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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해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29 조회수590 추천수9 반대(0) 신고

 
(작년 저희 본당에서 있었던 '순교자의 밤' 행사의 한장면입니다 )

9.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비난에 대한 해명

 

또한 애비도 없고 임금도 모르는 것들이라고 헐뜯는데, 이것은 천주성교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십계 중 네번째에 "부모를 효성으로 공경하라" 했으니,

충효 두 글자는 만세대 동안 변하지 않는 도리입니다.

 

부모의 뜻과 몸을 봉양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것이요,

교를 믿는 사람으로서는 더욱 힘써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모께 예의를 다해 섬기고 힘을 다해 봉양하는 것이

임금에 대해선 충성이 되어 목숨을 바치며 불길 속에 뛰어드는 것도 감히 피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계명을 어기는 것이니,

과연 애비도 없고 임금도 모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다만 임금이 금지했는데도 백성들이 행하고,

아비가 금지했는데도 자식이 행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까?

이 또한 해명할 것이 있습니다.

 

지위에는 높고 낮은 것이 있고, 일에는 가볍고 중한 것이 있으니,

한 집안에서 아버지가 가장 중하지만, 아버지보다 높은 사람은 임금입니다.

또 한 나라에서 임금이 가장 중하지만, 임금보다 높은 것은 천지대군입니다.

 

아버지의 명을 따르면서 임금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죄가 무거울 것이요.

임금의 명을 따르되 천지대군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죄가 비길 바 없이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주를 받들어 섬기자는 것이지,

일부러 임금의 명을 어기고자 한 것이 아닌 부득이한 것이었느니,

이 한가지 일을 가지고 애비도 없고 임금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10. '통화통색'의 비난에 대한 해명

 

또 재화를 유통하고 색정을 나눈다고 말하는데,

재화를 유통시키는 것은 자고로 국가에서는 하루라도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있는 물건과 없는 물건을 서로 유통해야 백성들이 서로 도움받아 살아갈텐데,

만약 재화를 유통시키는 일이 없다면,

온 나라 안에 살아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것이 장차 불미스러운 법인데, 오히려 금지시켜야 할 일이겠습니까?

또 이른바 색정을 나누는 것은 짐승들도 오히려 그러지 않는 법인데,

어떻게 천주성교를 믿는 우리에게 그런 비난을 하는 것입니까?

 

십계명 중 여섯번째에 "음사한 짓을 하지 말라"고 했고,

아홉번째에 "남의 아내를 바라지 말라"고 하였으니,

여섯번째 계명은 몸으로 범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요.

아홉번째 계명은 마음으로 범하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천주교가 음사한 것을 엄격히 금하기를 이처럼 반복하고 있는데,

도리어 색정을 나눈다는 소문을 들쒸우니,

어디에 이처럼 윤리를 더럽히고 법도를 어지럽히는 가르침이 있었습니까?

 

성인은 당시에 천주교에 대해서 비난성 오해들이 있었음을 알고

그에 대해 해명을 하십니다.

 

'무부무군'의 비난은 당시 양주와 묵적에 대한 비판이었는데,

천주교에 대해서도 똑같은 논리로 비판한 것입니다.

 

조정의 사대부들은 1791년 윤지충의 폐제사 사건으로 발단된 진산사건이후,

천주교를 아비도 모르는 패륜으로 단정하였고,

또 "天主가 곧 大父母요, 大主宰'라는 말과

십계명 안에 군신간의 의리가 들어있지 않다는 점을 들어

자기 임금도 모르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윤지충공소 참조)

 

또한 '통화(通貨)'의 비난은 가난한 천주교인들과 재화를 서로 나누어 쓴 것을 두고 나온 말입니다.

'통색(通色)'은 남녀 노소, 양반 빈부의 구분없이 집회에서 한 자리에 앉는 것을 두고 나온 말입니다.

 

당시 천주교에 대한 상소문, 천주교인을 잡으라는 정부의 공문서들에

위의 사실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으니, 그 한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우리 조정이 예약문물이 중화라고 일컬어지는데,

일종의 음사한 무리들이 서양의 서적을 구입해와서는

스스로 교주를 세우고 이상한 학문을 부르짖어,

부자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군신의 의리를 멸하며,

남녀가 서로 더럽혀 부부의 윤리가 어지러워졌습니다.

재화는 남자나 여자나 크게 욕심하는 바인데,

돈과 곡식을 서로 빌려주어 가난한 거지들도 살게하고,

내외의 구별이 없어 간음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유생 박영원의 상소)

 

이는 천주교의 입장에서보면 오히려 그들의 삶이

복음의 정신 그대로, 서로 나누고 모든 이를 평등하게 대하며

살아갔음을 증명하는 기록이 됩니다.

 

성인은 이러한 당시의 오해에 십계명을 들어 조목조목 해명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자극하지않으려는 조심성과 함께, 그러나

물러날 수 없는 바는 결단코 물러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십니다.

 

특히 십계명의 6계명을 육체적 간음과 9계명을 정신적 간음으로 

해석하고 있는 성인의 날카로움을 오늘 주시합니다.

마치 산상설교의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그렇게 두번이나 이중장치를 하여 '음사'를 경계한 천주교의 윤리성을 찾아내

당당하게 논증하고 있는 논리정연한 지성에도 경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최초의 호교론이라는 상재상서.

왠지 '호교론'이라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듭니다.

자기 종교만 고집하는 골수분자, 폐쇄적인 사고. 극보수적인 사람 등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니까요.

 

그러나 이런 글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알게되니

'호교론'이라는 단어 자체도 새로 다가옵니다.

 

성인이 이 글을 썼던 것은 억울하게 오해받아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있는 현실 때문이었겠지요.

그야말로 해명의 차원에서, 변호의 차원에서, 생명수호의 차원에서,

천주교의 참된 가르침을 누누히 알리려던 뜻이었지요.

 

여태까지는 쉽게 '호교론'이라고 말했지만.

아마도 이젠 '호교론'이라고 해서 쉽게 일축해버리긴 어렵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또 다른 까닭이 있습니다.

 

오늘 어떤 분에게서, 참 놀라운 말을 들었습니다.

모모 신부님의 강연은 별로 듣고 싶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더니 너무 '교회적'이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말씀을 하신 '어떤 분'도 바로 '교회의 사람'이고,

제복을 입고 평생 살아가시는 분이기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 신부님이 '교회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을 텐데' 싶었습니다.

신부님의 강연 주제가 마침 현대 사회를 휩쓸고 있는

'혼합종교'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저는 교회의 입장에서 우려를 표명해야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자들이 교회의 입장을 들어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발언을 듣고,

'교회적'이면 무조건 그른가?

'교회사람이 교회적이어선 안되는가?'

'교회에 비판적이어야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가?'

많이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분은 늘 교회에 대해 보수적 입장에 있는 분들을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아마도 교회의 권위적이고 정체되고 획일적인 모습에 염증이 느껴져서 그랬으리라 짐작도 합니다만...

어떻든....

한마디로 쉽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무책임하게 말해선 안되는 것들이

우리 주위엔 많이 있고, 내가 모르는 상황들에 대해서는, 또 아는 입장이라해도 

좀더 신중해져야한다는 것을 두고두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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