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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92) 6년 전의 내막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28 조회수680 추천수9 반대(0) 신고

2005년9월28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성 벤체슬라오 순교자, 또는 성 라우렌시오 루이스와 동료 순교자 기념 ㅡ느혜마야서2,1-8;루가9,57-62ㅡ

 

          6년 전의 내막

                         이순의

 

 

사람이 살다가 보면 생각지도 않은 어폐로 인하여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것은 사람이 품고 사는 감정이 다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나 가치관들이 제 각각이다 보니 누구에게나 경험이 있을 법하다. 한 번쯤이라도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분은 성인 보다도 위대한 현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성인전을 읽다 보면 뭔가 다른 삶의 방식과 가치관 때문에 무수히 많은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그로 인하여 고난을 받고 순교까지 감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재하고 사는 동안에 때로는 상처를 받는 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를 주는 자가 되기도 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반드시 격어야 하고 또한 잊어버리거나 치유해야만 하는 숙제인지도 모른다.

 

아빠가 계시지 않아서 어쩐지 울적하고 허전한 날이나 서로 엇갈림이 심하여 마음이 힘든 날이면 덩치가 황소만큼 큰 아들녀석은 뱃살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초라해져 가는 엄마에게 잠을 재워달라고 요청을 한다. 간혹은 징그럽다고 거절하기도 하지만 간혹은 아기 때부터 자작시에 자작곡을 해서 들려 준 노래를 불러주며 토닥토닥 재워주기도 한다. 올 해 여름이 유난히도 힘들었던 탓인지 아들녀석의 주문은 다른 때에 비하여 좀 빈번해진 편이다. 고3생의 허허한 부담감을 위로 받고 싶기도 하겠지만 일생일대에 볼 수 없었던 악순환의 아빠와 엄마를 지켜보면서 냉정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소에도 거리낌 없는 대화가 많은 모자간이었지만 요즘 들어서 더욱 대화가 많아지고 있었다. 친구관계라든지 학교생활이며, 자기의 생각과 현실의 냉정한 구조에서 갈등하는 전형적인 수험생의 무기력이라든지, 성적이 만족스럽지 못하여 자신의 이상을 접어가야 하는 좌절들! 심지어는 사춘기의 징후들 때문에 자신의 순결성을 의심하느라고 몸부림하였던..... 다행히 요즘은 사나이의 생리적 현상을 인정해 가면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편안해 진 눈치도 역력하다. 그런데 느닷없이 6년 전의 상처를 토해내는 것이 아닌가?! 엄마는 전혀 상처를 주지 않았는데 그 모든 상황들을 왜곡 이해할 뿐만 아니라 엄마를 엄청난 가해자로 기억하고 있었다. 단지 자기의 엄마이기 때문에 덮어질 수 있었다는.....

 

그런데 6년 만에 꺼내 놓은 대화는 서로 절충하여 실마리를 풀지 못했다. 아들녀석에게는 그 만큼 깊은 상처였고, 엄마의 상황이나 여차저차한 전개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도 저렇게도 이해의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험생이고, 또 요즘의 가정 분위기도 그렇고 하여, 가슴이 아팠지만 그냥 그대로 덮어두기로 했다. 제가 알고 싶은 날이 오면 알게 될 것이고, 이해하고 싶은 날이 오면 이해할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은 너무나 열심히 교회에 충실 했던 나의 불찰이었다. 교회란 다녀도 되고 안다녀도 되는, 상황에 따라서 교회활동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융통성을 보였더라면 지금까지 아들의 가슴에 저렇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6년 전에 초등부 주일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당시에 우리 집에는 흔하디 흔한 286 컴퓨터는 고사하고라도 엿장수도 바꿔가지 않는다는 도스 컴퓨터도 없었다. 그래서 아들의 오락실 출입이 빈번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붐이 일어난 컴퓨터 학원에 아이들을 보내느라고 남들은 당연한 질서를 형성해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본으로 보낸다는 컴퓨터 학원에 내 아이는 보내지 못했다. 그런데 컴퓨터 제조회사에서 무료로 가르쳐 준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어른들 대상이라서 시간이 낮시간이었고, 방학중에라도 내 아이를 좀 보내서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당에서 주일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주일학교가 우선이었지 그렇게도 아들녀석이 배우고 싶어하던 무료 컴퓨터 교육이 아니었다. 

 

그래서 성당의 행사에 맞추어서 일정을 조절해 두었었다. 성탄절과 은총잔치랑 초등부 겨울 행사에 맞추느라고 여러 번 일정을 조절하여 그렇게 보내주고 싶었던 컴퓨터 학원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 1회인지 2회인지 기억은 없지만 몇 번 아닌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보좌 신부님께서 새로 부임하시고 바로 초등부 졸업식이 있었다. 내 나름대로는 그 졸업식에 맞추려고 얼마나 힘이 들었었는데 그 졸업식 날이 갑자기 변경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알아 본 결과 새로 부임 해 오신 보좌 신부님의 일정을 변경할 수 없어서 초등부 졸업식을 변경한 것이라고 했다. 당연히 나는 교사들과 작은 언쟁이 되었다.

 

이런식의 교회 운영이라면 누가 교회에 열심할 이유가 있을 것인가? 였다. 늘 하는 말이지만 교회에서 문제 재기를 하게 되면 동물원의 원숭이 꼴이 되는 것은 교회가 아니라 신자라는 점이다. 교사들은 그깟 컴퓨터 학원을 하루만 쉬면 되지 그만한 일로 소란을 피운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나의 입장은 그렇지가 않았다. 남의 아이들이 컴퓨터 학원에 다니는 모습을 볼 때면 얼마나 얼마나 보내주고 싶었던 컴퓨터 학원인가? 그러나 그걸 보내 줄 수 없었던 엄마가 아니던가?! 더구나 그 기업에서 실시하는 무료 교육은 그렇게 하루쯤 빠져도 될 만큼의 여유작작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고작 몇 회 실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6년씩이나 열심히 주일학교를 다닌 아이들의 졸업식을 단기간에 변경한 사유가 새로 부임한 보좌신부님 한 사람의 일정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보좌 신부님께서 꼭 참여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정도 어느 중요한 단체이기 때문에 변경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6년동안 주일학교에 열심한 초등부 아이들의 졸업 일정은 갑자기 불시에 변경을 해도 된다는 발상이 옳았을 것인가? 이 말은 곧 어린 아이들에게 상황에 따라서 성당에 와도 되고 오지 않아도 된다는 가르침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그게 ☆☆엄마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 다른 엄마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졸업식에 올거면 오고 말거면 말면 되는 것이지 학교 졸업식도 아닌 성당 졸업식에 목숨거는 사람은 없어요.> 맞는 말이었다. 학교 졸업식은 1년 전에 잡아 놓으면 교장선생님이 죽더라도 교장선생님만 불참하시면 되는 것이지 졸업식이 변경되는 경우는 천재지변이 아니고는 없는 일이었다.

 

상황이야 어떻든지 나는 운영에 관한 제동을 걸었다가 본전도 못 찾고 졸업식에는 가지 못했다. 기억이 자세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아들녀석이 컴퓨터 수업을 받으러 간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곤란한 상황이 중복이 될 때면 나는 언제나 아들녀석의 결단에 따르는 특징이 있으므로 그때도 양갈래의 최종 선택은 아들녀석이 했을 것이다. 얼마나 배우고 싶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 후로 내 아이가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복사를 하고 싶었는데 못하게 되었을 때도 복사하는 선배형의 린치를 격느라고 성당의 선배들에 대하여 두드러기를 앓았을 만큼 심적인 고통을 격었던 아이가 아니던가?! 그런데 졸업식 때문에 친구들의 외면이 있었다는 말을 6년이 지난 지금에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들녀석이 뭔가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있다. 엄마가 졸업식과 관련하여 친구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싫은 소리를 했기 때문에 친구가 화가 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친구가 아주 오랫동안 자기를 외면하게 되었고, 나중에 그 친구랑 화해 하게 되었을 때 엄마 때문이었다고 말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평신도와는 절대로 다투는 사람이 아니다. 그걸 신조처럼 지키며 살아 왔고 앞으로도 지키며 살아 갈 것이다. 그래서 그때도 교사들에게 의견 타진을 했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졸업식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교사들도 신심에 의존한 무보수 봉사자들의 희생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졸업식 답사를 우리 아이가 못 하게 되었으니 부담 갖지 말으시고 아이에게 졸업식 답사를 하게 하시라는 확정적인 전화를 드렸을 뿐이다.

 

그런데 그 엄마가 그 친구에게 뭐라고 전달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내 아이가 외면을 당할만큼 어려운 전화를 그 엄마에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엄마와는 단 한 번의 트러블도 없이 지금도 너무나 잘 지내고 반가워하고 좋아하는 사이인데 내 아들은 6년 전에 있었던 친구의 외면에 대하여 엄마를 용납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떻든 졸업식이 끝나고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쯤,나중에 엄마들의 입을 통하여 졸업장 이야기도 나오고, 졸업생들에게 주는 선물 이야기도 나오고..... 그런데 우리 아이는 졸업장도 졸업선물도 전달 받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들의 입에서 <아무리 졸업식에는 오지 않았어도 ☆☆에게는 주일학교 졸업장이랑 선물을 전달했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개의치 않았고,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은 물론 선생님들 조차도 주일학교 졸업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6년 동안 열심히 했어도 마지막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그 졸업장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된다는 사실을 신부님도 수녀님도 선생님도 나도 모두가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로 우리 모자의 신앙관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삶의 모든 일정을 교회에 맞추어 살려고 노력했던 가치들을 희석시키고, 배제 시키느라고, 역류하는 훈련을 다음 6년동안 해 왔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 모자는 그렇게 열심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 세상이 흐르는 순리 대로 가도 되고 안가도 되는 교회! 그 사실을 인정하며 가슴 속의 그리스도를 더 안배하는 신앙을 따라 살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 우연하게 초등부 첫영성체 교리 준비를 하는 선생님과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은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시지 않지만 첫영성체 교리반 관리를 하시다가 아무 관계도 없는 나를 보시더니 컴퓨터 학원에 가야한다고 어떤 엄마가 오셔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를 해대면서 실랄하게 핏대를 세우시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내 아이는 컴퓨터 학원을 다닌 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첫영성체 교리 중에 학교도 결석 시키며 내 아이를 쉬게 해 준 엄마였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어떤 기억으로 나에게 그런 말을 꼭 하고 싶었을까를 생각 해 본 적이 있다. 6년 전의 진짜 내막은 교회의 일정에 따라서 사느라고 너무나 큰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나에게 주님께서는 그렇게 까지 열심히 할 필요가 없었다 라고 알려 주신 훈화였다. 

 

졸업식 날을 일주일 남겨 놓고 변경 될 것인데 몇 달 전 부터 그거에 맞추느라고 그 몸부림을 하고..... 지금 생각해도 내 자신이 나에게 측은지심이 동하여 너무나 안스러웁다. 그러나 제 삼자가 본 나의 모습은 이해 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모습이었던가 보다. 그러니 내 아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들에게 이해 받지 못하고 용서 받지 못하는 어미가 되어 있을 줄을 누가 알았을 것인가?! 상기 하지만 내 아이가 지금까지 컴퓨터 교육을 받은 것은 그 기업에서 무료로 받은 그 몇 시간이 전부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친구들의 어깨 넘어로, 또는 혼자 이것저것 해 보고, 쪼금 어려운 것은 책이나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서 채워가고 있다. 

 

모든 원인이 신앙의 활동에 너무나 충실한 탓이었고, 또한 가난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 해서 아들을 돕고 싶었던 모성의 열정 탓이었다. 그나마라도 그때는 내가 해 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은 해 주고 싶어도 해 줄 수가 없다. 황소 만큼 자라버린 아들의 넓은 가슴팍을 토닥거리는 이 엄마의 손이 너무나 작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아 진 손으로 아들의 무엇을 채워 줄 수 있겠는가? 제 놈도 제 손바닥 보다 작은 가슴을 가진 제 자식의 가슴을 토닥거려 줄 수 있을 때나 이 부족한 어미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히 나는 달랐던 것 같다. 어쩌면 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아들이 격고 살아온 세월도 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먹을 것은 없어도 책은 사야 되는 사람! 학원비는 없어도 어떤 정보를 뚫어서라도 유료든 무료든 찾아가 즐거워야 되는 사람! 공부는 안해도 마음은 착해야 되는 사람! 결코 평범할 수 없게 빈티 나는 가치관으로 부유한 아성의 행복을  용케도 누릴 줄 알고 기쁠 줄 아는 사람!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사건들이 너무나 단호하고 중요한 사단이 되기도 했었던 사람! 누구나 생각없이 뱉을 수 있는 일상들이 조목조목 묵상이 되어서 숨통이 막힐것 같았어도 그대로 또 은총이 충만하여 잘도 살아지는 사람! 그래서 어린 내 아이는 늘 이상한 편견(?)들을 이겨내야만 했을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사는 동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무수히 많은 상처를 주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다 위로하지?

 

ㅡ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가 9,58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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