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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
작성자황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5-09-30 조회수496 추천수2 반대(0) 신고

 

 

 

      

 

                   <황사영 백서 토굴>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펌]


죄인 도마 등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 주교님께 호소하옵니다....중략......박해의 전말을 대강 아뢰고자......이하생략.....

 

 

조선 천주교회 긴박하게 전개되는 박해상황을 흰 명주 비단 자락위에 피, 눈물을 뿌리며 깨알같은 작은 붓 글씨로 호소하는... 가로 62cm, 세로38cm ...122행 1만 3,384자에 달하며 `서론' `본론' `결론, 대안제시'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장문으로 씌여진 황사영(黃嗣永 알렉산델 1775∼1801) 백서(帛書)의 내용은... 
 

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 등을 북경의 주교에게 건의 보고 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 당한 비밀문서 입니다.

 

 

`서론'은 1행부터 6행으로, 여기에서는 1785년 이후 교회의 사정과 박해 발생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고 `본론'은 7행부터 90행까지로 전체 분량 중 거의 70%에 해당됩니다.

 

 

본론에서는 신유박해의 전개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특히 황사영은 여기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들은 교회관계 사건들을 정리한 내용으로, 즉 그는 정약종을 비롯, 최창현, 이존창, 유항검, 등의 체포와 죽음을 기록하였고, 또한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 및 죽음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밝혀 놓고 있습니다.

 

 

한편, 91행 이하의 `결론' 내지 ` 대안제시'의 부분에서는 먼저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폐상과 박해 종식에 관한 강한 열망으로 청국 교회와의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이어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합니다.

 

 

즉 그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淸)의 위력에 의존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으로 그는 청국이 종주권(宗主權)을 행사하여 황제의 명으로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주기를 요청하고, 더 나아가서는 청국의 감호(監護)를 요청하며, 조선을 청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조선에서도 북경에서처럼 선교사의 활동을 보장 받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또한 그는 서양의 무력시위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도 제시하는데, 즉 그는 서양의 배 수백 척과 병사 5, 6만 명을 동원하여 조선정부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박해 주기를 희망한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박해로 인해 교회의 규칙을 지킬 수 없음을 호소하며 대소재(大小齋)의 관면을 청하는 내용의 글로 백서를 끝맺고 있습니다.

 

 

이 백서의 발신자는 황심 도마로 되어 있는데, 이유인즉 황심은 이미 조선교회의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몇 차례에 걸쳐 전달한바 있었던 인물로, 황사영은 그의 이름을 빌어 조선교회의 사정을 보고하고 대책의 마련을 호소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백서가 작성된 곳은 배론의 김귀동 가(家)로 그가 백서에 씌어진 사실들을 수집 정리하고 구상하기 시작한 때는 자신이 배론으로 피신했던 1801년 2월(음) 전후로 파악됩니다. 그는 피신 중 박해에 관한 사실을 김한빈 등을 통해 계속 수집하였고 이를 기록해 두다가 같은 해 8월 26일(음) 이를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황심 편에 북경으로 발송하려다 미수에 그칩니다.

 

 

이 백서는 황사영(알렉산델) 순교자의 신앙을 갈망하는 불타는 열정을 보여줍니다.

 

 

그는 박해로 인해 죽어간 자신의 동료들에 관한 기록을 철저히 남기어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를 바라며, 또한 그는 박해의 상황을 철저히 기록해서 전달함으로써 조선 교회의 재건에 관한 관심을 환기 시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본론'의 기록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는 신유박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대안제시'의 부분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는데, 그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방안으로 조선을 청국에 종속시켜 보고자 하였으며, 그의 이 발상은 종파를 초월하여 수용될 수 없는 주장으로 이러한 그의 발상은 달레(Dallet. 한국 천주교회사 著者)의 표현대로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에 있어서의 한 몽상(夢想)이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황사영의 `대안제시'를 반민족적 행위로 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 민족주의가 성립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제시되었던 그의 `몽상'을 반 민족주의로 까지 규정하는 데에는 재고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그의 `대안제시'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는 신앙의 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 국가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 백서사건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천주교 탄압은, 신유박해의 마지막 단계로, 이로써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처형 이후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크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01년 9월 26일(음) 황사영이 체포됨으로써 이 사건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데, 사건의 주범인 황사영은 의금부에 서 10월9일(음)부터 심문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의 신문이 체포이후 10여일 간 지체되었던 것은 사건의 중요성으로 인해 이 사건과의 관련사항을 파악하고 사건에 대한 대안을 사전에 마련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심문은 주로 `대안제시'의 반역적 요소를 추궁하는 측면에서 진행되는데, 백서의 사본이 청국에 전달되었을 가능성 등을 집중적으로 심문하였습니다. 심문결과 백서(帛書)가 청국에 전달되지 않았음을 자백 받고 11월5일(음) 이사건의 중심인물인 황사영은 궁흉극악 대역부도죄(窮凶極惡大逆不道罪)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처벌합니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1801년10월(음)에 청국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천주교 탄압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진주사(陳奏使)로 조윤대(曺允大)일행을 보내는데, 이때 (黃嗣永 帛書)의 내용을 16행 923자로 축소하여 청국의 예부(禮部)에 보고하도록 합니다. 이 축소본을 흔히 "가백서"(假帛書)라 부르는데, 이 가 백서에는 청국의 조선 감호책(監護策)이나 종주권(宗主權) 발동 등에 관한 내용은 완전 삭제시켰으며, 서양선박의 요청사실과, 월경통신(越境通信) 등의 사실을 이조흉계(二條凶計)로 지적하는 내용으로 담았습니다. 조정에서는 (황사영 백서)가 발각된 이후 청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사실이 청국에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이에 조선정부는 진주사를 파견하여 신유박해 전반에 관한 청국의 이해를 촉구하고, 주문모 신부의 처형에 따를 수 있는 청국측의 반발을 예방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로서 진주사(陳奏使) 조윤대의 파견은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사건을 외교적 측면에서도 마무리 지음으로  신유박해와 함께 종료를 고하게 되었던 겁니다. 끝 


 

**趙珖,(高麗大 史學科 敎授) 黃嗣永帛書의 社會思想的 背景, 발췌 참조하였습니다.

 

 

     † 찬미 예수님, 황사영 백서는 자유게시판에서 103위 순교전을 열심히 올려주시고 계시는 신성구 도마 형제님께서 오래 전 게시하신 글로, 형제님 윤허(^^*)하에 묵상 방 가족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옮겨왔습니다.*^^* 순교자 성월에, 순교 성인들의 위대한 신앙 유산을 함께 나누며, 묵상하며, 배우며, 은혜롭게 보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저도 조금이나마 자료에 보탬이 되드리고 싶어 황사영 백서 올려드립니다. 머무시는 형제.자매님들, 오늘도

평화 가득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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