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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99) 참으로 가슴아픈 묵상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10-09 조회수1,039 추천수8 반대(0) 신고

2005년10월9일 연중 제28주일 성 디오니시오 주교와 동료 순교자, 또는 성 요한 베르나르디 사제 기념 없음 ㅡ이사야25,6-10ㄱ;필립비4,12-14.19-20; 마태오22,1-14ㅡ

 

     참으로 가슴아픈 묵상

                                  이순의

 

 

 

일요일 아침에 아들녀석이 잠에서 깨어 엄마방으로 건너오며 걸어온 첫 말은 느닷없는 돼지 멱 따는 소리에 관한 것이었다.

<엄마, 친구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돼지 멱 따는 소리한다고 해.>

<왜?>

<그냥 자기들끼리 소리지르면서 그런말을 하거든. 그게 어떤 말인지나 알고 하냐고 물으면 너는 아냐고 대든다.>

<그럼?>

<당연히 안다고 하지. 내가 섬에 살을 적에 돼지 멱 따는데를 몇 번 봤잖아요. 어휴 그 고통스런 두려움의 소리! 끔찍한 그 몸부림! 그게 어떤 소리인지 안다면 친구들이 그 말을 쉽게 하지 못할 텐데....>

<소 잡는데는 못 봤어?>

<네. 아빠랑 어른들이 돼지 멱 딸때는 억지로 기어이 쫓아내지 않았는데 소 잡을 때는 기어이 못 있게 해서 못 봤어요. 그때 봐 뒀어야 했는데. 이제 내가 일부러 도살장을 찾아가지 않으면 볼 기회가 없지 뭐! 돼지도 끔찍한데 소는 더 끔찍할 거예요?>

 

그래서 또 대화의 난이도가 이른 아침부터 깊어졌다.

<임꺽정이 아버지가 백정이었는데 꺽정이 아버지의 신은 소였데.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꺽정이 아버지를 백정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했지만 꺽정이 아버지의 소에 대한 신앙은 대단한 깊이가 있었데. 피,고기, 뼈, 가죽, 남길거 하나 없이 모두 인간에게 주는 소를 숭배할 수 밖에 없었던 거지! 그래서 늘 저승으로 떠나 보내는 소의 극락왕생을 빌 뿐만 아니라 죽어야 할 그 소의 혼을 느끼고 나누고 위로하고... 아무튼 인간의 힘과 견줄 수 없는 신령한 소를 나약하디 나약한 인간이 잡아서 먹고 살아가는 꺽정이 아버지의 심금은 어린 아들에게 전이되었지. 꺽정이에게는 그런 정신만 훈육 된 것이 아니었어. 꺽정이 아버지의 지극한 정성을 알고 승천한 소들의 우덕(牛德)도 점지하여 받았는지 강건한 육신도 타고났지. 그런데 그런 꺽정이에게 세상은 그렇게 맑고 청명하지 못했지. 어쩌면 소만도 못한....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의 입장은 백정인 꺽정이에게 백정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거야>

 

아들녀석은 듣다가 말고 일어나 제 방으로 건너가며 시무룩한 혼잣말을 했다.

<그러니까 못 견디고 도적이 되어 역사적 인물로 성공한..... 나는 엄마의 그런 가르침에도 꺽정이 같은 인물이 아닌 걸!>

그런 의미로 꺽정이 말을 한 것이 아니었는데, 소에 대한 말이 나온 김에 그냥 늘 그랬듯이 집안 분위기상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였는데 또 집안 분위기상 아들녀석은 깊은 생각을 하며 그 이야기를 들어 연결했나보다. 부담을 주려는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냥 이야기를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서둘러 미사에 늦었다고 뛰고 있었다. 한 참을 뛰다가 보니 미사에 가는 것이 아니라 수험생 기도에 가는 것이었다. 수험생 기도 후에 미사를 보는 것인데 잠시 착각을 하느라고 열심히 뛴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수험생 기도를 하지 못했다. 합송에도 엉뚱한 말이 튀어 나오고 줄에 맞춰서 글씨가 보이지 않아서 다른 줄의 기도문을 읽으려 했다. 그럴때 나에게는 분심에 따라 기도를 하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수험생 기도 시간에 나는 그 원의의 기도에 충실하여 기도의 지향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런데 미사도 마찬가지였다. 미사시간 내내 오직 지향 하나 이외의 어떤 기도도 분심도 동행하지 못했다. 결국 오늘은 성령께서 나에게 이런 지향을 요청하신다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충실한!

 

왜 이렇게 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으시는 지 모를 주일이었다. 그냥 가슴이 아파서.... 그리고 묵상글의 제목을 강론 노트 위에 적었다. <참으로 가슴아픈 묵상!>이라고. 나는 지금 여행중이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작년 가을에도 떠난 두 달여의 여행이므로 나는 또 이미 얼마 전에 두 달여의 여행을 떠났다. 그래서 그 여행에 충실하고 싶다. 그러나 주님의 성령께서는 나에게 그 여행에만 안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시지 않고 있다. <이렇게 아픈 가슴의 묵상을 어떻게 글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 저는 모릅니다.> 라고 청하였다. 지금부터 나는 나의 의지로만 이 묵상글을 쓰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

 

<오소서. 성령이여! 저의 마음에 오소서! 굿뉴스의 묵상방에 오소서!>

 

환속!

가톨릭 교회 공동체가 성직자와 수도자들로 하여금 아버지 하느님을 향해 독신 서약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생되고, 받아들여야 하는 필연이다. 물론 불교의 조계종 같은 경우도 그러하지만 불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윤회라는 자연스러운 순응의 법칙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과 다르다. 그래서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의 모습으로 환속이라는 절명한 고행을 동반해야만 한다. 그것이 수도자 일 때도 그러하지만 성직자 일 때는 그 비중이 확산되어 본인 뿐만 아니라 교우들의 가슴에 엄청난 파장 뿐만 아니라 상처를 남기게 된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많은 교우들은 그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하는 기억으로 가슴에 담고 살아 간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왜 사람들은 축복과 행복을 빌어주면서도 그 절명한 실연(?)의 아픔으로 부터 치유 받으려 하지 않는가? 그것을 알아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그 해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계산서 없는 정성>이 그 이유였다. 내 나이가 불혹을 넘고 지천명에 가까워지고 있다. 세상을 사는 고집을 꺽고 하늘의 뜻을 알아 살아갈 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이미 하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버렸으니 새삼스러이 그 뜻을 알아내려고 몸살을 할 이유는 없는데도 이렇게 알아지는 것이있다.

 

이 나이 먹도록 살아보니 계산서 없는 지출이 자식에게만 있는 줄 알았더니 또 있었다. 그것은 신앙이었다. 교회에 낸 교무금이나 헌금은 물론 신학생들과 수도자,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는 신부님들의 주머니에 쑤셔 드린 돈은 계산이 없었다. 그래서 계산서도 필요없는 것이고. 마음도 사심이 없었다. 내가 드린 이 마음을 어떻게 돌려받을까? 를 계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잘나서도 아니고, 그가 멋져서도 아니고, 그가 똑똑해서는 더욱 아니었다. 그렇다고 만나서 내 말만 들어주는 소유물은 더욱 아니었고, 내 입장이나 어려움을 훤히 알아주는 그런 위로도 아니었으며, 만나지 않으면 죽을 것 처럼 정분이 난 사이는 더욱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깝지 않은!

 

진실로 세상에는 자식에게만 가능했을 <계산서 없는 정성>이 가능한 곳이 또 있었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자식에게 하는 <계산서 없는 정성>은 부모들만의 전유물이지만 교회에 낸 교무금이나 헌금, 신학생들과 수도자,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는 신부님들의 주머니에 쑤셔 드린 <계산서 없는 정성>은 믿는 이들의 합작품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식에게 주어지는 <계산서 없는 정성>은 부모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을 달리하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계산서 없는 정성>은 자비하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채우고 퍼내는 마르지 않는 샘물인 것이다. 그렇게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계산서 없는 정성>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공통점도 있다. 자식이 부모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 해도 부모는 그 <계산서 없는 정성>에 대하여 추궁하지 않으며 그 상처를 받아 안고 가슴에 담아 삮힌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른 길을 선택할 때도 <계산서 없는 정성>에 대하여 누구도 추궁하지 않으며 그들의 상처를 받아 안고 짐작만 한다는 사실이다. 나도 가난한 형편에 거금은 아니지만 그렇게 이해타산 없는 마음으로 <계산서 없는 정성>을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드려 본 적이 있고, 지금도 열심히 드리고 있다. 물론 시어머니께 드렸던 물질적 생활비라고 해도 계산을 해 본적은 없지만 그래도 마음은 다르다. 정말로 마음은 다르다. 오히려  자식에게 주는 마음처럼 투명하고.... 어쩌면 한 없는 기대를 하게 되는 자식에 대한 <계산서 없는 정성> 그 보다도 더 투명하다.

 

교회에서도 절대로 번복할 수 없는 것이 있다. 7성사 보다도 더 엄격하고 더 우선 순위에서 존재하는, 교황령 보다도 더 막강한 힘! 순명 중의 순명이라는 지킴! 그래서 절대로 번복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생명이다. 잉태! 그것은 모든 성사의 우위에 선다. 그러므로 그것은 용서나 회개 보다도 우선이며, 가장 존중 받는 보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람의 명운이라는 것이 사람의 뜻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서 환속이라는 것도 사람의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환속을 하는 본인도 그걸 지켜보는 정성들도 모두가 한 가닥의 소용돌이를 격어야 하는 몫은 마찬가지다.

 

오늘 내가 묵상을 한 것은 잉태라는 절대 절명한 이유가 아니라면 모든 수도회 장상들과 사제들의 장상이신 주교님들께서는 하느님의 마음 속으로 깊이 깊이 더 깊이 들어가 보셔주시기를 청하는 바이다.

 

물론 내가 생각한 것 보다 더 많은 고민과 갈등과 노력들을 동원하셨으며, 실행하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이 세상의 누구도 온전히 아는 사람이 없다. 자기의 신앙과, 자기의 믿음에서 나오는 기도로, 열심히 열심히 가까이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다. 추기경님께서 아주 젊으신 나이부터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 이유도 국가의 어려운 시국 앞에서 나약한 인간이 하늘의 뜻을 알아가느라고 그렇게 되셨다고 들었다. 그러고도 추기경님께서 받은 극단적인 비난들은 그 행하심에 대하여 주님께서 증명하여 도장이라도 찍어주러 오시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최종의 결실은 인간 안에서 구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인 것이다. 지상 대리자 교황님도 마찬가지실 것이고.....

 

이제야 일요일 하루의 지향이 쏠려버린 본론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먼저 나는 이 분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만난적도 없고, 서로 쪽지나 메일을 하여 친분을 나눈적도 없다. 오로지 굿뉴스에서 글로만 꼬리로만 만난 분이다. 그래서 어느 날 그분이 뜸 하셨다가 돌아 오셔서 환속을 선언했을 때는 신부님이었기 때문에 드린 <계산서 없는 정성>의 마음들이 아파서 몇 일이 힘들었다. 그리고 여러 이유와 경로가 있으시겠지만 흔히 말하는 여인이라는 스켄들이 이유인지, 아니면 다른 의협심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그 삶이 싫어져서 무조건 그만 두고 싶었는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모른다. 그래서 그냥 잊어버리기로 마음을 궂혀버린 것이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나에게 이런 묵상글을 쓰라고 하신다. 괴롭다. 나는 이런 묵상을 쓸 때 진땀을 흐르면서 쓴다. 끝마치고 나면 녹초가 되는.... 그래서 이런 묵상글을 싫어 한다. 그런데 쓰지 않으면 성령께서 나의 모든 기도 지향을 회복시켜 주시지 않을 것만 같은. 

 

교회에서 사제 직분을 포기 하셨다고 해도 7성사 안의 품계는 인호가 사라질 수 없으므로 직분만 금지 되었을 뿐, 그 인호가 새겨진 그 분께 이하 <신부님>이라고 명명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신부님께 힘내시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이 묵상글이 신부님께 누가 되더라도 너그러운 용서를 청합니다. 교회 안에서 직분을 벗어버린 많은 환속자들을 위로하는 의미에서도 이런 묵상을 쓰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신부님!

 

위에서 언급한 두 경우, 첫째; 여인이 있으셔서 사제직을 포기 하셨다면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어떻든 동반의 삶을 산다는 것은 고행일지라도 그나마 외롭지는 않을 것이고, 또한 그 선택에 미련은 없을 테니까요. 기쁘거나 편하거나 순탄할 수는 없어도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그 삶이 싫어서 인생을 무조건 달리 하고 싶으셨다면 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달리 살아 보셔야지요. 뭔지는 모르지만 그냥 달리 살아 봐야지요. 달리 살면서 새 삶을 맛 보시기 바랍니다. 그 개척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시기에는 신부님의 나이가.... 이 사회에서 새로운 개척을 하실 수 있도록 조건이 되어 줄지 걱정이지만 선택하셨으니 후화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가운데 토막; 의협심이 문제였다면 손이 발이 되게 빌어서라도 돌아가시라고 <계산서 없는 정성>을 드립니다. 신부님! 예수님께서 썩어 문드러진 세상을 보시고도 의협심이 없어서 십자가를 지고, 힘이 없어서 인간 같지도 않은 졸개들에게 두둘겨 맞았겠는지요? 방황하여 고통하지 말으시고, 주교님과 수도회 장상께 빌고 빌어서 라도 교구이적은 실패 하셨다고 하시니 수도회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교회가 갈라진 이유도 모두 의협심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떨어져 나간 그리스도교인들이 가톨릭의 부패를 울궈먹고 울궈먹고 울궈 먹습니까? 중세 교회의 부패를 바로 세우겠다고 나간 사람들은 모두가 가톨릭의 사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의협심으로 세운 교회들이 일치하는 모습으로 서로 사랑하는 그리스도 교회를 형성하고 정의롭고 주님 보시기에 성공한 성장을 해 가고 있는지요?

 

신부님! 그렇게 부패한 중세 교회 안에서 오히려 교회를 떠나지 않고 은수자의 길이나 전도여행을 떠나신 수 많은 성인들은 의협심이 모자라서 자기를 죽이고 바보 같이 살았겠는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순을 모순이라고 배척한 곳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그것이 모순이라고 보는 내 자신 안에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란 물론 교회 공동체도 모든 상황과 모든 사건과 모든 이유가 존재 하며, 그 응답은 이 세상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받는 것이니까요. 신부님! 주교님과 장상께서 거절 하시거든 어렵겠지만 그 수도회의 수위로 취직하십시오. 그래서 문지기를 하시면서 늙어지면 의협심 강한 후배 수도자들의 겸손한 스승이 되도록 하세요.

 

만약에 신부님께서 어떤 의협심 때문에 수도회와 타협하지 못했다면 순명의 서원을 어길 것이 아니라 계속 수도자로 살면서 장상이 되려고 했어야지요. 주님께 의탁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성인들처럼 기다리셨어야지요. 그리고 장상이 된 뒤에 신부님께서 생각하신 의협심을 실천하셨어야 합니다.

많은 교우들도 알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수도자는 가난하고 등골이 휘지만 수도회는 배가 터질지경이다.> 라든지 <진실로 가난 했던 성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지금의 수도회를 발견하신다면 요절에 박살을 낼 것이다.>는 것도 알구요. 또.... 그만 합시다. 신부님!

 

돌아 가실 수 있다면 돌아 가세요. 굿뉴스에서 신부님을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의 <계산서 없는 정성>에 상처를 내셨으니 신부님은 치료 한 번 해 줘 보세요. 지금까지 환속을 하신 분들 중에서 어떤식으로든 <계산서 없는 정성>을 갚고싶다고 오신 분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받으려고 드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받으려는 사람 보다는 못 갚아 드리고 사는 마음이 제 경험으로 보아 더 상처가 깊어서 살거든요. 그러니까 신부님의 상처도 치유 하시고, 사제직분을 금지 하셔야만 했던 주교님도 치유 해 주시고, 신부님을 가꾸고 일궈주신 수도회도 치유 해 주시고, 장상의 무거운 짐도 풀어 주시고, 무엇보다 신부님을 아직 형제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굿뉴스 가족들을 치유해 주세요. 신부님! 부탁합니다.

 

제 생각에는.....

아직 정결이라는 서원에 얼룩무늬를 새기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신부님의 겸손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야 성령께서 제 마음을 놓아 주시나 봅니다. 아침부터 단단히 옭아 맸던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하는 군요. 제 할 일이 끝난 것 같습니다. 오늘 저를 이토록 힘들게 하시는 성령의 요청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부터는 신부님을 가슴에 얹고 몸부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신부님! 거~ 문화 영성 연구소 그거 안하면 어떻습니까? 주님을 믿으려는 마음은 따름이 우선입니다.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잖아요?! 중세 가톨릭 교회를 떠나 수 없는 분열을 초래한 그런 성직자들과는 다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말은 정당했으나 그들의 행위는 곧 그리스도 교회의 분열이었습니다. 분열은 순간이었으나 일치는 언제 이루어 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신부님! 돌아가 손이 발이 되게 빌어 보십시오. 어미가 되어보았더니 손이 발이 되게 빈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외람되지만! 죄송하지만! 신부님이 제 아들이라면 장상께도 주교님께도 그리고 주님께도 제 손 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발이 되도록 빌어보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자식이 원하지 않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 입니다. 제 자식을 제가 편 들어 주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누가 제 자식의 편을 들어 주겠습니까?! 신부님. 제 아들이 임꺽정이 같은 인물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제 아들인걸요.

 

램브란트의 <돌아온 아들>이라는 성화가 그냥 그려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부님! <계산서 없는 정성>으로 사랑을 드립니다. 어떠한 삶을 살으시든지 항상 건강하시고, 언제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신부님!

 

<오소서. 성령이여! 저의 마음에 오소서! 굿뉴스의 묵상방에 오소서! 아멘.>

 

ㅡ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마태오22,14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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