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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가을, 홀연히 귀천하신 수녀님
작성자양승국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28 조회수930 추천수13 반대(0) 신고
9월 29일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요한 1장 47-51절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가을 홀연히 귀천하신 수녀님>


청명하다 못해 눈부신 가을하늘 아래 너무나 아쉽고도 안타까운 한 임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임종은 가을하늘만큼이나 깨끗하고 찬란했습니다.


이제 겨우 40대 초반인 수녀님, 종신서원을 발 한지 겨우 두 달 남짓 지난 수녀님, 너무 착해빠진 게 유일한 흠이었던 수녀님, 아무리 상황이 열악해도 항상 생글생글 미소 짓던 천사표 수녀님, 그간 고생이 너무 많으셨는데...이제 더 이상 고통이 없는 곳에서 편안히 쉬고 계시겠지요.


제가 수녀님을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수녀원에 입회하기 전이었습니다. 입회 전, 그녀는 사랑에 굶주린 보육원 아이들의 따뜻한 엄마로 살아왔었지요. 제가 처음 그녀의 얼굴을 봤을 때, 이미 그녀의 얼굴에는 ‘천사’라고 적혀있었습니다.


더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 더 가난하고 소외한 아이들을 선택하기 위해, 그리고 그리도 염원하던 그리스도 정배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그녀는 세상을 뒤로 하고 수녀회에 입회하게 됩니다.


꿈에 그리던 수도생활이었기에 하루하루 천국 같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행복해서 죽겠다는 표정이 역력했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이웃과 세상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고민하던 끝에,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반드시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고야말겠다며 야무진 꿈도 키워나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수련기를 보내던 어느 날 그녀는 암 진단을 받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투병생활, 참으로 지루하고도 힘겨웠습니다. 항암치료를 위해 셀 수도 없이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습니다. 증세가 좀 완화되었다 싶어 안심하면 어김없이 병마가 다시 찾아들었습니다. 길고도 지루한 항암치료 과정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항상 씩씩했습니다.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그녀 특유의 ‘천사표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투병생활의 고통 가운데서도 “제가 환자라고 다른 사람과 차별하지 말고 똑같이 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수도회 어른께 청했습니다.


투병생활 말기의 안타까웠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침대에 누워있지도 앉아있지도 못해 힘겨워하던 모습, 어머니보다 먼저 떠나는 것에 대한 송구스런 눈빛, 자식을 앞세운 어머니의 눈물, 못다 이룬 꿈, 아쉬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짧았던 수도생활은 제게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녀의 수도생활은 비록 짧았지만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던 나날이었습니다. 그녀는 암과의 치열한 싸움 가운데서도 절대로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녀는 제게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온 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마지막 항암치료차 병원에 들렀을 때 수녀님이 제게 건넨 말씀이 기억납니다. 아주 담담한 어조로.


“이제 뼈까지 전이가 되었다고 하네요. 그 말은 이제 정리해야 될 때가 왔다는 말이겠지요. 저는 떠날 준비가 다 되었는데, 엄마가 걱정이예요.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차라리 잘 되었어요. 저 때문에 고생하신 수녀님들과 엄마에게 폐 그만 끼치고 빨리 하느님께 가고 싶어요.”


그녀는 한마디로 천사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 대천사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천사 중의 천사들이자 대천사들인 미카엘과 가브리엘, 라파엘 천사를 기억합니다.


천사란 말마디 그대로 하느님의 사자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중개하는 영적인 존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하는 사명이 주 임무인 존재일 것입니다. 언제나 하느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만을 한 치 오차도 없이 실행하는 영적인 존재, 늘 부족한 우리 인간들보다는 한 단계 차원이 높은 하느님의 피조물로 여겨집니다.


이 가을, 홀연히 세상을 떠난 수녀님, 어쩌면 하느님께서 부족한 우리에게 보내신 천사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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