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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인 정의배,우세영,다블뤼,위앵,오매뜨르,장주기 요셉이시여~!
작성자조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27 조회수870 추천수9 반대(0) 신고

†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인 정의배 마르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서울 창동에서 태어난 성 정의배 마르코는 유업(儒業)에 종사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양 선교사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곧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1845년 3대 조선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후로는 서울지역의 회장직을 맡아 순교할 때까지 20여 년을 헌신적으로 일했다. 또 1854년 성영회(聖嬰會)가 설립되었을 때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1866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의 체포를 시작으로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서울 지역의 회장으로 명망이 높은 정의배는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2월 25일 체포되어 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그리고 그의 제자 우세영 알렉시오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7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성인 우세영 알렉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일병 '세필'로도 불리는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황해도 서흥 향교골에서 출생했다. 
18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우연히 알게 된 김요한이라는 회장의 권유로 관직의 
뜻을 버리고 상경하여 정의배 마르코에게 교리를 배운 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 
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후 부모의 반대와 박해를 인내와 열정으로 참아내어 가족들을 입교시키고 신앙 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2월 16일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첨례를 보다가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평양 감영에서의 혹형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석방되자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상경하여 스승 정의배를 만나러 갔다가 이미 체포된 정의배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스승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성인 다블뤼 안또니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각고 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순교자 비망기」 
를 만들어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 

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해지기가 퍽 어려웠고 더더욱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심하였으나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한국말을 잘하고 또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저 유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 하여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안 주교는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자 3일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동반 순교자인 민 신부와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 는테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포악한 형벌을 받았다.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어 그의 처형은 서울 대신 충청도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안 주교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은 곧 서울을 떠나 3월 30일 수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는데 마침 이날이 ‘예수 수난 축일’이었으므로 안 주교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고 당일 사형집행을 굳이 요구하여 청대로 실행되 었다.
형장인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지방의 강가인데 순교 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샷)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안 주교의 그때 나이는 49세,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성인 위앵 루까,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 성은 민(閔),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프랑스 '랑그르'교구 출신인 민 신부는 1861년 사제가 된 후 1865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도착지인 충청도 내포에 머물면서 안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안 주교의 지시로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악형을 겪은 후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형장이 충청도 수영으로 결정되어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3월 30일 수영에 도착, 그곳 ‘갈매못’에서 당일로 군문효수되었다. 그는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 품에 안겼다.

†성인 오매뜨르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성은 오(吳),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한 프랑스인 
선교사. 프랑스 ‘앙굴램’교구 출신인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는 1862년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 1863년 6월 임지인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경기도 수원 근방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히고 곧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 에서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나 1866년 박해가 일어나고 동년 3월 안 주교가 체포되자 한때 피신코자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못이루고 다시 ‘거더리’로 돌아와 즉시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동반 순교자인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일단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 수영 ‘갈매못’에서 3월 30일 처형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다음 두 번째 칼날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성인 장주기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일명 '낙소'로도 불리는 성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 느지지 (현재,경기도 
화성군 양감련 육당리)에서 출생했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로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했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 에서 신 뿌르띠에 신부와 박 쁘띠니꼴라 신부가 체포될 때 그는 제천 부근의 ‘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의 ‘거더리’ 에서 압송되어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루가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 사하라 사막 ▒
 
인생이란, 
특히 변화의 시기에 있어서 
인생이란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 
끝은 보이질 않고, 길을 잃기도 하며,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신기루를 좇기도 한다.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동안에는 언제 건너편에 다다를지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인생도 많은 부분이 그 모습과 닮았다. 

- 스티브 도나휴의《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중에서 -
누구나 자기 인생에 한번쯤은 사하라 사막을 건널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과 용기, 잘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열심히 걸어가다 보면 어느덧 사하라 사막은 사라지고 기적처럼 오아시스를 만나게 됩니다.
- 오늘 고도원의 아침편지입니다 -
    《함께 연구하고,기도하고 싶습니다.↖클릭》
소스입니다.

<PRE><FONT style="FONT-SIZE: 14pt" face=돋움체 color=red><B>
†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PRE><FONT style="FONT-SIZE: 13pt" face=돋움체 color=brown><B><UL>
◈ 한국 순교자들에게 바치는 기도 ◈
<PRE><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움체 color=brown>
◇ 이 땅의 모든 순교자여,
   당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굳은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나이다.
<BR>
◆ 저희는 현세에서 악의 세력과 치열하게 싸우며
   당신들이 거두신 승리의 영광을 노래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찬양하오니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BR>
◇ 위대하신 순교자들이여,
   천상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하느님의 자비를 얻어주소서.
<BR>
◆ 지금도 어둠의 세력이
   교회를 박해하고 있사오니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팔로 교회를 붙들어 보호하시며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지역에까지
   널리 펴시도록 빌어주소서.
<BR>
◇ 용감하신 순교자들이여, 특별히 청하오니
   우리 나라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BR>
◆ 당신들은 이땅에서 
   많은 고난을 겪으며 사시다가
   목숨까지 바치셨사오니
<BR>
◇ 전능하신 하느님께 빌어주시어
   교회를 이땅에서 날로 자라게 하시며
   사제를 많이 나게 하시고
<BR> 
◆ 신자들이 주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냉담자들은 다시 열심해지며
   갈린 형제들은 같은 믿음으로하나 되고
   비신자들은 참신앙으로 하느님을 알아
   천지의 창조주
   인류의 구세주를 찾아오게 하소서.
<BR>
◇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여,
   저희도 그 영광을 생각하며 기뻐하나이다.
   간절히 청하오니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빌어주시어
   저희와 친척과 은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얻어주소서.
<BR>
◆ 또한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BR>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BR>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PRE></UL></B>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32449c><B>
†성인 정의배 마르코,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88.jpg"> 
서울 창동에서 태어난 성 정의배 마르코는 유업(儒業)에 종사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양 선교사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곧 교리를 배우고 
입교했다. 
<BR> 
1845년 3대 조선교구장 고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후로는 서울지역의 회장직을 
맡아 순교할 때까지 20여 년을 헌신적으로 일했다. 또 1854년 성영회(聖&#23344;會)가 
설립되었을 때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다. 
<BR> 
1866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의 체포를 시작으로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서울 
지역의 회장으로 명망이 높은 정의배는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2월 25일 
체포되어 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그리고 그의 제자 우세영 알렉시오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7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32449c><B>
†성인 우세영 알렉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89.jpg"> 
일병 '세필'로도 불리는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황해도 서흥 향교골에서 출생했다. 
18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우연히 알게 된 김요한이라는 회장의 권유로 관직의 
뜻을 버리고 상경하여 정의배 마르코에게 교리를 배운 후 장 시므온 베르뇌 주교 
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BR> 
그후 부모의 반대와 박해를 인내와 열정으로 참아내어 가족들을 입교시키고 신앙 
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했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2월 16일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첨례를 보다가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평양 감영에서의 혹형에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BR> 
석방되자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상경하여 스승 정의배를 만나러 갔다가 이미 
체포된 정의배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3월 11일 신 신부, 박 신부, 
스승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32449c><B>
†성인 다블뤼 안또니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90.jpg">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각고 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순교자 비망기」 
를 만들어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 
<BR> 
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해지기가 퍽 
어려웠고 더더욱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심하였으나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한국말을 잘하고 또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BR> 
그는 김대건 신부의 저 유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 
하여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BR> 
안 주교는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자 3일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동반 순교자인 민 신부와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 
는테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포악한 형벌을 받았다. 
<BR>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어 그의 처형은 서울 대신 충청도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안 주교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은 곧 서울을 떠나 3월 30일 수영에 도착하였다. 
<BR>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는데 마침 이날이 ‘예수 수난 축일’이었으므로 안 주교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고 당일 사형집행을 굳이 요구하여 청대로 실행되 었다. 
<BR> 
형장인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지방의 강가인데 순교 
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BR>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샷)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안 주교의 그때 
나이는 49세,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32449c><B>
†성인 위앵 루까,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91.jpg"> 
한국 성은 민(閔), 1866년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프랑스 '랑그르'교구 출신인 민 신부는 1861년 사제가 된 후 1865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BR> 
그는 도착지인 충청도 내포에 머물면서 안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안 주교의 지시로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악형을 겪은 후 사형이 선고되었다. 
<BR> 
그는 형장이 충청도 수영으로 결정되어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3월 30일 
수영에 도착, 그곳 ‘갈매못’에서 당일로 군문효수되었다. 그는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 품에 안겼다.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32449c><B>
†성인 오매뜨르 베드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92.jpg"> 
한국성은 오(吳),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한 프랑스인 
선교사. 프랑스 ‘앙굴램’교구 출신인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는 1862년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 1863년 6월 임지인 조선 땅을 밟았다. 
<BR> 
그는 경기도 수원 근방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히고 곧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 
에서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나 1866년 박해가 일어나고 동년 3월 안 주교가 
체포되자 한때 피신코자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못이루고 다시 
‘거더리’로 돌아와 즉시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BR> 
그는 동반 순교자인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일단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 수영 ‘갈매못’에서 3월 30일 처형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다음 두 번째 칼날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32449c><B>
†성인 장주기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B>
<IMG src="http://pds.catholic.or.kr/Archives/ncbbs/baltimore/pds1/0/9.93.jpg"> 
일명 '낙소'로도 불리는 성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 느지지 (현재,경기도 
화성군 양감련 육당리)에서 출생했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로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BR>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했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 
에서 신 뿌르띠에 신부와 박 쁘띠니꼴라 신부가 체포될 때 그는 제천 부근의 ‘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BR>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의 ‘거더리’ 
에서 압송되어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루가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PRE><FONT style="FONT-SIZE: 12pt" face=돋움체 color=brown><B>
▒ 사하라 사막 ▒
<PRE><FONT style="FONT-SIZE: 11pt" face=돋움체 color=brown> 
인생이란, 
특히 변화의 시기에 있어서 
인생이란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 
끝은 보이질 않고, 길을 잃기도 하며,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신기루를 좇기도 한다.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동안에는 언제 건너편에 다다를지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인생도 많은 부분이 그 모습과 닮았다. 
<BR>
- 스티브 도나휴의《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중에서 -
<BR>
누구나 자기 인생에 한번쯤은 
사하라 사막을 건널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과 용기, 잘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열심히 걸어가다 보면 
어느덧 사하라 사막은 사라지고 
기적처럼 오아시스를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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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고도원의 아침편지입니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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