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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장 아름다운 꽃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5-11-02 조회수1,227 추천수13 반대(0) 신고

                              가장 아름다운 꽃

                                       

 

 

                             가장 아름다운 꽃

 

 

오늘을 위령의 날로서 돌아가신 분들을 특별히 기억하고, 그분들이 하느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이 기쁜 날일까요? 슬픈 날일까요?

위령의 날 하면, ‘죽음’ ‘죽은 자’라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을 보면 기쁜 보다는 슬픔, 우울함이 더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죽음, 그 자체가 바로 고통이요, 아픔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이 기쁨이요, 편안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 결혼한 지 얼만 안 된 부부에게 닥친 배우자의 죽음은... 또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자녀의 죽음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아픔이요,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되는 고통입니다.


때문에 죽음은 피해야할 것으로, 가급적 멀리 떨어져야 할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죽음을 슬픔, 고통, 허무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죽음이 슬픔, 고통, 삶이 끝나는 허무일까요?

죽음은 긍정적인 의미, 곧 기쁨,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일까요?


갑작스럽게 남편과 이별한 한 자매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죽었다.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남편이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새벽에 경부고속도로에서 대형 트럭이 남편의 차를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며 남편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했으나..

인정할 수가 없었다.

여름휴가 때 첫 아들을 안고 고향의 바닷가를 찾자고 하던 말만 떠올랐다.

나는 임신 중이었다.


도대체 하느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원망스러웠다.

가난했지만 착한 마음으로 열심히 세상을 살려고 노력하던 남편이었다.

다니던 성당에 발길을 끊었다.


그리고 고통 가운데 해산을 했다. 남편이 바라던 대로 아들이었다.

나는 아들을 안고 남편의 고향을 찾았다.

동해가 보이는 산자락에 남편은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포대기를 열어 남편이 잠든 무덤을 아기에게 보여주었다.

파도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남편을 일찍 데려간 하느님이 다시 원망스러웠다.

아들을 얻은 기쁨보다 남편을 잃은 슬픔이 더욱 컸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왜 성당에 가지 않느냐?”

산을 내려오자 시아버지가 그녀를 불렀다.

정이 넘치는.. 햇살같이 따스한 음성이었다.


“나가기 싫어서요, 아버님.” “왜?”

“그이를 일찍 데려간 하느님이 원망스러워요.”

“이렇게 어여쁜 아들을 주셨는데도?” “네, 그래도 원망스러워요.”


내가 말도 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이 글썽해지자..

시아버지가 그녀를 마당 앞 꽃밭으로 데리고 갔다.

꽃밭에는 장미와 달리아, 채송화와 도라지꽃 등이 활짝 피어있었다.


“여기에서 꺾고 싶은 꽃을 하나 꺾어 보거라.”

시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가장 아름답게 핀 장미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러자 시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우리가 정원의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이.. 하느님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꺾어 천국을 장식한단다. 얘야, 이제 너무 슬퍼하지 마라.”


그렇습니다. 죽음은 슬픔, 아픔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데려가 버린 하느님이 밉고, 원망하게 하는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는 남아 있는 이들의 생각입니다.

먼저 떠나간 님들은... 부모님과 자녀들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가고자 하는.. 가서 살고자하는 하느님 나라에서 한 송이 백합꽃으로 은은하고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슬퍼하지만, 그분들은 기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들에게 무책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당신만 행복하면 그만이냐고 투정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은, 하느님께서 늘 우리 코 안에 숨을 불어넣어주시기에 살아가는 것이지, 어느 때라도 하느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주시지 않으면 생명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느님께 무책임하다고.. 당신 마음대로만 하는 이기적인 분이라고 원망할 수 있을까요?

이 또한 없습니다. 그저 주어진 생명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에서 알려주듯이, 이 세상 소풍이 다하는 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제게 생명을 주셔서 참 기쁘고 행복하게 생활하다 왔습니다. 비록, 힘들 시기와 마음 아픈 추억! 사랑하는 님들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고통이 있지만, 이는 모두 하느님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당신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거쳐야할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우주 만물과 당신을 느끼게 해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셔서 진정 감사드립니다.”는 고백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생명입니다.

언제나 ‘푸르는 청춘’이 아니라, 피고 또 지는 꽃잎 같은 청춘이요, 하느님께로 향해 나아가는 생명입니다.

푸르른 청춘이 다 가기 전에, 하느님의 숨결인 생명이 내 몸 안에 남아 있는 동안에, 하느님을 만났을 때, 어떤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잘 준비했으면 합니다.

그런 자세가 바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참된 죽음을.. 고통, 슬픔의 죽음이 아니라, 기쁨의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 이찬홍 야고보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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