주 만드는 일, 그리고 교회서적을 출판하는 일에 참여했다. 장 시므온 주교가 입국하자 교회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교회서적 출판에 큰 공로를 남겼다.
1866년 장 주교가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서적이 적발되자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전장운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3월 9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날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전장운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 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86과 함께 체포됨)

▒ 두런두런 사는 사람들 ▒
 
진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자잘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두런두런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건강하고 밝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 장성숙의《무엇이 사람보다 소중하리》중에서 -
심각하고 진지한 이야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편안하게 나누는 자잘한 말속에 사람사는 묘미가 더 있습니다. 그저 보기만 해도, 곁에 있기만 해도 좋은 사람과는 졸졸졸 시냇물처럼 흐르는 이야기만으로도 즐겁습니다. 모든 시름이 녹아내리고 새 힘이 솟아납니다. 함께 행복해집니다.
- 고도원의 아침편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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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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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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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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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BR>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BR>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BR>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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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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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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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BR>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BR>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BR>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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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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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PRE></U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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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남종삼 요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85.jpg"> 
자는 증오(曾五), 본관은 의령(宜寧). 성 남종삼 요한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성인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 
(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BR>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 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BR> 
그러던 중 1866년초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 이유일 등과 의논하여 
영&#8228;불(英&#8228;佛)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BR> 
대원군과 장 시므온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BR>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그는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국청에서 여섯 차례의 
국문(鞠問)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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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전장운 요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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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승연’으로도 불리는 성 전장운 요한은 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출생하여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어려운 생계를 농사와 분상(粉商)으로 꾸려나갔다.1839년 
기해 박해 때 체포되어 구류간에 1개월 동안 갇힌 적이 있었으나 혹형과 고문을 
참지 못해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BR> 
그후 열심한 어머니의 권유로 배교한 것을 뉘우쳤다. 그러나 신부가 없어 고해 
성사를 받을 수 없음을 한탄했다. 그러던 중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고해성사를 받고 열심한 신앙생활로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BR> 
그후 1866년 초 장 주교의 명에 의해 교회서적 출판에 참여하게 되어 최형 베드로, 
임치화를 도와 판각(板刻) 장만하는 일을 담당했으나 얼마 후 병인박해가 일어나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서적들이 적발되자 이로 인해 3월 1일 체포 
되었다. 
<BR> 
포청에서 1회의 신분, 의금부의 국청에서 9회의 신문과 2회의 형문, 그리고 신장 
32도를 맞은 후 3월 6일 형조로 이송되어 3월 9일 사형을 선고받고 그날로 최형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니 나이는 56세였다. (87과 함께 체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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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최 형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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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는 성 최형 베드로는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출생하여 14세 
때 부모의 권유로 입교했는데 가족이 모두 독실한 신자였다.1836년 마카오 유학길에 
오른 3명의 신학생 중 병사한 최방제는 그의 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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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누나는 평생 동정으로 살았으며 형 최수는 병인박해로 절두산에서 참수되었다. 
이러한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성장한 최형은 1836년 나 베드로 모방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BR>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로는 목수일과 묵주 만드는 일, 그리고 
교회서적을 출판하는 일에 참여했다. 장 시므온 주교가 입국하자 교회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교회서적 출판에 큰 공로를 남겼다. 
<BR> 
1866년 장 주교가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서적이 적발되자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전장운 요한과 함께 체포되어 3월 9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날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전장운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 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86과 함께 체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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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런두런 사는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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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자잘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두런두런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건강하고 밝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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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숙의《무엇이 사람보다 소중하리》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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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하고 진지한 이야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편안하게 나누는 자잘한 말속에 사람사는 묘미가 
더 있습니다. 그저 보기만 해도, 곁에 있기만 해도 좋은 사람과는 
졸졸졸 시냇물처럼 흐르는 이야기만으로도 즐겁습니다.
모든 시름이 녹아내리고 새 힘이 솟아납니다. 
함께 행복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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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도원의 아침편지입니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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