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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직 하느님의 도움에만 의지하는 사람
작성자양승국 쪽지 캡슐 작성일2005-10-31 조회수795 추천수11 반대(0) 신고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마태오 5장 1-12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오직 하느님의 도움에만 의지하는 사람>


저희 같은 활동수도자들은 관상수도회 수도자들이나 정주(定住)수도회 수도자들과는 달리 교구신부님들처럼 인사발령에 따라 거처를 옮기기도 합니다. 인사이동을 하게 될 때, 그간 정들었던 거처를 떠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크지만, 다른 한편으로 수도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어 좋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에 하나의 획을 긋고 또 다른 미지의 사목장소로 떠나가는 일은 꽤 마음 설레는 일입니다. 그래서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수사신부님 한분은 수 십 년간 자신의 사목지를 떠나지 못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곳이 물이 좋은 자리여서, 목이 좋은 자리여서, 그럭저럭 지낼만한 자리여서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목대상자들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 남들이 다들 외면하는 사람들, 투자해봐야 밑 빠진 독의 물 붓기인 사람들을 꼭 끌어안고 묵묵히 그 어려운 자리를 지켜오신지 벌써 사반세기가 지나갑니다.


그동안 그 개념 없는 사람들, 몰상식한 사람들과 몸 붙여 살아오면서 고초도 많았을텐데, 신부님은 겸손하게도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그들에게 도움을 베풀었다고 하기보다 도움을 받은 것이 더 많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을 통해 인간 안에 육화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노라고 기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복팔단을 통해서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기에, 희망이 보이지 않기에, 그저 하루하루 삶을 견뎌가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과 같이 당시 잘 나가던 사람들, 한 자리씩 하던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불편한 삶은 안중에도 없이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던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도대체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린가?’ 하면서 속상해했습니다. 코웃음도 쳤겠지요.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은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진복팔단의 말씀은 다분히 역설적(逆說的)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그 자체로서 불완전하기에 큰 의미나 가치가 없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간다. 이 세상의 불행은 저 세상 행복의 보증수표다. 현실적 고통을 꿋꿋이 견뎌낸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다음 반드시 참된 행복-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실 것이라고 강조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특징은 불행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고통의 파도가 다가와도 그저 묵묵히 현실을 수용합니다. 각박한 현실 앞에서도 쉽게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그 누구를 저주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사랑이 베풀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을 의미하겠습니까? 좁은 의미로 보면 물질적인 궁핍 상태에 놓인 사람들을 뜻합니다. 좀 더 넓은 의미로 본다면 종교, 정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한 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변호할 능력이 없고, 이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사라져버린, 그래서 오직 하느님의 도움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절망상태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따가운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시어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하면서 병을 고쳐주시고 죄를 사하시어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세상이 바뀌면 교회도, 선교방식도 변화되겠지만 소외자들을 특히 편애하다시피 하셨던 예수님의 그 사랑은 오늘의 우리 교회에서도 변하지 않는 방식으로 실천되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분명히 교회 안에는 많은 소외자들이 있습니다. 그 옛날의 소외자들에다 많은 장애우들, 여러 가지 이유로 이혼한 사람들, 외국인 근로자들 등등을 보태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수는 예수님 시대보다 더 많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가난한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사랑 속에서 교회에 들어와 쉴 수 있고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우리 교회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교회가 소외자들의 안식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바깥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은 교회에서도 여전히 푸대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애우들이 바깥에 나가기가 무척 어렵지만 특히 성당에 가기는 더 힘듭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당들은 장애우들이 다니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은 건물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단이 많다보니 장애우들뿐만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은 본당에 갈 엄두조차 못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정이 부족해 편의시설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말은 거의 믿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거금을 들여 멋진 성상을 세웠습니다. 모두들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것처럼 기뻐했지만 그런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소외자들은 또 한 번 교회에서조차 버림받은 느낌에 아픈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박미경, 갈라진 시대의 기쁜 소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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