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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01) 가을을 준비하신 성령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5-10-11 조회수1,175 추천수14 반대(0) 신고

2005년10월11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ㅡ로마서1,16-25;루가11,37-41ㅡ

 

                   가을을 준비하신 성령

                                            이순의

 

 

간밤에 청소를 하다가 아들의 보조가방을 들추게 되었다. 중학교 때 까지만 해도 아들의 가방을 들여다 보는 것은 서로에게 무신경했으나 어느 날 부터 나도 아들도 아들의 가방 속에 대하여 서로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아들의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곧 아들의 마음을 아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 벌려진 보조 가방 속에는 새로 산 만화책이 두 권 들어있었다. 분명히 초저녁에 엄마랑 타시락 타시락 다툴적에는 참고서 타령을 했기 때문이다.

 

참고서를 사줄 형편이 못 되어서 다툰 것이 아니었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을 따라서 무조건 보지도 않을 참고서를 사지 마라는 꾸지람이었다. 너의 수준에 맞게 너가 할 수 있을 만큼만 사서 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참고서를 더 사다가 공부하지 않는다고 나무라지 않고 저 모양이니까 자기가 공부를 못한다는..... <그래 이놈아 내가 너를 낳았으니 뭐든지 내가 죄인이다. 이놈아! 되었냐?> 그리고 옥신각신하던 말싸움은 일단락 되었다. 그런데 그 만화책을 발견하는 순간 머리에서 꼭지가 돌아버리려다가.... 초저녁에 티격태격한 생각이 나서 꿀꺽 침을 모아삼켜 억지로 넘겼다. 

 

언젠가 작은 언니가 초등학교 동창회를 20여 년 만엔가 가서 술을 제법 마셨던 모양이다. 그때는 중학교 시험이 지금의 대학입시처럼 치열하던 때니까 작은언니가 공부를 잘하여 시골이지만 전국에서도 그리 빠지지 않는 인제들이 제법 배출되었던 좋은 중학교에 차석, 여자로는 수석입학을 하였으므로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초등학교 동창들 사이에서는 소문보다는 실물을 본 소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렇게도 깐깐한 기억의 억척이가 술을 홀짝홀짝 마시는 모습에 <아~~! 세월이 약은 약인가 보구나.>라고 했던가 보다.

 

그리고 또 한두 해 지나서 두 번째 동창회를 갔었다. 그런데 남자동창들이 서로 술을 가져와서 자꾸 권하더란다. 느낌이 이상하고, 왜 친구들이 술을 권하는지를 몰라서 초판부터 술을 딱 거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사단이 났다고 하니.... 이유는 20여년 만에 나타나서 술만 먹고 가드니 두 번째 나타나서 거절을 하는 이유가 뭔지? 초등학교때 처럼 잘난척을 하는지? 인간차별을 하는지? 세월이 흘러서 콧대가 꺽인 줄 알았더니 동창회에 두 번째 나타나 이 나이에 사람 자존심 꺽을 일 있느냐?고 시비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때서야 작은언니는 사태 파악이 되었더란다. 그리고 사태수습에 들어 간 것이다. <그때는 내가 방황을 했으니 술을 마셨고, 지금은 내가 방황이 끝났으니 술을 마실 이유가 없어졌다.>고. 일순간에 동창들의 눈동자는 동공이 확대되고, 그 동공에 물음표를 번쩍번쩍 그리며, 머리는 15도 각으로 꺽였다가 돌아오더란다. 자세한 해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무렵, 형부께서 살다보니 심심해 지셨는지 어쩌셨는지 잠시 바깥 바람을 좀 쏘이고 다니신 것이다. 그러니 평생을 동창회 한 번 가 보지도 않고 가정을 지켜온 작은 언니의 가슴도 바깥 바람을 쏘이고 싶어진! 

 

그런데 이 못난이가 겨우 바깥 바람 쏘인다는 게 20여 년만에 코흘리게 친구들 만나러 가서 술만 마시고 온 것이었다. 그러니 동창회에 간들 동창회에서 무슨 재미가 있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관심 밖이었던 모양이다. 그때서야 상황을 알아차린 친구들이 <야~~! 역시 모범생 다운 처사였다,>고 이해를 해 주면서도 허탈해져버린 것이다. 작은 언니의 성격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열심이고, 최선이고, 까실까실하고, 자존심 세고.... 사람이 변하면 죽어야 한다고 하지를 않던가? 동창들도 변하지 않는 작은 언니에게 더 술을 권하지 않았다고 한다.

 

초여름에 나는 중대한 사단을 내고 말았다. 순둥이와 대쪽이라는 극과 극의 별명을 소유하다 보니 아마도 사람들도 헷갈릴 것이다. 너그럽기 시작하면 한 없는 것 같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단칼에 끝나버리는! 물론 그 단칼질이 시행될 때는 순둥이의 바보스러움이 수치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동원된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물건을 살 때 백화점의 직원들이라도 초라한 입성에 화장기 없는 얼굴에 목소리는 철없는 소녀 같이 괴(?)스러운 고객에게 말랑말랑하게 위 아래 흩어보고 깔아보고 동물원의 구경거리 취급을 하면 큰코를 다치게 된다는 말이다. 나에게는 모임이 많지는 않지만 꼭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임이 남편의 친구들 모임이다.

 

남편이 몇 번을 그만 두려고 한 모임을 억지로 나 혼자 나가면서 유지를 해 온 애착을 가졌었다. 그런데 그렇게 중시 여기던 모임을 봄에 그만두어 버렸다. 사태는 아주 간단했다. 한두 해 만난 사이들이 아니라서 서로 장단점을 어느 만큼은 알고 허물없는 사이들인데다 남편들이 주인공인 모임이니까 정말로 이물 없고 좋은 관계들이다. 그런데 이 대쪽 같은 성미가 중지 선언을 해 버린 것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신 지금에 와서 아들의 보조가방 속의 만화책을 발견하는 순간에 그 모임을 중단하기를 정말로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서로 오래 사귀어 온 친구들이니 그 동안 나눈 대화가 시시콜콜하였고, 어지간 한 자녀들 내막은 서로 들어서 아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내 아이와 동급생의 아이를 둔 친구가 있는데 그 아이는 특수목적고를 다닌다. 그래서 그 자부심이 대단하고 그 사실은 늘 자랑거리이며, 본인은 잘 모르지만 옆에서 듣는 사람들은 그 기대감과 자랑스러움이 어느 만큼인지 쏟아져 나올때는 간혹은 거슬리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나도 내 아이가 쭈~욱 성직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왔으므로 서로 대화를 하여 훤히 다 아는 사이였다. 어쩌면 그 아이보다 성적이 못한 정당성을 무심코라도 그렇게라도 피력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입시의 문턱에 서니 내 아들녀석은 거부의사를 확실히 하고 나선 것이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진지하게 대화가 되었던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하여버린...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또 성직이야 말로 부모가 이겨서 보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들의 진로에 대하여 갑자기 공황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모임이 끝나고 차를 마시다가 이야기가 되었는데 갑자기 내 아이가 진짜로 신부님이 될것인지 물어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크면서 변해가느라고 예전 같지 않고 지금은 아들의 마음을 모른다고 말을 했고 상대방에서는 자존심에 거슬리는 말을 쏘아버렸다.

 

그리고 귀가 어두운 나의 목소리는 톤이 올라갔고, 나는 <공격적이다.>는 말을 받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다음 모임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 생각을 많이 해 보았다. <성령께서 제 입시울을 열어 주시는 대로 말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모임에 가서 나는 모임에 더 나오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친구들은 자격지심이라고 했지만 나는 나에게는 자격지심이 없다고 했다. 나는 하느님 앞에 인간의 자격에 대하여 무관하여 사는 사람이므로 자격지심 따위는 예시 당초에 가져 본 적이 없고, 동급의 친구들 사이에서 서로 존중을 해 주어야 할 자존심에 금이 갔기 때문에 나는 자존심에 금이 가면서 까지 더 이상 참석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인생도 내가 모르는데 자식의 인생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 때는 그런 마음이었고, 지금은 그런 마음이 아닌 자식의 인생을 나는 모른다. 라고! 그리고 모임은 소강상태에 빠져버린.....!

 

그리고 나는 올 해 여름에 내 인생이 아무리 힘이 들었어도 내 자식의 고3 만큼은 이렇게 보내리라고 상상하지 못한 계절을 보냈다. 같은 동급생을 두고, 일반 인문고등학교에 다니는 내 아이와 특목고의 그 아이! 생활고에 시달려버리는 여름을 사는 나와 살만한 사람의 그! 누가 나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힘들었던 여름이었는데, 입시에 관한 정보라도 오고가고 했더라면 비교된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부모의 마음으로 내 정신은 온전히 유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아이는 수능을 44일 남겨 놓고 가방 속에 만화책을 담아서 다니고 있었으니..... 성령께서 내 아이의 그릇에 맞게 나에게 상처 받지 않는 여름을 살게 하신 거로구나! 라고 위로를 받았다.

 

당황한 아들녀석이 변명을 하기는 하였다. 공부를 안한 것이 아니라 정신의 휴식이라고. 수험생이라고 어떻게 24시간 문제집만 보느냐고.그러나 부모도 안다. 포기 할 것은 포기를 해야만 서로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가끔은 순둥이여서 자식의 미래를 기다려 주기로 지켜 보기로 했다가도, 대쪽의 근성이 발동을 할 때면 그 동안 인내를 가지고 봉헌해 온 이 묵상글들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제 자식하나 공부도 못 시키면서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아서 이토록 많은 흔적을 남겼더라는 말인가?! 그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워 한 순간에 모든 글들을 삭제하고 한강에 뛰어 들어가 죽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을  믿는다는 두려움도 있고, 그 보다 더 큰 작용은 생때같은 내 자식의 가슴에 장도(長刀)를 꽃아버리는 어미가 되어서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자식의 눈에서 피눈물을 쏟게 할까봐 그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극단의 대쪽을 순둥이로 전환시키고 전환시키느라고 100일 동안의 기도를 다니고 있다. 기도하는 모습이야 순전히 나이롱 빵 이지만 마음이야 오리지날로다가 주님께 의탁하고 온다. 맨날 지각이지만 그래도 주님을 만나고 오면 그게 또 천국이라서 나는 100일동안의 기도를 다니고 있다.

 

치성이 자식을 위한 치성이기도 하지만 해 보았더니 자식이 실패를 하더라도 써 놓은 묵상글들을 전부 삭제하고 한강물에 뛰어드는 무모한 발상을 지우는, 그토록 사랑하는 자식의 그 만큼을 인정하고 보듬어 안을 준비를 하는 100일 치성이었다. 봄에 나는 올 해 여름을 몰랐다. 봄에 나는 가을의 아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내가 조금이라도 덜 고통 받고, 조금이라도 덜 상심하는, 그 중에 행복한 만족을 최대한 크게 마련하고 계셨던 것이다. 나의 자존심으로 인하여 서로 만나지 못하는 그 친구들께 <모든 것이 내가 믿는 성령께서 그런대로 견딜만한 가을을 나에게 마련하신 때문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 말의 믿음을 그들이 이해할지는 모르지만....

 

그 친구들 중에 내 묵상글을 읽는 친구가 있다는 느낌으로! 

<미안하다.>고.

 

ㅡ그래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차 있다. 이 어리섞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신 것을 모르느냐? 루가11,39-40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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